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부처님은 올려다 보아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는 단계가 ‘인위’
수많은 계단은 부처님 올려보는 장치
그래야 본받고 싶고 가르침 계속 생각
대각전에서 부처님이 부처님을 장엄하는 〈화엄경〉의 법계에서 다시 부처님을 색으로 보지 말라는 〈금강경〉의 사구게로 자유로이 산책했지만, 우리는 결정적인 답은 얻지 못한 채 동국대학교를 아직 더 서성여야 할 것 같다. 동국대학교의 초입에 있는 대각전을 넘어 조금 걸어가면 남산을 오르기 위한 두 가지 선택이 나타난다. 먼저 드러나는 계단을 오를까 하더라도 조금만 더 들어가면 단번에 언덕을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산책자에게 어울리게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보고자 한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도 아직도 올라갈 계단이 남은 곳이 동국대학교다. 원체 산을 좋아하는 불교여서 그런가, 왜 학교를 이 남산에 지었을까, 도대체 남산 중턱까지 매일 등산을 하면서 왜 몸둥이는 건강하지도 이쁘지도 않을까 하면서 오르는 내내 일어나는 온갖 잡념을 다하면 대각전이 위치한 이해랑예술극장에서 혜화관으로 오르는 계단이 끝나게 된다. 하지만 아직도 학교에는 더 올라야 할 계단이 남았으니 기분이 절로 안 좋아 질 수밖에 없다. 원래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인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비달마 수행론에서도 끝난줄 알았는 데 끝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은 바로 범부에서 성자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한 극점을 말한다. 바로 인위(忍位)이다. 계율과 선정을 닦고 사념처에도 자유자재해진 수행자가 사성제 전반을 수습하는 단계가 난, 정, 인, 세제일의 사선근(四善根)이다. 이 사선근 안에서는 사성제의 가르침을 닦고 닦은 수행자의 지혜를 불에 비유한다. 먼저 수행자는 계속 사성제를 반복적으로 고찰하여 점차 그 지혜가 뜨거워진다. 철을 단련하면 할수록 뜨거워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를 난위(煖位)라고 한다. 그런데 뜨거워지는 것은 한계가 있다. 바로 끓는 점이다. 이 지혜의 뜨거움이 극에 달해 끓는 점에 이르는 것이 정위(頂位)이다. 그런데 이 지혜의 끓는 점, 즉 극치에 올랐지만 사실 윤회 세간에서나 잘난 것이고, 이 삼계를 뚫고 나갈 힘이 충분하지는 않다. 이처럼 지혜의 끝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수행자가 사실 자신의 깨달음이 아직 부족하구나 하고 인정하는 단계가 바로 인위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는 단계, 이 인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성자가 되기 직전, 윤회 세간의 제일인자인 세제일위(世第一位)에 오른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이 말이 나는 곳이 인위의 이야기로 들린다. 사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동국대학교 신입생들은 계단을 넘고 넘어도 아직도 남아있는 계단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인위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고학번들은 초연한 표정을 짓는다. 인위에 오른 것이다. 이쯤 되면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 세제일 위에 이르고 이 한 찰나를 뚫고 졸업을 하게 된다.
이야기가 많이 샌 것 같다. 아무래도 15년을 이 언덕을 오르면서 나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매일 오르고 앞으로도 올라야 하는 계단에 악감정이 사라지지 않아서인 듯하다. 그래서 아직도 학교를 배회하며 사는 것일까. 아무튼 계단에 할 말이 많지만, 이 이야기는 앞으로 또 올라야 할 동국대학교의 계단에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이 교내 첫 번째 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박물관이 있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은 1963년 개관했다.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길을 연 황수영 박사가 초대관장으로 취임한 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학자들이 관장을 역임한 권위 있는 박물관이다. 특히 국보 2점(보협인석탑, 명 송죽문 항아리)과 여덟 점의 보물을 가지고 있는, 대학 박물관으로서는 흔치 않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다. 불교종립대학의 박물관이라고 해서 불교유물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안중근처럼 천주교를 믿은 인물의 글씨도 가지고 있는데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즉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서화이다. 보물로도 지정되어 있고 학교에서는 명진관이라는 건물의 옆켠에 이 글씨를 딴 비석도 세워놨다. 사실 박물관이야 소장하는 것이 다인 일이니 이웃종교인 작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뭐라 할 건 없겠다. 이를 학교의 기념물로 내세우는 건 다른 문제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다시 돌아와 박물관은 상설전시와 특별전시를 통해 과거를 다양하게 만나게 해준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특별전시는 가끔 어떻게 저런 기획을 했을까 할 정도로 재기발랄한 전시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일이고, 나에게 항상 박물관의 이미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은 상설 전시실의 ‘법주사 수정암 석불좌상’이다. 완전한 형태의 좌대와 불상으로 이루어진 이 석불좌상은 항상 온화한 미소로 박물관을 온 사람들을 맞아주고 계신다. 이제야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불교종립대학의 박물관임을 체감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이 부처님이시다.
석불좌상의 좌대부분은 구각의 기단 위에 연잎 모양이 올라가고, 그 위로는 마치 연꽃의 대를 연상시키는 구각기둥이 곧게 뻗은 다음 아름다운 연꽃이 만개한 연화좌로 완성된다. 이 좌대의 높이만 120cm로 웬만한 사람의 상반신에 달하고 그 위로 가부좌를 틀고 항마촉지인을 하신 부처님이 앉아계신다. 이 불상이 1m에 가까우니 좌대와 불상의 도합 2.2m의 큰 석불좌상이다. 자연스레 우리는 부처님을 올려 바라보게 된다.
본래 부처님은 올려다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러러보아 본받고 싶어지고, 그리워하여 그의 가르침을 계속 생각하게 한다. 본래 인도에서 오랫동안 불상의 역할을 해온 불탑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인도에서 발견된 절터에서 이는 보편적으로 관찰되는 일이라 한다. 왜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보기 편하게 평지에 위치시키지 않고 언덕 위에 탑을 지었을까? 사실 당연한 일이다. 중생이 간단하게 부처님을 뵐 수 있으면 아무런 수행의 분심(憤心)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법화경〉 ‘수량품’의 비유에서도 의사의 자식들이 아버지가 항상 계시다고 믿기 때문에 약을 먹지 않는다. 그럴 때 의사는 자리를 피해 죽은 척하여 자식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만들고 결국 약을 먹게 한다. 부처님은 쉽게 보아서도 안되고 뵙더라도 올려다 보고 추앙해야 하는 분이다. 아까 대각전에서 걸어 올라온 원망의 계단이 다시 박물관 부처님을 올려다보는 전시장치라는 생각이 들면 계단의 의미를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인위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