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지상중계] “왜 본마음 두고 밖으로 가는가”

통도사 화엄산림 대법회
대흥사 조실 상월 보선 대종사

‘사성제품’ 핵심은 ‘본마음’
도성제의 팔정도 중 ‘正見’ 
사성제 바로 볼 수 있어야
苦 없는 본래 마음 증득해 

상월 보선 대종사는… 1966년 용암사서 천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2년 통도사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문경 봉암사와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 해남 대흥사 등에서 오랜시간 수선안거했다. 총무원 호법부장, 대흥사 주지, 제14·15대 중앙종회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대흥사 조실로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사진제공=통도사
상월 보선 대종사는… 1966년 용암사서 천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2년 통도사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문경 봉암사와 순천 송광사, 양산 통도사, 해남 대흥사 등에서 오랜시간 수선안거했다. 총무원 호법부장, 대흥사 주지, 제14·15대 중앙종회의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대흥사 조실로서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사진제공=통도사

영축총림 통도사(주지 현덕 스님)는 12월 1일부터 한 달간 경내 설법전에서 ‘화엄산림대법회’를 봉행중이다. 통도사 화엄산림법회는 통도사 개산조 자장 율사가 〈화엄경〉을 강설한 것을 인연으로 시작됐다. 전국에서 모인 선지식들은 법좌에 올라 〈화엄경〉 법문을 설한다. 12월 7일 오후에는 대흥사 조실 보선 대종사가 ‘사성제품’을 중심으로 법문을 설했다. 이날 강의 내용을 정리·게재한다.

옛날 당나라 고승 조주 선사는 120세, 근래 중국의 허운 스님은 125세까지 살다가 열반에 들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과 항상 함께해야 한다. 부처님은 뒤로 한 채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면 편안하게 살기 힘들다. 항상 부처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오전에 설한 〈화엄경〉 ‘여래명호품’의 내용이다. 

오후에는 ‘사성제품’을 여러분과 나눌 예정이다. 부처님의 가장 대표적인 말씀은 4가지 진리인 사성제(四聖諦)다. 불자라면 반드시 알아야 한다. 문수보살이 설한 ‘사성제품’에 따르면 사성제의 이름은 아주 다양하다. 먼저 사성제품의 서문을 다 함께 읽어 보겠다.

“문수보살이 사성제품에서 이르기를 괴로움인 ‘고(苦)성제’를 이 사바세계에서는 죄, 핍박, 달라짐, 반연(攀緣), 모임, 가시, 뿌리를 의지함, 허망하게 속임, 창질(암, 종기), 바보의 행동이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인 ‘집(集)성제’는 속박, 망가짐, 애착, 망령된 생각, 가서 들어감, 결정, 그물, 희롱꺼리, 따라다님, 전도된 뿌리라 일컫는다.”

집은 고가 발생하는 원인, 혹은 조건을 의미한다. 조건이 있으면 필히 결과가 있다. 자신이 사람으로 태어난 원인이 있듯이 모든 것에는 조건과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집(集)이라 한다.

“괴로움이 멸한 ‘멸(滅)성제’는 다툼이 없음, 티끌을 여윔, 고요함, 모양 없음, 없어지지 않음, 제성품이 없음, 장애가 없음, 멸(멸), 자체가 신실함, 제성품에 머문다고 이른다. 괴로움이 멸하는 방법인 ‘도(道)성제’는 이 사바세계에서 일승, 고요한데 나아간다, 인도함, 끝까지 분별 없음, 평등, 짐을 벗음, 나아갈데 없음, 성인의 뜻을 따름, 신선의 행위, 십장(十藏)이라 한다. 여러 불자들이여, 이 사바세계에서 사성제를 말하는데 400억 10천가지 이름이 있으니,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모두 조복하게 한다.” 

사바세계에서 사성제를 열 가지로 표현하는 데, 10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400억이 10천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수가 무량하다는 거다. 또 사바세계를 벗어나면 어떤가? 동방·서방·북방·간방세계, 아래·윗세계 즉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사성제를 부르는 이름은 얼마나 많겠는가. 

사성제품에는 이렇게 이름만 설하는데, 중요한 것은 ‘본마음’이다. 여러분이 숨 쉴 때 법을 깨달아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불성, 부처님 성품을 증득하면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본래 고향, ‘본집’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본래 마음, 본 자리를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분별하고 마음을 밖으로 향하는 그림자 생활에서는 괴롭다. 왜 그런가? 여러분 의식이 자꾸 돌아다녀서 그렇다. 몽식(夢識), 꿈꾸는 것처럼 의식이 자꾸 돌아다닌다는 의미다. 그래서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괴로움은 다 실체가 아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이를 알려면 의식을 ‘회광반조(回光返照)’해야 한다. 의식을 돌이켜 비추어 봐서 본식, 자성, 불성에 계합하면 아무 괴로움이 없다. 

