모든 중생은 고정됨이 없어서 그대로가 참선이며 화두이다
나라를 이끌어 나가고 국민을 이끌어 나가려면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균등하게 균형을 잡아서
마음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또다시, 항상 함께하면서도 너 나로 따로따로 있다가 또 이렇게 한데 한자리를 하고 있군요. 오늘 말씀드릴 것은 지금 분단된 우리가 너무도 요새 물바람이 세어서 위태위태한 것을 볼 때에, 지금 현재에 닥쳐오는 문제를 볼 때에, 엊그저께가 오늘이고 내일이 오늘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하고 싶군요. 옛날이 아니라 여러분이 더 잘 아시다시피 신라와 고구려, 백제 세 나라가 있었을 당시의 얘길 잠깐 하겠습니다. 나는 역사를 배우지도 않았지마는, 우리가 이렇게 국난에 빠져서 허덕일 때는 생각이 납니다.
신라가 삼국 통일 하기 전 얘깁니다마는 원광 법사라는 유명하신 스님이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나보다도 더 상세히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분은 참 도가 높고 공부를 잘하셔서 그때는 부처님 법이 절대적이고 이름도 유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까지 안 퍼진 데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널리 이름이 퍼졌던 그분이 그럼 신라에서 무엇을 가르쳤느냐? 한마음 도리를 가르쳤던 겁니다.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항상 그것을 거름으로 하여 현재에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서 나갈 것을 가르쳤죠. 신라의 그때 상황에 따라서, 그때 사람들의 차원에 따라서, 그 사람들의 용도에 따라서 말씀을 해주셨던 겁니다. 때에 따라서는 화랑들이 찾아오면 찾아오는 대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다섯 가지 예의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법도를, 계율을 말입니다. 첫째는 충성을 다하는 것을 잊지 말고, 둘째는 효도하는 것을 잊지 말고, 셋째는 싸움을 하러 나갔을 때에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이고, 넷째는 친구들을 사귀되 한마음으로서 둥글게 사귀며 마음을 같이할 수 있는 둘 아닌 도리를 가르쳤고, 다섯째는 전쟁터에 나가서 상대방을 죽이게 될 경우 살생이 아니라 가려 가면서, 한 사람을 죽일 때도 열 사람 백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가려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섯 가지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짐승을 죽일 때도 여름이나 봄에는 알을 낳으니깐 죽이지 말 것이며, 가려서 죽이라는 얘깁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식을 낳고 사는 부모로서의 마음은 애틋하기 그지없으니 짐승들의 마음이나 사람들의 마음이나 똑같다는 걸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도 역시 한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간절히 일깨워 주셨고, 그때 당시에 모든 왕이든 왕족이든 정치하는 사람들도 다 원광 법사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고 들었답니다. 그렇게 따르고 듣는 반면에 원광 법사 스님은 참, 대도를 펴시면서 한마음 도리를 심어 주신 거죠.
화랑들이 이어서 이어서 전달을 하면서 수많은 화랑들이 그 정신을 이어받았답니다. 수많은 화랑들이 이어받은 것은 물론 아낙네들도 이어받으며 왕족들도 이어받으며, 신라뿐만 아니라 옆의 나라들도 전부 그렇게 받아들이다 보니까 삼국 통일을 하는 데도 원광 법사 스님이 가르쳐 주신 뜻이 거기에 베풀어져서 많이 기여했다는 그런 얘깁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리가 정신을 활용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한생각에 우리한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들이닥친 문제들, 한마디만 이렇게 하죠. 부처님의 뜻을 받는 불제자들은 항상 겸손하게 숭고하게 호국 불교를 염원하면서 게을리하지 않고, 한생각을 그렇게 호국 불교의 정신으로써 사찰마다 부처님의 뜻을 받아서, 나가서 몸뚱이로 돌아치는 게 아니라 항상 앉아서 염원하고 게으르지 않게 정진하는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지금 이러한 문제가 닥쳐오는 것이 우리 산 사람들의 행위만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못해서만도 아니죠. 정치를 하는 데 학생들 문제도 국민들 문제도, 벌어지고 있는 게 어디서 왔는가,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앞에 닥치면 그건 당연히 스스로서 생각나는 겁니다. 내가 왜 오늘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거와 같이 나도 똑같이 아마 그런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렇게 물결치듯이 바람 치듯이 하는 것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할 때에 다 흡습을 못 했으면서도 통일을 했던 것, 그것은 바로 원광 스님의 그 뜻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둘이 아닌 오늘인 것입니다. 그때의 오늘도 오늘인 것이요, 오늘의 오늘도 오늘인 것입니다. 그러면 당면 문제가 어디서부터 오는가? 내가 어리석어서인지 모르지마는 내가 오늘날에 생각해보니 419도 있었고 625도 있었고, 또는 생각해 보니 삼국 통일 할 때 그때의 영령들도 지금 산 사람들에게 물결과 바람으로 치는 동시에…. 