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이일야의 詩, 불교를 만나다] 6. 윤동주의 ‘서시’ 

밤하늘 빛나는 별, 양심 그리고 불성(佛性)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마음엔 양심이라는 별이 빛나
양심의 불교적 강조가 ‘불성’
윤동주, 양심의 별을 노래하며
죽어가는 모든 것 사랑한 시인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됐습니다.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를 통해 제작됐습니다.

부끄러움이란?
글을 쓰기 위해 영화 〈동주〉를 다시 보았다. 2016년 개봉한 이래 몇 차례 반복해서 볼 만큼 울림을 준 작품이었다. 넷플릭스에 들어가니 이런 문구가 눈에 띄었다.

“펜을 든 동주와 총을 든 몽규. 비극의 시대를 살아가는 둘의 방식은 달랐지만 같았다. 동주는 시를 통해 아파했고, 몽규는 행동으로 저항했다. 일제강점기, 평생을 함께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빛나는 청춘들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의 핵심 내용을 소개하는 멋진 문장이었다. 일제강점기라는 지옥 같은 시대를 살면서 몽규는 총을 들어 저항했고 동주는 시를 쓰며 시대와 아픔을 함께했다. 방식은 달랐지만, 일제로부터 독립을 이루겠다는 마음만은 둘일 수 없었다.

“저는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당신 말을 들으니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못 하겠습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을 못 하겠습니다.”

영화 〈동주〉에서 일본인 형사가 재일조선인을 규합해서 반군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를 인정하라고 했을 때 그가 한 말이다. 동주는 서명을 거부하고 대신 조서를 찢어버린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독립군처럼 조직을 결성해서 무장투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시를 쓰면서 저항했고 일본 형사 앞에서도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일 만큼 당당하지 않았던가. 그가 이육사와 함께 ‘민족시인’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동주는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시를 쓰고 앞장서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한 것이다.

당시는 일본제국주의의 회유와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변절하는 문인들이 많았다. 춘원 이광수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들은 펜을 들어 일왕을 찬양하고 조선 청년들이 태평양전쟁에 앞장서야 한다고 외쳤다. 전혀 부끄러움을 모른 채. 그런데 일제에 저항하다 세상을 떠난 동주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마음속에 울림과 의문이 함께 밀려왔다. 그가 느낀 부끄러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번 글의 화두다.

윤동주는 스물아홉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간 시인이다.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조선인 학생 그룹을 조직했다는 혐의로 체포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힌다. 그곳에서 윤동주는 건강이 악화되어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사인은 뇌일혈이라 하는데, 생체실험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많다. 

이처럼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윤동주가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게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 깊은 고민에 빠진다. 유학을 위해서는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때 정지용 시인은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하면서 동주를 격려한다.

“윤 시인,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더 부끄러운 거지.”

영화 〈동주〉의 대사를 인용해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해도 시인의 마음속에 남은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정지용은 부끄러움의 핵심을 잘 전해주었다. 누구나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만, 아무나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이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양심이 작동할 때만 나오는 감정이다. 

오늘의 시 ‘서시’는 그 유명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이다. 알려진 것처럼 윤동주가 사망한 후 발표된 유고 시집이다. 한국인이라면 모르기 힘든 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문학적 가치도 높고 많은 이들이 좋아한다. 원래는 제목이 없어서 ‘무제(無題)’라고 했는데, 시집 첫 부분에 나와서 서시(序詩)라 부른 것이 오늘까지 제목처럼 인식되고 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읽어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佛性, 양심의 별
영화 〈동주〉를 보고 곧바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주문했다. 1948년 출간한 초판본과 1955년 증보판 표지가 인상적인 영인본이다. 오래된 디자인과 인쇄된 글씨 또한 투박했지만, 당시 시인의 마음을 느끼고 싶어서 구입한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별 헤는 밤’을 비롯하여 ‘새로운 길’, ‘참회록’ 등이 실린 시집이다. 읽으면서 자꾸만 스스로 묻게 된다. 도대체 시인에게 부끄러움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불교와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끄러움은 양심이 작동할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양심이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부끄러움을 모르지만, 이 마음이 움직이면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우리는 괴로워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철학자 칸트가 생각났다. 그 누구보다 양심을 강조한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묘지명에 쓰인 글을 잠시 인용해본다.

“생각하면 할수록 언제나 감탄스럽고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고, 다른 하나는 가슴속에 빛나는 양심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생각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사람들의 마음에도 양심이라는 별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는 노래다. 양심이란 어떤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마음이다. 후천적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품이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거짓말을 하면 심장이 뛰거나 맥박이 평소보다 빨라진다. 양심이 작동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만약 거짓말이나 나쁜 짓을 해도 신체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양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라 할 것이다.

이 양심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불성(佛性)이 된다. 모든 사람은 본래 부처(佛)의 성품(性)을 갖추고 태어난다고 불교에서는 강조한다. 인간의 본질은 중생이 아니라 부처라는 뜻이다. 흔히 불교를 믿는 이들을 가리켜 불자(佛子)라고 부른다. 단순한 불교인, 불자(佛者)가 아니라 부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불자들의 정신적인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셈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아들과 딸은 부모를 닮는다. DNA가 같기 때문이다. 불성이 바로 부처님께 물려받은 우리의 DNA다.

불자들은 수계를 하면 법명을 받게 된다. 예컨대 필자의 이름은 이창구지만, 법명은 일야(一也)다. 개인적인 성씨와 법명을 합해서 ‘이일야’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부처님의 성씨를 따라 석일야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본바탕이 부처라 해도 불성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그저 중생으로 살 뿐이다. 불자들이 절이나 명상, 염불 등의 수행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불성을 작동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불성이 제대로 작동하면 우리는 작은 잘못에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시인이 지적한 것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발원하는 것이다. 삶의 질적 변화는 이때 찾아오는 선물과 같다. 윤동주가 ‘참회록’이라는 시를 쓴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불성이 다름 아닌 칸트가 말한 ‘가슴속에 빛나는 양심’의 별이다.

윤동주의 시에는 별이 종종 등장한다. ‘별 헤는 밤’에서도 시인은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를 가슴속에 깊이 담아둔다. 그에게 별은 어쩌면 자신의 온 삶을 지탱한 양심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 귀한 보석을 온전히 마음에 품고 살았기 때문에 시인은 작은 몸짓 하나에도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동주는 불성, 양심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간 시인이었다. 오늘 밤에도 그 별이 바람에 스치고 지나간다.

올해로 윤동주 시인이 서거한 지 80주년이 된다. 지난 2월 시인이 옥사한 일본 후쿠오카 교도소 근처 한 공원에서 그를 기리는 추도식이 열렸다는 기사를 접했다. 2025년은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지 120년이 되는 을사년이기도 하다.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의 양심은 작동하지 않았다. 

몇 해 전 어느 이웃종교 성직자는 삼일절을 기념하여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버젓이 걸었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행위들이다. 〈중용〉에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知恥近乎勇)”고 하였다. 나약하고 비겁한 그들과 달리 윤동주는 용기 있는 의인이었다. 오늘의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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