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이일야의 詩, 불교를 만나다] 5.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무상을 자각하라

시집 〈목마와 숙녀〉에 수록돼
가수 박인희가 노래로도 불러
무상 이치 알면 시인이 노래한 
풍광들은 소중한 추억 되지만 
이를 모르면 집착으로 굳어져
과거로 점철된 삶엔 행복 없다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로 제작됐습니다.
해당 삽화는 생성형 AI로 제작됐습니다.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2004년 EBS에서 제작한 〈명동백작〉이라는 작품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검색했더니 ‘우리나라 문화 예술의 꽃을 피웠던 명동시대를 재조명하는 드라마’라는 홍보 문구가 눈에 띄었다. 오상순과 박인환, 김수영 등 당대 문학계를 이끌었던 작가와 명동, 선술집 등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낭만적인 느낌을 주는 드라마였다. 배우 정보석이 내레이터로 참여하여 시대적 상황과 명동이라는 공간의 다양한 풍경을 전해주었다. 드라마에서 오늘의 주인공 박인환 시인은 아내와 대화를 나누다 문득 이런 말을 한다.

“산다는 건 의문투성이야. 시인은 그 의문을 풀어보려고 수많은 질문을 던져보지만, 그 누구도 그 어디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아.”

어디 시인만 산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으려 애쓰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시인의 아내 또한 “당신이 좋아하는 이상이라는 사람도 그런 대답은 못 찾아낸 것 같은데요”라고 말을 건넨다. 누구나 수긍하는 정답은 없더라도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고 성찰하면 자신만이 내릴 수 있는 해답은 있지 않을까. 이것을 우리는 자기 철학, 혹은 인생관, 세계관이라 부른다. 분명한 자기 철학을 갖고 사는 사람과 오늘만 대충 사는 사람이 결코 같을 수는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런 고민을 하고 그 해답을 찾아 길을 나섰던 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처님은 성문 밖을 나가 늙고 병들어 죽는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그때 던진 질문이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문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싯다르타는 출가를 결심하고 6년 동안의 수행 끝에 보리수 아래에서 도(道)를 이루고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한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고 있는 연기(緣起)나 무상(無常), 무아(無我) 등의 가르침이 그때 완성된 불교의 세계관이다.

박인환은 큰 키에 호남형 얼굴, 정장과 코트가 잘 어울리는 멋쟁이 시인이다. 반면 31세라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박제된 천재 시인 이상의 기일을 기념한다고 3일 간 폭음을 하다 급성 알코올중독성 심장마비로 요절했다고 전한다. 박인환은 감성적이면서 술을 좋아한 시인이었다. 어느 시인은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 내가 옷 사 입나 / 술 사 먹지”라고 노래했는데, 오늘의 주인공에게 잘 어울리는 시다. 〈명동백작〉에서 정보석은 박인환의 마지막 모습을 전하면서 이런 해설을 덧붙였다.

“인생의 참혹함과 전쟁과 가난을 뒤에 두고 박인환은 떠나갔습니다. 너무나 예민한 그의 감수성이 술이라는 독약을 빌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것은 아닐까요.”

대중에게 박인환은 가수 박인희의 노래를 통해 많이 알려져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는 기성세대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시이기도 하다. 지금도 운전할 때 그녀의 목소리로 가끔 듣고 있다. 1955년 〈박인환 시선집〉을 출간했으며, 오늘의 시 ‘세월이 가면’은 1976년 발간된 〈목마와 숙녀〉에 실려 있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고 노래한 것처럼 시인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알려진 것처럼 ‘세월이 가면’은 명동의 어느 선술집에서 낭만적으로 탄생하였다. 술을 마시다 시상이 떠오른 시인은 그 자리에서 쓰기 시작했고 함께 있던 극작가 이진섭은 즉석에서 작곡을 했다. 마침 술자리에는 ‘백치 아다다’를 부른 가수 나애심이 동석하고 있었다. 곡이 완성되자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상상만 해도 참으로 멋진 풍경이다. 마음으로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며 감상해본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추억인가, 집착인가?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명제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 1919~2011)의 말이다. 영원불멸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상(無常)의 의미를 간명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무상은 무아(無我)와 더불어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받치고 있는 든든한 기둥이다.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를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인(印)은 서류를 작성할 때 내용이 틀림없다고 인증하는 도장을 가리킨다. 세 가지 법(三法)이 우리의 삶에서 확실한 진리라는 뜻이다. 대승의 전통에서는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는데, 네 가지 전부를 포함해서 사법인(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월이 가면’은 가수 박인희가 불러 널리 알려진 곡이기도 하다. 청아한 음색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젊은 날 가슴 설렜던 첫사랑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사랑 또한 무상하므로 언젠가는 사라지고 만다. 그토록 사랑했음에도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사람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사랑했던 흔적만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으로, 그 벤치 위에 떨어진 나뭇잎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연인의 눈동자와 입술 또한 내 서늘한 가슴에 깊이 새겨져있다. 박인환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지금까지 ‘명동의 샹송’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과거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기억 때문에 현재의 삶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집착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집착은 생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는 없는데 마음에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현금이 많이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가정해보자. 현실에는 지갑이 없지만, 마음에는 진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쉽게 잊어버릴 수 없다. 아무리 ‘잊자, 잊자’ 다짐해도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이다.

물건도 그러한데,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 강도는 훨씬 커진다. 부처님 당시 어린 아들이 죽자 부처님을 찾아와 살려달라고 애원한 여인이 있었다. 부처님은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 한 톨을 얻어오면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사방을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런 집은 없었다.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주문을 한 것일까? 부처님은 그녀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물론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지만, 진짜 원인은 마음에서 아이를 보낼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현실에는 아이가 없는데, 마음에는 남아있어서 집착이 생기고 그것이 여인의 고통으로 이어진 것이다. 잔인하게 들릴지 몰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이가 없다는 현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생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들 삶에서도 이미 지나고 없는데 ‘서늘한 가슴’에 남아있는 것들이 많다. 시의 내용처럼 사랑하는 연인이 내 곁을 떠나 현실에는 없어도 마음속에 여름날의 호숫가로 남아있는 것이다. 혹여 과거의 기억 때문에 괴로운 오늘을 살고 있다면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잠깐 이외수 작가의 재미있는 문장을 읽어보기로 하자.

“꽃이 피었을 때는 꽃을 즐길 줄 알고 열매가 열렸을 때는 열매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인간들은 꽃이 피었을 때는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知랄을 하고 열매가 열렸을 때는 꽃이 피지 않았다고 知랄을 한다. 그래서 知랄을 할 때마다 써먹으라고 ‘철모르는 놈’이라는 말이 생겼다.”

〈하악하악〉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글을 볼 때마다 불교는 철들기 위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철을 모르면 연초록의 푸릇푸릇한 잎들이 나왔는데 벚꽃이 모두 졌다고 투정을 부리고 여름이 찾아오면 봄날은 갔다고 푸념을 한다. 이때 필요한 처방이 바로 무상의 가르침이다.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이내믹한 흐름 속에 있다는 사실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상한 삶속에서 순간순간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가꿀 수 있다. 지금이라는 순간은 다시는 오지 않으므로 지나간 과거에 집착해서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는 뜻이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 또한 ‘무상을 자각하라’는 것이었다. 무상의 이치를 알면 시인이 노래한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은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만 이를 모르면 집착으로 굳어지게 된다.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점철된 삶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추억인가, 집착인가? 이는 결국 내게 달린 문제다. 바야흐로 봄이다. 쿨하게 겨울을 보내주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봄을 맞이하자. 그럼 ‘서늘한 가슴’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으로 봄날을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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