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길을 묻는 이에게] 어린애가 젖줄을 놓치면 죽듯 자부처의 젖줄을 놓치지 말라

자기 마음의 밝은 불씨를 지혜롭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올릴 때는 내  마음을 탕 비우고서 
갖다가 놓고 예배를 하고, 예배가 다 끝나고 관할 때는 
다시 몽땅 갖다가 내 마음속에 놓고 관하는 것입니다.

… 융통성이 없기에 앞으로 공부해 나가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지능이 발달돼야 한다’ 또는 ‘우리가 지혜로써 무기를 삼아야 한다’ 이런 문제 등등이 있을 때 모든 지혜가 스스로서 부풀려져야 됩니다.

우리가 상황에 따라서 법당에 있을 때는, 만약에 예배를 올린다 이럴 때는 부처님 앞에 몽땅 갖다가 한군데다 놓고 예배를 올린다. 자기는 비우며 살아라 이겁니다. 또 그때에 다 갖다가 하나로 뭉쳐 놨다가 자기가 참선할 때나 이럴 때는 순간, 갖다 놓고 절을 했다가…, 자기한테 절을 한 거지마는 그것이 자기만이 아니에요. 일체가 다 들어 있는 한마음의 한 점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위로는 상구보리요, 아래로는 하화중생이라’ 이런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복으로만 나갈 게 아니라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그 뜻을 잘 알아서 행할 수 있는 대로 행해 본다면 우리는 지혜롭게, 참선이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그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부처님 앞에 오면 부처님 앞에 절도 하지마는 예배 올리고 난 뒤에 고할 때에도 항상 부처님 앞에만 고하고 있습니다. 관할 때도 그렇고요. 그러한 것이 바로 융통한 그 지혜가 없어서 그렇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예배를 올릴 때는 내 마음을 탕 비우고서 갖다가 놓고 예배를 하고, 예배가 다 끝나고 관할 때는 다시 몽땅 갖다가 내 마음속에 놓고 관하는 것입니다.

저 꽃나무를 본다 하더라도 내가 상황에 따라서 꽃나무가 되려면 되지마는, 상황에 따라서 꽃나무가 내가 되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이 아닙니다. 어디에 가서든지 둘이 아니죠. 그쪽이 내가 됐다가 내가 바로 그쪽이 됐다가 이런 융통성이 없이는 지혜가 나오질 않아요. 그리고 또 그런 융통성이 없이는 항상 둘 셋으로 돌아가지 하나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잘 아셨죠?

그래서 여기에서 초하루, 보름 이렇게 설법을 하고 또 이틀 사흘 되는 날도…. 우리가 얘기만 들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항상 자기 마음에 있는 밝은 그 불씨를 얼마만 하게 내가 지혜롭게 쓸 수 있느냐. 지혜를 내느냐. 또는 그것을 얼마만큼 내가 관해서 자기 생명수의 그 근본을 발견하느냐.’ 이게 문젭니다. 그럼으로써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죽 앉아서 관하고 참선을 하는 데도 망상이 수없이 떠올라. 몸뚱이는 여기 앉았는데 벌써 마음은 집에 가서 애들하고 뭐 어쩌고저쩌고, 남편하고 어쩌고저쩌고 또 친구들하고 뭐 어쩌고저쩌고, 장사하는 일 또 집에서 안 되는 일 뭐, 이런 것이 담뿍 들었거든. 그렇게 해 가지고는 도저히 발견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어지럽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해결은 근본에서 해결이 돼야지, 근본이 아닌 이상, 즉 말하자면 예전에도 얘기했듯이, 뿌리가 싱싱하다면 가지도 싱싱하고 이파리도 싱싱하거늘, 그리고 이파리가 싱싱하다면 꽃도 피고 열매도 맺을 거건만 그거는 생각 안 하고 이파리 시든다고만 걱정을 하고 또 가지가 썩어 들어간다는 생각만 한 거예요. 이것은 근본에서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가지도 이파리도 누렇게 썩어 들어가는 이치가 있습니다. 이거는 가정과 같은 겁니다. 그리고 또 내 몸과 같은 겁니다.

