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최원섭의 불교, K-드라마로 만나다] 불교는 윤회를 벗어나 ‘해탈’을 추구한다 

7 ‘쌍갑포차’(2020)

불교에서 환생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냐
불보살은 윤회 않지만 늘 중생 곁에 있어
대중미디어 속 ‘불교’ 의도 꼼꼼히 살펴야

JTBC 드라마 ‘쌍갑포차’.
JTBC 드라마 ‘쌍갑포차’.

“이 이야기는 ○○도 ○○ 지역에 전해오는 전설입니다”로 끝나는 <전설의 고향>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1977년에 시작했으니 얼추 50년 전에 시작해서 1989년까지 무려 578회가 방영되었고, 그 후로도 1996년(24화), 1997년(26화), 1998년(12화), 1999년(12화), 2008년(8화), 2009년(10화)까지, 요즘의 시즌제 드라마처럼 제작되어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전설의 고향>이 다룬 전국 방방곡곡의 전설 가운데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귀신과 저승에 대한 내용이다. 새하얀 소복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밤이면 밤마다 사또를 찾아와 한을 풀어달라 애원하는 처녀귀신들을 보면 어린 마음에도 안타까웠고, 저승사자에게 끌려가 염라대왕 앞에서 혼쭐이 나는 악인들을 보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저절로 마음에 새겨졌다.

세월이 흘러, 마치 <전설의 고향>의 대를 잇듯 나타난 드라마가 <쌍갑포차>(2020)이다. 이 드라마에는 ‘그승’이라는 독특한 세계가 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꿈속 세계’인데, 이곳에 들어갈 수 있는 주인공 월주(배우 황정음)가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월주는 500년 전, 이름난 무당의 딸이었다. 원인 모를 병을 앓는 세자를 살려달라는 중전의 부탁을 받고 꿈속 세계로 들어간 월주는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을 위로해 주고 세자를 살려낸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 세자에게 수청을 들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어머니가 대신 죽임을 당한 것이다. 모든 것을 잃은 월주는 세상을 저주하며 마을 어귀 신목(神木)에 목을 매달아 자결한다.

저승에 간 월주에게 염라대왕(배우 염혜란)은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신목을 더럽힌 탓에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고 10만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죗값을 치르기 위해 인간 세상에 다시 내려가 10만명의 한을 풀어주라고 명령한다. 

그 후 500년 동안 월주는 99,990명의 한을 풀어주었고, 남은 것은 단 10명. 그런데 지난 6개월 동안 도무지 실적이 오르지 않는다. 염라대왕은 앞으로 한 달 안에 10명을 채우지 못하면 지옥으로 보내겠다는 최후통첩과 함께, 감시 역할로 저승경찰청 형사반장 출신의 귀 반장(배우 최원영)을 파견한다. 마음이 급해진 월주는 손이 닿기만 하면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드는 한강배(배우 육성재)를 아르바이트생으로 영입해, 적극적인 영업에 나서는데….

그런데 이들은 사실 월주와 전생에 얽힌 사람들이다. 귀 반장은 500년 전 월주를 사랑한 세자였다. 월주의 죽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버린 죄로 저승경찰이 되었고, 월주가 운영하는 쌍갑포차에 자청해서 온 것이다. 그리고 강배는 월주가 목을 맬 때 뱃속에 있던 월주와 세자 사이의 아이였다. 그러니 쌍갑포차에 모인 세 사람 모두 전생의 가족인 셈.

드라마의 소개 글에 이런 표현이 있다. “그렇게 인연과 업보는 돌고 돈다는 세상의 이치야말로 우리가 왜 세상을 착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삶이 고달픈 중생들이여, 쌍갑포차로 오라! 까칠하지만 나설 땐 나서는 이모님 월주와 어리숙하지만 진심으로 귀 기울여주는 알바생 강배가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인연, 업보, 중생 같은 말들을 보면 꽤 불교적인 느낌이 든다. 뿐만 아니라 살았을 때 지은 죄를 비춰주는 업경대를 가지고 다음 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그 유명한 염라대왕까지 등장하니 더욱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오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 땅에 불교가 전해지고 나서 정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불교적인가 아닌가에 대해선 구분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환생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쌍갑포차>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잘 가서 금생의 기억을 지우고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금생에 미련을 품거나 여한이 있으면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기 때문에 환생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염라대왕의 명령을 받은 월주가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럼 불교에서는 환생을 어떻게 바라볼까? 불교에서도 윤회와 환생을 이야기하지만, 불교의 입장에서 환생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불교는 윤회를 벗어나 해탈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사복(?르)’ 이야기를 보자. 사복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원효 스님이 “태어나지 말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말라, 태어나는 것이 괴롭다”고 영가법문을 하자 사복은 말이 길다면서 “죽고 사는 것이 모두 괴롭다”고 단언한다. 이처럼 불교는 윤회전생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누군가는 티베트불교의 달라이라마는 계속 환생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라이라마는 윤회하는 존재가 아니다. 달라이라마가 중생계에 다시 태어나는 것은 업력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원력으로 인한 원생(願生)이다. 전생에 다 하지 못한 중생구제를 마저 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에 따라 환생하는 것이고, 생사에 걸림이 없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대로 생사에 뛰어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점들을 놓치면 원생하는 존재를 단순히 윤회하는 존재로 바라보는 셈이 된다. 불보살은 윤회하지 않는 존재이나 늘 중생 곁에 있음을 기억하자. 어른스님들의 다비 때 꼭 외치는 구호가 “빛으로 다시 오소서” 아니었던가.

<쌍갑포차>를 비롯한 여러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사후세계가 언뜻 불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꼼꼼하게 살펴보면 불교의 의도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어느 때, 누군가의 상상력으로 하나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그 이미지가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염라대왕 앞으로 망자를 데리고 가는 저승사자라고 하면 누구나 새하얀 얼굴에 검은 도포를 입은 남자를 떠올릴 텐데, 이는 우리의 오랜 전통문화 속에 전해오는 것이 아니라 <전설의 고향> 담당 PD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졌다(<유 퀴즈 온 더 블럭>, 2021년 3월 3일). 더욱이 1980년 6월 3일 방송에 처음 등장하였으니 불과 50년도 되지 않은 역사를 가진 저승사자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요즘 부쩍 대중미디어에서 ‘성불’이라는 말이 많이 보인다. 아직 이승에 머물고 있으면 성불하지 못한 것이니, 성불하여 저승으로 잘 가라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성불’이 불교 용어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쓰임은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고, 이때의 ‘성불’에 해당하는 우리 불교의 단어는 ‘천도’이다. 대중미디어를 불교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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