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낮과 밤이 다른 그녀’(2024)
육신보다는 정신을 정체성으로 받아들여
오온이 임시로 화합된 상태가 진정한 ‘나’
고정된 ‘나’는 없어…순간순간이 ‘나’일 뿐
지난 지면에서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를 통해 같은 외모에 다중인격을 지닌 인물을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에는 하나의 인격에 외모가 변하는 인물을 만나보자.
드라마 〈낮과 밤이 다른 여자〉(2024)의 주인공 28세 이미진(배우 정은지)은 무려 8년째 공무원 시험에 도전 중인 ‘공시생’이다.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셔온 그녀에게 남은 것은 각종 아르바이트로 얻은 잡다한 지식과 가산점이라도 받겠다며 따낸 숱한 자격증뿐. 그렇게 절망과 희망을 오가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미진은 50대 중년이 된 자신을 발견한다.
충격과 혼돈의 시간도 잠시, 때마침 서한시의 ‘시니어 인턴 채용’ 공고문을 본 미진은 수십 년 전에 가출해 소식이 끊긴 이모 임순(배우 이정은)의 이름으로 ‘시니어 인턴직’에 지원해 합격한다. 28세 이미진이 이루지 못한 공무원의 꿈을 50대 임순이 단번에 이룬 것이다.
한편 서한지검에 자청해서 내려온 검사 계지웅(배우 최진혁)은 능력은 출중하지만, 실무관들이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게 만드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다. 일명 ‘개검사’로 불리는 까칠한 지웅이지만 우연히 만난 사기 피해자 이미진에게는 자꾸만 마음이 쏠린다. 그러던 중 미진이 자신이 좇던 연쇄 부녀자 실종사건 범인의 목격자임을 알고 그녀의 신변을 지키다가 점점 사랑이 싹튼다.
그런데 낮 동안 임순이 되고, 밤이 되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미진이 발령받은 곳이 하필이면 지웅이 근무하는 서한지방검찰청이다. 첫 업무는 단순한 청소용역이었지만 그동안 경찰공무원, 법원공무원에 도전하며 법대생 못지않은 법학 지식을 쌓아온 덕분에 검사실 실무관의 보조원으로 활약을 시작한다. 물론 50대 임순의 모습으로, 그것도 지웅의 검사실에서 말이다.
검사실에선 여전히 ‘개검사’인 지웅에게 나이 든 실무관 보조가 마음에 들 리 없고, 지웅은 별의별 잡무를 모조리 떠넘기면서 임순이 스스로 그만두길 종용하지만, 외모만 50대인 임순은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며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업무를 말끔하게 해치운다.
가족에게도 비밀로 한 채 낮에는 검사실에서 지웅과 함께 일하고 해가 지면 지웅과 데이트를 하는 미진. 지웅은 임순과 미진을 모두 만나지만 둘이 같은 사람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자, 여기에서 지난번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와 같은 질문을 해보자. 지웅이 만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같은 외모에 다른 인격을 지닌 경우에는 ‘진정한 나’가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의 여지가 있지만, 인격이 같은데 외모가 다를 뿐이라면 비교적 답이 분명해 보인다. 겉모습이 아무리 달라진다 한들 지웅이 만나는 사람은 ‘미진’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은 육신과 정신(혹은 영혼)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육신과 정신 중에 정신을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드라마 속에서 ‘임순’이 친구 도가영(배우 김아영)에게 자신이 ‘미진’임을 입증할 때도 마찬가지다.
50대 임순의 모습을 한 미진은 가영의 전 남자친구 이름라든지 생년월일, 집의 비밀번호 등을 줄줄 읊어대고, 둘만의 비밀과 추억들을 정확하게 맞춘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임순에서 미진으로 변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준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도 쉽게 믿기지 않는 기이한 현상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가영은 ‘임순이 곧 미진’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고, 50대 임순도 친구로서 스스럼없이 대한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육체적인 요소 한 가지와 정신적인 요소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매일 독송하는 〈반야심경〉에도 나오는 ‘색(色)-수상행식(受想行識)’의 5온(蘊)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5온이 ‘화합’한 상태를 ‘그 사람’으로 판단한다. 5온은 어느 한 요소가 다른 요소들을 지배하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가 중심이 되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색, 수, 상, 행, 식이 동등한 자격으로 만난다. 이때 화합이란 찰흙 덩어리 다섯 개를 뭉쳐놓은 것과 같은 물리적 혼합이 아니라, 각각의 특징이 서로 녹아서 융합된 화학적 변화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동일한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같은 모습이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오온의 화학적 변화에 따라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드러낸다. 그저 순간순간 변하고 있는 나의 5온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불교의 오온설은 다섯 가지 요소가 임시로 화합된 상태가 ‘나’이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고정된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음을 알려주려는 가르침이다. 이는 우리가 고정불변한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고, 오히려 임시로 화합된 상태가 진정한 ‘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어릴 적 ‘나’와 나이 든 ‘나’를 외모와 상관없이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낮의 임순과 밤의 미진이 다르지만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순간순간이 그저 ‘나’일 뿐이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보자. 20대의 미진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지만 50대 임순이 되자마자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다면 원하던 일을 하게 되었으니 행복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50대 모습의 임순은 미진의 본모습이 아니니, 아무리 능력을 인정을 받아도 미진의 것이 아니다. 미진의 입장에서는 20대 모습이든 50대 모습이든, 자신의 가치를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드라마 〈낮과 밤이 다른 그녀〉는 20대 미진을 통해 ‘현실의 나’와 ‘이상의 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번번이 취업에 실패한 ‘현실의 미진’에게는 공무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이상의 미진’이 있다. 그런데 정작 미진의 이상이던 공무원이 된 것은 임순으로 변한 미진이다. 임순의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꿈꾸던 삶이지만 임순에겐 50대의 외모와 육체적 한계라는 힘든 ‘현실’이 있고, 낮과 밤이 바뀌는 상황을 해결하여 본래의 미진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상’이 있다.
20대 미진과 50대 임순 사이의 비틀어진 이상과 현실은 그 어느 쪽에서도 진정한 ‘나’를 찾지 못하는 상황을 상징한다. 대부분 사람은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이상을 동경하며 현실을 한탄한다. 심지어 스스로를 비하하며 마음의 병이 생기기도 한다.
드라마 속에서 결국 미진은 미진의 모습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낸다. 우리는 누구나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여러분이 꿈꾸는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