또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하는 데도, 어떠한 환경에 따라서 장사를 하든지 또 회사를 하든지 그러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좀먹는 것은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것을 싱싱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근본에서 해결을 해서 스스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뿌리는 뿌리 없는 뿌리기 때문에, 체가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슬기로운 마음만 먹는다면 그 슬기로운 마음에서 수없이, 이파리의 잘못된 벌레 먹은 거 또는 그 가지의 벌레 먹은 것들을 다 제거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안 되는 것만 가지고 뭐냐 하고 망상에 찌들린다면 우리는 정말 근본의 그 생수 맛은 도저히 맛볼 수도 없거니와 그 생수로 인해서 말짱히, 벌레 먹은 거나 썩어 들어간 거나 그런 것을 해결할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살아나가는 데도 부처님 법이기 이전에 내 법을 그냥 활용할 수 있을 때 부처님도 역시 같은 마음으로 한마음이 돼서 같이, 금과 같고 옥과 같아서 금으로 다듬고 옥으로 모든 일들을 활용할 때 우리는 초가삼간을 지어 놓고서도 충성, 효도를 다해 가면서 수없는 나날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 하는 이러한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유스럽게 참, 나물을 먹고 팔 베고 누웠어도 대장부 살림살이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좁아터진 마음, 아주 옹졸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나간다면 어느 시에 편안한 날이 없어.

그리고 또 신도 여러분 중에서도 집안에 어떠한 문제가 있어서, 괴로움이야 천차만별로 많겠지마는 그런 것을 근본에다가 만약에 맡겨 놓으시고 모든 것은 거기서 한다고 믿을 때, 비로소 체 없는 자기의 수천수만이 체가 없는 금과 같은 빛으로서, 부처님의 빛으로서 다 찬란하게 자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그런 문제입니다.

옛날에 어떤 스님네들이 지내는데 항상 얻어먹고, 이렇게 여러분이 가져오는 거를 먹고 그저 절만 받고, 절을 받으면 자기가 받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이거는 너무나 모순된 일입니다. 여러분이 절을 한다 하더라도 나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절을 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받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아까 얘기했듯 여러분이 부처님 앞에 당신의 마음들을 탕 비우고서 갖다 놓고 절을 할 때에 여러분한테 여러분이 하는 거지 부처님이 받으시는 게 아니요, 여러분이 절을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한테 자기가 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항복시키고, 자기가 자기에게 항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사실대로 알면서 자각해 들어간다면 머지않아서 한국 불교도 생동력 있게 대성황 할 수 있는, 삶의 보람을 여러분한테 갖다 줄 수 있는 그러한 불교가 될 겁니다. 그것이 불국토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러니 가르치는 분들도 그렇지마는 배우는 분들도 똑바로 배우고 똑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의지력과 지혜로운 마음을 융통성 있게 내야 됩니다. 한번 그렇게 얘기했다고 해서 꼭 그렇게만 알지 마시고 융통성 있게 환경에 따라서, 내게 줬다면 바로 네가 있는 것이 내가 되고 그럴 때에 이 불성이거든요.

어떠한 환경에 있어서 빚을 받으러 가는 데도 때에 따라서는 ‘너 이놈, 두고 봐라. 너 얄미워서 내가 돈을 꼭 받아야겠다, 오늘은.’ 이러고 가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언제나 그것을 둘로 본다면 아니 됩니다. 언제나 슬기로운 마음으로써, 없다면 ‘없는 것을 어쩌겠나.’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내게 주고도 남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 준다면 바로 이 주인공이 저 주인공을 불러서 그쪽으로 줬을 때, 나는 빈 그릇만, 입만 가서 놀렸는데 그것은 나이기 때문에, 바로 자기 마음이기 때문에 자기가 슬기로운 마음으로써 자비가 생겨서 자기 죽이는 일은 없거든. 자기를 자기가 멸시하는 일이 없고 자기를 죽이는 일이 없고, 자기 못되게 하는 일은 없기에 그 마음이, 자기가 화해서 “아, 그렇지. 내가 줄게.” 이렇게 나오지, 나쁘게 나오진 않습니다.

