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사랑하고 ‘쿨’하게 보내자
사랑과 이별, ‘因緣’서 비롯돼
인연 있어 만나고 헤어짐 반복
이별을 인정 못하고 집착함은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단 증거
아름다운 이별
“눈물이 흘러 이별인 걸 알았어/ 힘없이 돌아서던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만큼 너도 슬프다는 걸 알아/ 하지만 견뎌야 해/ 추억이 아름답도록”
김건모가 부른 ‘아름다운 이별’이란 노래의 가사다. 이별이 슬프다는 건 알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추억이 아름답도록 아픔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래 제목처럼 이별이 정말 아름다울 수 있을까? 노래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실제 이별은 그렇지 않다. 그저 아프고 또 아플 뿐이다. 애써 잊으려 노력하다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 가수 역시 “한동안 난 가끔 울 것만 같아”라고 말하면서 노래를 마친다.
이별이 힘들어서인지 이를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예전 드라마를 보면, 자신과 헤어지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장면도 심심찮게 나온다. 때로 자신을 떠난 연인을 스토킹하거나 폭력을 쓰는 사례도 있다. 심지어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이별이 힘들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별이 힘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바로 함께한 시간 때문이다. 이를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업(業)’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몸과 말, 마음으로 지은 행위는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조건만 주어지면 불쑥 튀어나온다. 예컨대 지방에 살던 사람이 서울로 올라와서 표준어를 사용한다 해도 긴장하거나 결정적일 때는 자신도 모르게 사투리가 나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연인과 이별해도 그동안 사랑했던 기억이 무의식에 두터운 업으로 남게 된다. 그녀와 걸었던 가로수길, 차를 함께 마신 카페 등을 지나가면 지난 추억이 떠오르는 이유다.
나훈아도 ‘갈무리’에서 노래하지 않았던가. 잊어야 하는 줄 아는데, 이제는 남인 줄도 아는데, 자꾸만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고. 사랑 갈무리가 잘되지 않는 자신이 밉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업(業)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그 지혜를 얻어보기로 하자. 이 시를 읽으면 과연 이별을 잘할 수 있을까?
김소월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를 모르면 한국인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인데, 대중에겐 소월(素月)이라는 호가 익숙하다. 글자 그대로 하얀 달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비운의 인물이다. 우리 민족의 토속적인 한(恨)의 정서를 시로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일본 유학을 떠날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과 한국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하게 된다. 귀국한 후에는 ‘동아일보’ 지국을 열고 운영했으나, 일제의 방해 등으로 문을 닫고 만다. 당시에는 가세도 기울어져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린다. 술에 의지한 소월은 1934년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뇌일혈로 삶을 마감한다. ‘진달래꽃’을 비롯한 ‘엄마야 누나야’, ‘산유화’, ‘초혼’,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등 주옥같은 시들만 남아 시인을 추억하고 있다.
‘진달래꽃’은 김소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다. 1922년 7월 〈개벽〉 잡지에 처음 실렸으며, 1925년 발간된 시집 〈진달래꽃〉에도 담겨있다. 이 책 초판본은 2011년 문화재로 등록될 정도로 우리에겐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자신을 떠나는 여인이 사뿐히 즈려밟고 갈 수 있도록 진달래꽃을 따다가 뿌린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시는 가수 마야가 노래로 불러서 더욱 익숙하기도 하다. 이 외에도 ‘엄마야 누나야’를 비롯하여 정미조가 부른 ‘개여울’, 배철수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등의 노래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면 시인은 이별의 아픔을 어떻게 소화하는지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
오랜만에 이 시를 읽으면서 어떻게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난 연인을 위해 진달래꽃을 따다가 뿌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미움과 원망이 먼저일 텐데, 아마 그 아름다운 꽃을 즈려밟고 가시라 노래할 정도로 깊이 사랑했던 것 같다. 이런 시는 진하고 가슴 아픈 사랑의 경험이 없으면 쉽게 나올 수 없다. 실제 소월은 할아버지의 결정으로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지만,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다른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둘은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한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어찌 보면 소월에게 사랑과 생의 이별이 함께 찾아온 셈이다. 원하지 않은 결혼, 금지된 사랑, 연인의 죽음. 소월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시인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아파했고 그 마음이 고스란히 시 속에 남아있다.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로 시작하는 ‘초혼’은 그녀의 장례식을 다녀온 후에 쓴 시다. 소월이 진달래꽃을 땄다는 영변의 약산은 지금은 북한의 핵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핵 오염으로 진달래는 물론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땅으로 변했다 한다.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서정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은 느낌이다.
시인은 떠나간 여인의 아픔을 노래했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별을 대하는 자세 또한 엿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과 이별을 ‘인연’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한마디로 인연이 있어서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헤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흔히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이라 한다. 굳이 사랑과 이별을 말하지 않더라도 자연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가 인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지금은 온 산하가 연초록 잎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이러한 인연은 역설적으로 그토록 아름답게 피었던 벚꽃이 모두 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봄이라는 인연이 벚꽃을 피웠다면, 벚꽃이 인연을 다해 연초록 잎들이 나온 셈이다. 이제 곧 봄의 인연이 소멸하고 여름의 짙은 초록이 찾아올 것이다. 그 뜨겁던 여름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들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하는 현장에 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랑은 인연이 찾아온 것이며, 이별은 그 인연이 소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지금 그 인연의 소멸에 대해 아파하고 있다. 흐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고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 다짐도 한다. 인연이 다했음을 인정하려 애쓰는 모습이다. 앞서 말한 이별을 인정하지 않고 스토킹하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일부 그릇된 경우와 사뭇 다르다. 1986년 상영된 영화 ‘나인 하프 위크(nine 1/2 weeks)’에 나오는 대사다.
“둘 중 하나가 끝이라 말할 때 끝인 거예요.”
이별을 통보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는 상대에게 여주인공이 한 말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9주 반 동안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그 정도가 사랑의 유효 기간이라는 뜻인 것 같다. 어찌 사랑에만 유효 기간이 있겠는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연 또한 마찬가지다.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무상(無常)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인연의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다이내믹한 삶의 과정에서 만남과 이별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소월은 떠나간 여인을 위해 진달래를 따다가 애써 쿨한 척 보내주었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죽을힘을 다해 눈물을 참고 말없이 곱게 보낸 것이다. 유효 기간 동안 연인을 마음껏 사랑했기에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원래 최선을 다해 사랑하면 후회도 적은 법이다. 남녀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 정성을 다한 효자는 장례식장에서 그리 울지 않는다. 가장 많이 우는 자식이 가장 불효했다고 생각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부모에게 잘못한 일들이 후회되어 우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연이 찾아왔을 때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그렇게 사랑하고 이별하면 지나간 일은 집착이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이별을 인정하지 못하고 집착하는 것은 유효 기간 동안 마음껏 사랑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후회와 집착은 마음껏 사랑하지 못한 이들의 변명일 뿐이다. 정성을 다해 사랑하면 쿨하진 못해도 소월처럼 아름답게 보내려 노력은 한다. 이것이 사랑했던 이에 대한 마지막 예의다.
온 세상이 연초록으로 물들고 있다. 연초록 타임이 끝나기 전에 마음껏 후회 없이 즐겨야 할 것 같다. 이 또한 아름다운 계절에 대한 예의 아니겠는가. 그리고 인연이 다하면 쿨하게 보내주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해야겠다. 곧 여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