산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했든지 잘했든지 어느 누구가 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당면해 벌어지고 있고, 또는 그렇게 물결치는 것이 어디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는 역력히 침착하게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나빠서도 아니죠. 마음에 따라서 육체가 움죽거리듯이 스스로 그러한 문제가 일어난다면, 여러분 마음의 동요를 시키고 학생들의 마음을 동요를 시키고…, 625 사변 때도 얼마나 무참히 죽었습니까? 419 때도 학생들이 무참히 죽었으며 또는 삼국 통일 할 때도 그렇게 무참히 많은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요기에 관한 건만 얘기하느라고 그러는 겁니다마는, 우리가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하는 것이 진리라고는 하지만 그 마음들이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그 잠재의식 속에 입력되었으면, 때에 따라서는, 즉 말하자면 쓰레기통의 벌레들이 우르르르 한 떼로 나와서 수만 마리가 퍼지듯이 보이지 않는 데서 그만큼, 잠재의식의 영령들이 바람을 일으키고 물결을 일으키고 국난엔 여지없이 문제가, 이러한 문제가 당면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보이는 데만 알고 안 보이는 데는 등한시하는 이러한 습관들이 있어서….
옛날에는 왜 그렇게 국사들을 모셨던가? 나라를 이끌어 나가고 국민을 이끌어 나가려면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균등하게 균형을 잡아서 마음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하고, 물결을 막아야 할 줄 알고, 그 물결을 응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는,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듯이 영령들로 어떤 일이 벌어지면 영령들의 군부를 풀어서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안을 세웠던 겁니다. 그랬는데 오늘날 우리는 보이는 것만 알고 보이지 않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국방부에 사람이 몇이며 또는 포가 몇이며 잠수함이 몇이며 차가 몇이며, 비행기가 몇이며 속사포가 몇이며 총이 몇인가만 가지고 논의하기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한다 이 소립니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데로 나오는 것, 일체 모든 살아가는 생활이 그대로 심성 과학이며 도며 진리라는 뜻입니다. 이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 우리가 앞으로 자라나는 애들을 키우면서 그 자라나는 애들이 또 주인이 되면서 일꾼이 되면서, 우리가 이러한 정신을 갖지 않고는 앞으로 더욱더 힘에 겨운 문제들이 많이 벌어지게 될 거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러한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문제겠죠.
여러분도 지금 살아 있으면서 이 도리를 모르고 몸이 있을 때에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마 그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대로 팔짝팔짝 뛸 겁니다. 나로서는 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근중하고,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우주간 법계의 문제도 그렇지마는 우리 앞에 닥쳐오는 문제를, 왜 이렇게 내가 이 자리에서 얘기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깊이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한생각에 가정을 이끌어 나가며, 내 몸을 이끌어 나가며, 사회를 이끌어 나가며, 국가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도 지금 균형을 잡아서 물바람이 칠 때는 바로 물바람으로 막아야 하고, 불바람이 칠 때는 불바람으로 막아야 하고, 흙바람이 불 때는 흙바람으로 막아야 하는, 그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 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잘 이끌어 나가면 보이는 세계로 잘 이끌어지는 그런 도리를 정치하는 사람일수록 잘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잘못 끌고 가면 온 국민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니까요.
또 한 가지는 여러분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르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은 똑똑히는 말은 안 하겠지만 싸움을 안 하고도 손만 닿는 사람이 있다면 ‘손만 닿게 해라, 그냥 먹겠다.’ 이러한 문제도 당면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어떠한 잘못된 개념과 어떠한 사람이 잘못한다 나무랄 그런 시대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잘 판단하셔야 될 줄 압니다. 앞으로 몇 해가 지나서도 잘못한다면 ‘너는 잘못하니까, 밟아야지!’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시대라고 봅니다. 그러한 반면에 똑똑히 말해서 내가 왜 이런 말을 여기서 하며, 여기서 이런 말을 하면서 내 나름대로 귀정을 짓는 그러한 도리가 바로 그 뜻입니다. 사람이 못하면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이 해야죠.