이 모두가 여러분의 그 지혜로운 마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또 이 부처님 법을 배운다고 하는 것도 여러 가지가지가 있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이 좁고 넓고 옹졸하고 그렇기 때문에 천칠백 공안이 그렇게 있지마는 여러 가지로 넓게 직선적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돌아서 가는 사람이 있고, 또 구덩이를 메워 가는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가지로 이렇게 많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하다 중동무이했습니다마는, 그래서 그 주는 거를 전부 내가 받는 줄 알고, 나는 머리 깎고 승복을 입었으니까, 스님이니까 부처님 제자임에는 틀림없고, 부처님의 대리로서 내가 하는 거니까 부처님 대리로서 내가 받는다고 생각을 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가져오든지 서슴없이 받아먹고 서슴없이 그렇게, 어떠한 의미를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저 많이 받고 욕심 많게, 먹는 것도 받는 것도 조금도 의심 없이 그냥 그렇게 했답니다.

그런데 의심 없던 거는 좋았는데 함부로…, 남의 땀을 몰라. 남의 안타까움도 모르거니와. 그런데 자기가 받는 게 아닌 줄을 몰랐고, 남한테서 자기가 받는 것을 받는 걸로 알고 주는 것을 주는 걸로 알았으니 이것은 잘못돼 돌아간 거라. 그러다가 어느 해에 스승도 열반하시고 제자도 늙었으니 죽었죠? 그런데 제자를 채 가르치지 못한 채, 자기도 배우지도 못한 채 이렇게 가다가 열반 당시에 얼마 안 돼서 생각이 퍼뜩 일어났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 마음이 퍼뜩 일어나서 그것을 다 일소에, 모든 것을 깨닫고 열반을 하셨지만 자기 제자는 캄캄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는 제자대로 죽어서 옷을 벗고서는 가난한 집에 가서 태어났습니다. 조그마한 오막살이 집에서 조실부모를 하고 농사를 지어 먹게 됐고 그 스승은 참, 위대하다고 본다면 부처님 자리에 같이 한자리 하셨겠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 인연에 따라서, 제자가 자기 탓으로 인해서, 자기가 생각할 때 자기의 탓도 아니고 그 탓도 아니지마는, 그래도 길잡이로서 제자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만 그 집의 암소로 소 형상을 쓰고 거기에 소 새끼로 잠시 잠깐 계셨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소로다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소를 끌고 이렇게 다니며 송아지를 길러서 소를 만들고, 소는 팔아먹고 그 송아지 태어난 걸 가지고선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애는 애대로 셋이나 낳고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만 소하고 제자였던 주인하고 농사를 짓다 보니까 발에 똥 옴이 올라서 다 죽게 생겼단 말입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면 다 죽게끔 생겼어요. 그것도 역시 이유가 있기에 그렇겠죠.

