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강소연의 수행 다이어리] 사마타 수행이 준 선물 ‘무’

의식이 작은 ‘나’로부터 분리되고, 크나큰 바탕 자리(허공)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강소연
의식이 작은 ‘나’로부터 분리되고, 크나큰 바탕 자리(허공)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강소연

8.  분리와 전환 

사마타 수행이 준 가장 큰 선물은 ‘무(無)’에 대한 눈뜸이다. 평생 ‘있는 것〔有〕’만 보고, ‘없는 것〔無〕’은 보지 못했다. 사마타 수행을 통해 의식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비로소 허공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즉, 물고기가 물을 모르고 몸이 공기를 몰랐던 셈이다. 건물·전신주·집·사람·자동차·동물 등 있는 것만 보았지, 그것이 ‘허공’이라는 바탕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은 몰랐다.

분리
흑백사진을 인화하기 전, 필름에는 허공이 까맣게 드러나고 피사체가 하얗게 보인다. 필름은 바탕과 물체의 실루엣을 반대로 보여준다. 의식이 (작은) ‘나’로부터 분리되어 (크나큰) ‘바탕’으로 전환되면, (마치 필름에서처럼) 바탕(또는 허공)의 존재를 확연하게 인식하게 된다. 

사마타 수행으로 일순 ‘의식과 무의식’의 작용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하면, 마치 천근이 빠져나간 듯한 가벼움을 느낀다. 하늘을 훨훨 난다. 24시간 365일 평생을 괴롭히던 의식과 무의식에서 잠시 벗어나 인생 처음 진정한 휴식을 맛본다. “아∼ 살 것 같다!” 기존에는 내 눈높이로만 세상을 보았는데, 이제는 나를 벗어난 객관적인 관찰자 시점이 확보된다. 그렇게 되니 타인의 의도가 훤히 꿰뚫어 보이기도 하고, 나도 그저 남처럼 군중 속의 한 인물로 보인다. 그리고 내 의식의 경계선 밖에 있던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더 이상 ‘나의 인생’ ‘나의 과거’ ‘나의 고통’이 아니라, 그냥 남의 일처럼 맹숭맹숭해진다. 갑자기 꿈에서 깬 듯, 취기에서 벗어난 듯, 울음이 뚝 그친 듯, 그렇게 한순간에 집착이 떨어져 나가고 의미가 없어진다. “이제 뭘 하지? 시골로 가나? 자연인이 되나? 서원(誓願)을 세우나?” 항상 너무나 바빴는데, 이제 딱히 할 게 없네! 생존적 허덕임이 멈춘다. 

‘무(無)’에 대한 눈뜸
하지만 그것도 잠시. 외출했던 의식은 이 몸이 제집인 양 다시 돌아온다. 하늘을 훨훨 날던 의식은 다시 감옥에 꽁꽁 갇힌다. 광활한 투명 의식과 잠시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시커먼 거적때기를 뒤집어쓴다. 내 몸과 마음(업식)에 다시 와서 찰떡처럼 붙어버린 의식. 이것(내 몸과 마음)이 예전에는 감옥인 줄 몰랐다가, 이제 감옥인 줄 알았을 때의 그 난감함이란! 모르고 갇혀 있을 때와 알고 갇혀 있을 때는 얘기가 다르다. 고질적인 업력은 다시 돌아가고…. 곤두박질친다. 휘둘리는 줄 ‘모르고’ 휘둘릴 때보다, 휘둘리는 줄 ‘알고’ 휘둘리는 것이 더 고약하다. 

하지만 사마타 수행이 준 선물은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바탕자리(허공)로 의식을 전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없음(無)’에의 눈뜸. 이것만으로도 삶의 도피처가 생긴 것이다. 숨통이 트인 듯, 살 구멍이 뚫린다. 하지만 단점이 있다. ‘있다(有)와 없다(無)’, ‘In and Out(들어가고 나가기)’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 고통이 오면 바탕자리로 의식적 전환을 하여 잠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 계속적으로 머물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래서 ‘냉탕(바탕자리)과 온탕(업식자리)’을 오가며 끓탕과 해방을 반복한다.

그 이유는 ‘유有’라는 덩어리 개념에서 ‘무無’라는 덩어리 개념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덩어리 대(vs.) 덩어리’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정의 힘이 약할 때는 하릴없이 업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무(無)의 이미지’로 전환하지 않고, 지금 ‘현재’에서 몸의 ‘무상성(無常性)과 공성(空性)’을 보는 방법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덩어리’로 볼 것인가, ‘분해’해서 볼 것인가 
사마타의 대상은 이미지 또는 개념인데, 이는 모두 덩어리로 인식된다. 반면, 위빠사나의 대상은 ‘유동성’이다. 즉, 형성되고 움직이고 변화하는 대상의 속성과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요소들의 실체를 꿰뚫어 본다. 모든 것은 ‘변화 중에 있다’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또는 만물유전(萬物流轉, 만물은 흐르고 있다)의 진리이다. 즉, 한 장짜리 사진(still cut, 정지 사진)이 아니라, 움직이는 동영상(motion picture, 활동 사진)으로서의 실상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나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점이 열리는데, 그것은 나와 세상을 더 이상 (덩어리가 아닌) 분해해서 보는 방법이다. 

정리하면 먼저 사마타 수행의 결과로 얻게 되는 (의식의) 분리를 통해 고요함〔定〕을 획득하고, 그 자리에서 발사되는 빤야〔慧, 통찰지〕를 통해 (덩어리로 보였던) 대상을 해체해 버리는 것이다. 연기(緣起)하는 모습을 통찰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공성(空性)이 드러난다. 이것이 붓다의 수행법(사마타+위빠사나, 정혜쌍수定慧雙修, 지관겸수止觀兼修)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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