이 세상에는 세계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여기처럼 이렇게 방치해 둔, 아마 요런 조그마한 나라도 없을 겁니다. 딴 데서 어떠한 문제가 벌어졌을 때 역사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렇게 불 지르고 죽이고 돌멩이질 하고 태우고 그렇게 데모하는 거는, 아마 그렇게 과격하게 하는 거는 못 봤을 겁니다. 이것이 그 애들 잘못이 아니라 이건 국난입니다. 이 모두를 우리가 겸해서 말하는 겁니다. 어느 자식이 내 자식 아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내 남편 아님이 어디 있으며 정치를 하는 사람도 내 아버지이며 내 오빠며, 내 부모며 바로 내 형제인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어디를 나쁘다 어디를 좋다 하겠습니까? 좋다 나쁘다 하고 싸울 때가 따로 있지….
월남에서도 많은 경험을 얻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우리가 얼마나 집을 잃고 전세방도 없이 힘들게 살았습니까. 그전에도 얘기를 했지만 셋방으로써 근근득생하다가 겨우, 지금도 제한을 받지 않는 거는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자유스럽게 움죽거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지금 배고파서 죽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디다. 너무 방치해서, 너무 방탕해서, 너무 이론이 많고 겨워서 말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그것을 왜 생각하느냐? 지금 시대에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래도 반드시 참고적으로 밑거름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치인도 아니요,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한자릴 하고 있는 한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하는 데 뒤에서는 뒷받침을 했습니다. 도교로써, 도심으로써. 그래서 얘깁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한생각으로서 합심해서 부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가 내 형제, 내 국민과 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질 때에 그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리고 물결치는 것은 능력이 있으면 있는 대로 우리는 한생각에 의해서, 어디서 오더라도 어떻게 막아야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옛날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한 계단을 내려서 이보경계라고, 이름해서 그것도 합니다. 그건 보살행이라고 봅니다. 그럴 때에 보살행은 이 모든 일체가 평등함으로써 주처의 뜻을 모두 한마음으로서 귀결짓는 반면에 아마도…, 예전에 625 났을 때에 밀고 들어간 맥아더 장군이나 또는 박 대통령 또는 이승만 대통령 이런 분들도 역시 그때에 일본 사람들하고 싸우느라고 그 군부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결사단이 정해지고 그래서 영령들이 지금도 역력히 살아 있다고 봅니다. 그 의식이 남아 있고. 의식이 남아 또 부산이나 지금 군묘지나 우리가 급할 때는 때에 따라서 그렇게 귀결을 짓고 보이지 않는 데서 물결칠 때는 보이지 않는 데서 물결을 일으키는, 즉 보이지 않는 군부를 일으키는 그런 이보경계도 있다 합니다. “있다 합니다”가 아니라 있습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지금 배우고 가는 도중에 부처가 된다, 법신이 된다 하기 이전에 행을 그대로 하는 것이 보살의 도리요, 사람의 도리요, 바로 말 한마디 한마디 법의 뜻을 그대로 응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떠나서 우리가 ‘보살의 행을 한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생각할 때는 모든 것은 잠재의식 속에서 각본대로 나오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일어나니 바로 그것을 놔야 된다. 밑 빠진 두멍에 놔야 된다. 자기를 믿지 못하고 누구를 믿느냐. 만약에 자기 주먹이 마음이라면 자기 주먹을 믿어라 이거야, 자기 주먹을 믿어! 이 손가락이 왜 다섯 개가 됐느냐? 오온이 한 주먹에 들어 있어. 십선이 한마음에 들어 있고 팔정도가 바로 사무 사유, 이 세상 우주의 섭리까지도 전부 한꺼번에 들었거든.