그런데 하루는 소도 아주 그냥 농사짓느라고 그것만 끌고 다녀서 어려우니까 소 발 밑에 왜, 지금 뭡니까? 장식 끼우는 거, 그거를 제대로 못 끼워서 그냥 닳아 가지고 피가 줄줄 나는 형편이라. 그러니까 어느 날은 소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자꾸 발짓을 하는데 입으로 “음메 음메” 하면서 자꾸 이 옷자락을 쥐거든요.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전부 이 옴이 올라서. 그러니까 소도 놀리고 자기도 영 움죽거리지 못하니까, 조그만 애들 농사짓게 할 수도 없는 거고, 농사지을 수도 없는 거고, 부인이 끌고 다니려도 부인은 애들을 길러야 하고 그러니까 참 살기가 급박해졌더랍니다.
근데 하루는 그렇게 자꾸자꾸 소가 끌어요. 그래서 소 하자는 대로 하니까 그냥 소가 하염없이 가더랍니다. 주인은 주인대로 끌려가니까 어느 물이 내려오는 데에, 썩은 골창에서 내려오는 물이 고인 데로 소가 가더니만 거기에다가 발을 쓱 담그더랍니다. 발을 쓱 담그며 구부리고 앉더니 다시 일어나서 주인을 끌어 잡아당기면서 시늉을 하니까 그대로 몸을 그 물에다가 자꾸 씻고 담글 수밖에. 그래서 거기에 담그니까 몸이 시원하면서 그 병이 점점점점 나아 가는데, 이 집에서는 어디 간 줄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 병이 나아 가는데 잠이 혼곤히 들었어. 그랬는데 그 소는 바로 자기 전자의 은사였고 자기는 바로 제자였죠. 그런데 자기는 그 뜻을 모르니까 세상에 다시 내려보내져서 그렇게 고생을 하고 그렇게 하면서 지낸 거죠. 그런데 은사 그분이 “저기 좀 쳐다봐라.” 해서 보니까 거기는 전부 송장 썩은 물이 내려오는 겁니다. 송장 썩은 물이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는 소리가, 은사 말이 “네가 전자의 내 제자였고 내가 너의 은사였지. 은사였기에 내가 너를 이 세상에서 또 어떻게 볼 수가 없어서, 길잡이를 제대로 못 해 줬으니 길잡이를 제대로 해 주기 위해서 내가 소 몸을 타 가지고 또 너한테 왔느니라. 내가 갈 때가 인제는 됐어. 그런데 저 송장 썩은 물도, 우리가 이 세상에 지수화풍으로 나왔다가 지수화풍으로 돌아간다 할 때 그 물과 불 또 바람, 이 흙이 전부 사람들의 거름이 되고 사람들의 약이 되느니라. 그래서 하나도 버릴 게 없느니라. 이것은 모두 우리가 지금 살면서도 없어서는 아니 되지마는 죽어서까지도 다 주고 가느니라.” 이거야. 다 준다, 되돌려준다 이거야.

그러니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발을 담그고 이렇게 있는 그 자체가, 그 썩은 물 자체가 바로 내 한마음의 태양과 같고 약과 같고, 약도 되고 태양과 같기도 합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태풍은 바람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바람은 바람으로 막아 주고 흙은 흙으로 막고 불은 불로 막고 물은 물로 막는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이것이 전부 스스로서 이 마음에서 지혜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그런 줄 알고 이 자리에서 다시 그것을 깨달았으면 나를 따라서 오라.” 하고선 그냥 그 자리에서 그 소는 그대로 옷을 벗었답니다.

이분은 이분대로 혼곤히 잠을 깨 가지고선 생각을 하더니 옷 벗은 소를 붙잡고 그냥 엉엉 울었습니다. 울다가 울다가 보니까 자기 병은 다 낫고 싱그러워진 그 마음속이 너무나 밝아서 훤히 자기가 어떻게 지내 왔다는 거, 지금 이렇게 온 거를 자기 자신이 너무 잘 알게 됐더랍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렇게 변장을 해 가지고 자기를 인도한 그 소 모습을 몇몇 일을 땅을 파서 묻고 돌아서서 자기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버리고 절을 향해서 다시 올라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버리는 것도 그렇습니다. 옛날에 사명 대사도 부인과 자식을 홀랑 태워 버리고 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를 불 질러서 태워서 태운 게 아니라 정말 태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불로 태워 버렸대도 태워 버린 게 아닙니다. 진짜 태우는 거는 그렇게 태우는 게 아니거든. 그래서 그렇게 불 질러 버리고 가 버린 그분은 마음 한생각으로써 그 아들들을 정승까지 이르게 했답니다, 그 스님이. 그러면 어땠겠습니까? 사람이라는 게 농사철에 아버지도 가 버리고 그랬는데 그 삼 형제가 정승까지 한 것은 길을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두고 가니까 그만 정승의 집에 양자로다가 갔어요. 자식 없는 데 양자로 가 가지고선 그렇게 크게 됐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도, 자기가 버리지 않은 아내도 전부 잘되고 그렇게 했지마는 그 사람은 그걸 모르죠. 그러나 이 스님은 항상 안팎으로 언제나 마음을 융통성 있게 지혜로운 마음으로 한생각을 내는 반면에 그것은 깨달은 부처님의 마음이겠죠.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며, 스스로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서 부처님의 뜻을 아신다면 우리들의 그 아픈 마음과 더불어 이렇게 고통스러운 마음이 한결….

