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자비보살](사)부산정각원 이사장 향공 스님
출가 앞두고 교통사고로 3년 투병
도움 받아야 살 수 있었던 경험들
30년 이어온 자비나눔 서원 계기돼
부산서 무료공양, 효 관광 등 열어
2022년 부산정각원 창립해 자비행
“진짜 복전, 중생 만나는 현장 있어”
인생의 고난과 불행은 걸림돌인가? 디딤돌인가? 질문에 대한 해답은 고난을 마주한 사람의 선택으로 결정된다. 위기 속에서 성장하고 인생 역전의 드라마로 감동을 전해주는 삶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이 같은 인생 드라마는 부산 사상구 견강암 주지 향공 스님의 삶을 두고 하는 말이다.
팔과 다리 그리고 척추, 사지가 너덜거린 채 피범벅이 되어 병원에 들어가 뼈를 잇고 고정하는데 3년이 걸렸다. 몸을 일으켜 앉고, 걸음마를 연습하고 한 발을 내딛기까지 다시 2년이 필요했다.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와 빛 아래 서기까지 무수한 고난을 디딤돌로 삼아 하루 하루를 버텨낸 스님은 복전(福田)을 일구기 시작했다. 향공 스님은 30여 년 동안 배고프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밥을 먹였고, 여행을 함께 갔고, 집집마다 방문해 반찬을 배달하고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했다. 향공 스님은 현장에서 마주한 얼굴을 ‘복밭’이라고 했다.
“법당에 돈 넣는 함을 복전함이라 부르는데 진짜 복전, 복밭은 중생들을 만나는 현장입니다. 심신이 고단해도 밥 한그릇 먹고 힘내는 얼굴, 외로울 때 여행을 같이 가서 신나하는 얼굴, 추운 겨울 반찬을 건네며 전한 안부에 울컥하는 얼굴. 그들의 얼굴이 환해질 때 마음도 환해지고 밝아집니다. 그들이 바로 나입니다. 그들이 바로 일구고 가꿔야 할 복밭입니다.”
2월 8일, 부산 사상구 견강암에서 만난 향공 스님은 낡고 헤진 법복을 입고서 순박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갔다. 마치 흙을 갈고 엎어 씨를 뿌리는 농부의 소박함과 둔탁함이 따뜻한 정(情)이 되어 전해졌다.
나눔과 회향의 길, 따뜻한 발자취
부산 사상구 모라동 백양산 초입에 위치한 견강암.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견강암의 외형이 독특했다. 사찰에서 흔히 보는 기와지붕, 나무 기둥, 색색 단청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법당 외에는 단촐했다. 부엌 상판 여닫이문은 고쳤지만 삐뚤고, 곳곳에 수리한 흔적이 가득했다.
“모두 중고에요. 새것은 사본 적이 없어요. 스님 옷도 너무 낡아서 버리면 주워와 다시 입습니다”라고 옆에서 말을 보태는 원주보살에게 향공 스님은 “뭐 어때. 입을 수 있음 되지. 이게 좋아. 일하기에도 편하고”라며 말을 막았다.
지난 2024년 한 해 동안 나눔에만 2억 원 가량을 사용했다. 하지만 건물 불사에도 헛투로 돈을 쓰지 않았다. 추운 날 옷 한 벌 사 입지 않는 스님이다.
“가사가 얼마나 비싼데요. 그 귀한 기도비를 그렇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일체 모든 회향이 목표이고 바른 회향으로 복을 주는 것이 스님의 서원이다.
향공 스님의 나눔은 1995년부터 시작됐다. 부산 북구 만덕에서 대성암이란 포교원을 열었을 때 매주 수요일마다 스님은 국수를 삶았다. 포교원으로 문을 연 대성암은 한국전쟁 피난민들이 모여 산 쪽방촌에 위치했다. 쪽방촌을 불사해 만든 6평 공간에 법당과 공양간을 채우니 스님은 겨우 몸을 눕힐 수 있었다. 쪽방촌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국수를 삶기 시작한 스님과 불자들의 봉사에 매주 사람들이 늘어났고 800여 명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대성암 앞에 작은 놀이터가 있었는데 거기서 국수를 삶을 수 있었어요. 놀이터에는 수도시설도 있어 그나마 좀 더 편리했죠.”
스님의 국수 만발공양은 입소문으로 전해졌고 부산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찾아오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을 먹이니 힘들지 않드냐’는 질문에 스님은 “신바람이 났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제일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국수 공양에 이어 스님과 불자들은 더 나눌 것을 고민했다. 매년 겨울이면 춥고 먹을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눈에 밟혔고 스님과 불자들은 김장김치를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부해야 할 학생들의 안타까운 사정이 또 들려왔다. 스님은 장학금을 마련해 전달하기 시작했다.
향공 스님과 불자들의 나눔이 이어지던 가운데 부산 만덕동 피난민 쪽방촌에 아파트 재개발 공사가 대규모로 진행됐다. 장소 변경이 불가피했지만, 나눔 원력은 멈추지 않았다. 스님은 지금의 견강암에 새롭게 자리를 잡고 부산 모라동 고동바위공원에서 만발공양을 다시 펼쳤다. 국수 뿐 아니라 메뉴를 발전시켜 절기마다 몸보신을 위한 영양식을 대접했고, 겨울에는 떡국을 나눴다. 어르신들의 무료함을 덜어 줄 레크리에이션 행사 공연도 진행해 만발공양은 지역의 잔치 한마당으로 발돋움했다.