그러니 여러분이 이 공부를 공부라고 하기 이전에 여러분은 저한테 와서 한 가지 한 가지 말씀을 하시고만, 때에 따라서 공부하시는 분들은 얘기하고 인사하고 나가면 되는 겁니다. 왜? 열 가지든 만 가지든 그 속에서 다 해결이 나는 거니까. 듣는 사람도 그냥 듣는 게 아닙니다. 한마음으로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기 때문에 들어만 줘도, 우리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야 더 빠르고 그 뜻도 알게 돼요. 여러분이 행을 해 나가는 데도 물론 그대로가 법이라고 하고 여여하다고 하지만 첫째, 놔야 된다, 모든 것을. 모든 소유를 놓는다. 둘째는 모든 생활이 참선이며 일체 한군데로 들고 나는 것이 전부 화두며, 바로 참선이다 이겁니다.
우리 일체 중생이 다 지금 그 뜻을 안다면 여여하게, 보이지 않는 데서나 보이는 데서나 균형을 잡아서 스스로 해 나가게 돼 있어요. 진짜로 믿어야 하는 거죠. 여러분이 그것을 믿고 나가는 데는 항상 어느 가정이든지 어느 스님네들이든지 누굴 막론해 놓고, 괜히 조그마한 거 큰 거 가지고 성내지 않는다. 크고 작은 것을 얕잡아 보지 않는다. 또는 말을 할 때, 성을 내고 와락와락 말을 할 땐 벌써 얼굴상이 달라져. 웃으면서 조용조용히 얘기할 때, 할 말을 다 하면서도 화합이 되고 그것은 싸움이 되지 않아. 우리가 그렇게 살아도 이 모습을 가지고 얼마 살지 못하는 이런 판국에 왜 그렇게 왈가왈부하고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서 말도 하대해서 하지 말고 생각조차도 언제나 그렇게 해 나가야 하는 거죠. 보살행이라는 것이 하도 말이 많아서, 그래서 이것을 끄트머리로 ‘모든 소유를 밑 빠진 두멍에 놓는다’ 해야죠.
모든 중생은 고정됨이 없이 평등하여서 그대로 축이며 참선이며 화두다. 일체가 고정됨이 없어서 공덕 계율을, 행을 배운다. 개성은 평등하여서 행함 없이 행하는 까닭은, 사람의 불성은 평등하여 마음과 상이 없는 까닭에 견고한 용맹이 스스로 생긴다. 정진은 평등하여 마음과 행을 스스로 세우지 않는 것이 일상삼매 행이며, 평등선정이다. 지혜로운 마음은 평등한 고로 생각하는 바 없이 법주(法住)에 나는 것이며, 말과 정(定)이 두루 하여 둘로 보지 않고 모든 신통을 스스로 굴리며, 신통은 세울 바 없이 평등하여 말이 구족하며, 법의 뜻이 두루 하며, 법계가 평등하여 끄달리지 않는다.
게으르지 않고 한마음의 법을 내어 중생들을 평등한 심성으로 이끌어 청정한 마음으로 함이 없이 이끌어 주며, 함이 없이 이끌어 가는 그 사실이 바로 이름해서 삼십이상이 구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보살계를, 보살계율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데 우리 생활이 그대로 참선이며 그대로 계율이며, 그대로 함이 없이 하며 보살행으로서 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갸륵하고 얼마나 거룩한지…. (중략)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살행을 해서 법도를 안다면 우린 우주하고도 섭리가 같이 통하기 때문에 어떠한 거든지 둘이 아니라, 둘이 아닌 까닭에 바로 나가 있고 너가 있고, 바로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돼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도리를 알게 되면 정말이지 우리는 좋은 이 바닥에서, 예전에 삼국 통일 했듯이 부처님의 뜻이 이어져서 우린 통일을 할 것입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배우는 여러분도 그렇고 또는 은연중에 모든 불자들도 그렇고 다 그것을 받아들여서, 그냥 목숨을 걸고 육신으로 뛰고 온통 나서서 천주교니 기독교니 야단인데 불제자들은 좀 안정하면서 사찰마다 한생각 내서 기원하는 것이 오로지 피를 보지 않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럴수록 모든 것을 몸으로 뛰는 게 아니라 침착하고 아주 근면하게, 여기서 한 발짝을 떼더라도 태양계를 한 발짝으로 뛰는 것처럼 해야 됩니다. 태양이 딴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의 그 태양이 저 큰 태양보다도 더 귀중한 것입니다.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87년 6월 21일 정기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