오늘날 여기에서 공부하시면서, 부처님이 저렇게 계신데 그전에는 형상이다 이랬지마는 지금은 또 다릅니다. 여러분이 여직껏 공부하셨으니까 “저 형상인 부처님도 내 형상이요, 내 형상도 저 부처님 형상이니라.” 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 형상도 변질이 돼 가지만 저 형상도 변질이 돼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롭게 ‘저 형상도 내 형상이다’ 이러는 것은 환경에 따라서 저 형상도 내가 돼 보고, 예를 들어서 내 내공의 부처님이, 자부처님이 저기 한데 계시고, 때에 따라서 관할 때는 여기다 넣고, 내가 여기에서 떠났을 때에는 항상 여기에 모시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떠나서는 아니 되고 떠나서 관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애가 젖줄을 놓치면 죽듯이 그 젖줄을 영 놓치지 마셔야 하는 일이 있음으로써 나중에 커지면 젖줄은 스스로 놔집니다.

그렇게 하시도록 우리 노력하면서 가정에서 급한 거 먼저 생각하지 마시고 근본에서 급한 거를 빨리 해결을 하도록 근본을 찾아야 그게 빨리 해결이 됩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어서 아무리 쫓아다니면서 그걸 해결을 하려도 급하게 안 됩니다. 그러나 진짜 사람의 그 체가 없는 참마음의 자부처는 원자력 에너지와 같아서, 발전소와 같아서 어디로든지 가설이 된 데는 다 연결이 돼서, 마음과 마음이 연결이 돼서 일이 해결이 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번에도, 아, 미국에서 뭐 어쩌고저쩌고 하시는 걸 귓결에 들었습니다. 그 귓결에 들은 그 순간입니다. 사람이라는 거는 어디까지나 이렇게 귓결에 들어서 할 수 있는 것도 인연입니다. 그런데 와서 맨날 고하고 고하고 해도 먼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 줄 아십니까? 마음이 그만큼 여기에 집중이 되지 않은 사람은 멀고 집중이 된 사람은 가깝습니다.

한 체가 있는 몸에서 체가 없는 마음은 환경에 따라서 수천수만이 돼서 그 모습을 바꿔서 환경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됩니다. 그걸 모른다면 우리는 항상 중생으로서 고를 놓지 못하고 아마 항상 휘달릴 겁니다. 윤회에도 그렇고 업보에도 그렇고 유전에도 그렇고, 그 어떻게 삽니까, 이루종차. 지금 우리가 요렇게 살아가는 것도 아주 죽겠는데 자식 대까지 물리면서까지, 또 그렇게 살아온 그 부모의 마음도 그렇고 모두를 몰락, 우리 그렇게 살지 말고 몰락 놔 버려서 아래 위가 다, 삼세가 다 공하고 공해서 참, 공한 도리를 우리가 그대로 사용하고 응용하고 여여하게 용을 한다면, 용을 한다는 생각도 없이 스스로 아마 밝아서 우리 살림살이가 궁색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 마음이 궁색하지 않은데 어찌 살림살이가 궁색하겠습니까?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86년 6월 7일 일반법회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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