고통 속에서 찾은 나눔의 길
이내 자비나눔 원력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연유를 묻자, 이내 스님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향공 스님은 20대 초 지리산 관음사로 올라가는 길에 절벽에서 추락했다. 출가 전에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유랑하며 마음을 정리하던 시간이었다. 모든 유랑을 마치고 관음사로 들어갈 때 맞은 편에서 트럭이 달려왔고, 트럭의 밝은 전조등에 눈을 뜰 수가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 때 앞으로 보지 못한 채 스님은 절벽으로 떨어졌다.
심각한 부상으로 스님은 다리와 골반, 팔 그리고 척추가 으스러졌다. 3년 간 누워있어야 했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밤새 간호사들은 스님의 곁을 지켰다. 6개월마다 대수술은 이어졌고 뼈를 깎아내고 붙여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당시 스님의 키는 178cm였지만 모든 수술을 마친 후 168cm로 10cm가 줄어들었다. 으스러진 뼈를 꺼내고 뼈를 이어 붙여 겨우 걷기 시작했을 때 스님은 출가했다.
“그 무엇도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대소변을 처리할 수도 없고 밥도 먹을 수 없었고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스님은 고등학교 때 큰 키와 몸집에 힘도 셌다. 스스로도 학교 친구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사고 이후 아픔을 겪고 도움을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이 되었다. 강하다는 것도 약하다는 것도 어떤 의미가 되지 못했다. 오직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랑하는 것만이 삶의 이유가 되었다. “출가해 ‘자비나눔’을 수행으로 살아가겠다”고 서원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주기 위해서다.
멈추지 않는 30년 자비나눔 원력
서원이 두텁기에 어떤 역경도 자비나눔을 향한 스님의 굳은 의지를 막진 못했다. 코로나 19로 인한 모든 모임이 중단됐을 때에도 스님은 도시락을 마련했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가가호호 밑반찬 나눔’을 위해 부산 모라동 주민센터와 통장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가구를 추천 받았고 반찬 도시락을 직접 전달하기 시작했다.
당시 방문했던 가정이 500가구였고, 특별히 33가구를 별도로 추가해 5일 동안 먹을 수 있는 반찬을 지급했다. 더운 여름에는 삼계탕을 도시락에 담아 고동바위공원을 찾던 어르신들에게 전달했고 동지를 맞아 팥죽을 끓여 집마다 방문해 전달하고 모두가 건강하시길 기도했다.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도 2010년부터 계속됐다. 스님은 정초를 맞으면 돼지저금통 108개를 신도들에게 나눠줬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동지가 되면 저금통을 받은 불자들은 견강암에 방문해 그동안 모은 동전을 전달하고 인재불사에 동참했다. 장학금은 동지와 산신재, 백중기도 등 기도를 회향하며 학생들에게 전달됐고 매년 1000만 원 가량을 후원하고 있다. 108개 저금통을 모아도 금액은 턱 없이 부족했다. 그 때마다 향공 스님은 모든 기도비와 자신의 사비를 털어 보태곤 했다.
만발공양과 장학금에 더해 향공 스님은 어르신들의 외로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굶주림 보다 외로움이란 정서적 허기가 안타까워 새로운 프로젝트 효(孝)관광을 마련했다. 2018년과 2019년 그리고 2023년과 2024년에 노숙자와 지역 어르신을 위한 무료 효관광을 진행했다. 참석 가능한 대상자 연령을 70대로 높여도 희망자는 계속 늘어났고 관광버스 총 13대를 준비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버스를 마련해도 결국 선착순으로 끓을 수 밖에 없었어요. 더 늘리고 싶어도 봉사자 인원이 부족했고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었죠”
스님은 아쉬움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답을 이었다. 무료 효관광이면 경비가 풍족해야 할 텐데 어떻게 마련하냐는 질문에 스님은 짧게 ‘가피’라고 답했다.
“100여 명 정도의 후원자들이 있지만 요즘처럼 경기가 힘들 때는 후원이 많이 줄기도 하고 부족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정말 부족한 금액 만큼 어디선가 후원금이나 천도재가 들어와요. 나눔을 위해 일을 벌이면 부처님께서 어디선가 도움을 주셨고 부족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향공 스님은 30여 년 동안 나눔을 이어왔다.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작했지만 더 많은 이들을 후원하고 돕기 위해선 또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공양을 올리고 함께 할 복을 일구기 위해 2022년 11월 1일 사단법인 부산정각원을 창립했다. 꾸준히 회원이 증가해 현재 100여 명의 후원회원이 활동 중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향공 스님은 “나 자신을 만나는 것이 계획”이라고 말했다.
“제가 살아갈 이유는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약하고 외로운 그들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술을 마시고 무료급식을 받으러 와서 상을 엎는 사람. 외로움에 손을 잡고 여행을 가고 싶다던 노숙자. 빨리 밥을 내놓으라며 화를 내는 사람. 그들의 연약함 속에서 저는 저 자신을 만납니다. 그들의 연약함이 바로 저의 모습이며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사랑하는 것이 부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사랑, 그 외에는 별다른 목표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