앞서 이를 부처님은 사성제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사성제의 ‘고’는 무엇인가? 생로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음성고 팔고(八苦)다. 일체는 모두 죽고 헤어져야 한다. 다시 만나겠다는 약속이야 하겠지만 결국 헤어져야 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이를 깊이 참구하다 보면 본마음으로 돌아갈 길이 보인다. 오전에 ‘여래명호품’에서 말했듯이 돌아다니는 마음을 잡아서 자기와 함께 있어야 한다. 자기와 함께 할 때는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아니다. 그 속에는 ‘지혜광명’만 가득하다. 이 광명은 ‘나무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나무아미타불은 항상하고 영원하며 수명이 없는 지혜의 빛이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과 함께하라는 것이다. 나옹 스님이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깊이 참구하고 참구해서 무념의 자리에 도달하라”고 이르셨지 않는가. 그럼 죽지 않는 아미타불과 함께 영원한 본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지혜광명이 있는 곳에는 청정하고 티끌이 없어 어떤 이름도 붙을 수 없다. 우리가 본마음, 본성, 불성, 자성, 부처님이라 부르지만, 표현할 방법이 없어 억지로 이름 붙인 것이다. ‘비로자나불’도 마찬가지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 하지만 그 이름도 없다. 오직 청정하고 밝은 지혜광명뿐이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는 지혜광명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법문도 듣고, 경전도 보고 염불하고 계속 참구해야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뭐꼬’하며 참구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밥하면서도, 아이들 돌보면서도, 대화하면서도 항상 이뭐꼬로 돌이켜 봐야 한다. 그럴 때 ‘나’와 함께 하는 순간이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자비심으로 ‘사성제’를 가르친 것이다. 고의 원인은 다른 것도 많겠지만, 탐진치 삼독(貪瞋癡 三毒)이다. 욕심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이 이 괴로움을 만들었다. 그게 집(集)성제다. 그 원인을 멸하면 멸(滅)성제다. 의사가 병을 진단하듯이 고칠 수 있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도(道)성제다. 증상에 맞게 약과 수술을 하면 낫는 거다. 그 도는 팔정도(八正道)다. 이게 고집멸도 사성제다. 

도성제는 고를 멸하는 8가지 길인 팔정도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견(正見)’이다. 이는 사성제를 바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부처님은 “사성제 가르침은 코끼리 발자국에 모든 짐승의 발자국이 들어가는 것처럼, 불법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라고 설하셨다. 

그럼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인가? 첫째 이망상(離妄想), 망상을 떠나야 한다. 요사이 국화가 폈다. 국화는 과연 국화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분별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국화를 보게 되면 국화는 물, 햇빛, 사람의 돌봄 등 ‘국화 아닌 것’으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국화의 실체는 없다. 그래서 국화는 국화가 아니다.

분별이 곧 망상이기에, 분별하지 않고 봐야 한다. 분별하지 않으면 세상 살기 편안해진다. 분별하면 반대로 세상은 괴로워진다. 이에 〈금강경〉에서도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고 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해 있다. 그래서 우리도, 국화도 실체가 없다. 나는 ‘나’ 아닌 것으로 이뤄져 있기에 ‘무아(無我)’라고 한다. 이렇게 보는 것이 바를 정(正), 바로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양변(兩邊), 양극단을 떠나서 봐야 한다. 초전법륜에서 부처님이 뭐라고 했는가. 극한의 즐거움도 괴로움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근본적으로 해방해 주지 못한다. 이를 ‘중도(中道)’라고 하고 팔정도라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차별 없이 ‘평등’해야 한다. 남방이든 북방이든, 서양이든 동양이든 모두 평등한 사람이다. 모양은 다를지 몰라도 모두 ‘사람’이라고 평등하게 보는 게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를 ‘바르다’고 하고 정견이라 한다. 이러면 팔정도, 도성제를 이해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음은 정사유(正思惟)다. 바른 생각으로 살아야 한다. 폭력적인 생각, 차별적인 일체 생각을 떠나서 바르게 생각해야 한다. 정어(正語)는 이간질하는 말과 거짓말·폭력적인 말을 떠나 바른말을 하는 걸 의미한다. 정업은 바르게 행동하는 것, 정명은 바른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 정정진(正精進)은 착한 생각을 키워가고 나쁜 생각은 줄여가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게 항상 마음을 챙기는 건 정념(正念)이라 한다. 

항상 마음을 바르게 챙겨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잘 챙겨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 그럼, 정정(正定), 마음이 안정된다. 밖으로 나간 마음을 회광반조하여 안을 비춰보라. 비춰보면 볼수록 지혜광명이 밝아져 아미타불이 된다. 지혜의 빛은 영원하고 한량없는 광명을 뿜는다.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요, 불성이다.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마음이 바로 나의 본마음이다. 왜 본마음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찾으러 다니는가. 자기 마음의 광명을 먼저 바로 봐야 한다. 분별·차별 없이 평등하게 보는 것.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 중에 도성제, 팔정도며, 중도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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