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영점’을 찾아라
시행착오 끝에 렌즈 초점 잡듯이
방황과 후회는 시간낭비가 아니다
극효율 놀음, 모두를 패배자 만들어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머리에 커다란 헤어롤을 걸고 길을 걷는다. 가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도 마주하는 풍경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투명 인간이 된 느낌이다. 젊은 친구들이 모임이 끝나고 정산을 하는데, 자기가 먹지 않은 안줏값은 빼고 정산해달라 한다는 기사를 읽는다. 모든 것이 N분의 1이 가능한 시대다. 애매함과 모호함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아파트 공터 수거함에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가는데, 중년의 아저씨가 주차장 도로 턱에 앉아 유튜브를 본다. 나오는 음성이 이상해 의아해하다가 그것이 빠른 배속임을 나중에야 깨닫는다.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 전체를 감상하지 않고 요약본으로 대강의 스토리만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핵심만 알면 그만인 것이다.
그림 작품을 몇 마디 말로 듣고, 음악을 몇 마디 말로 감상하는 시대가 왔다. 문자 답변도 거두절미하게 ‘넹’, 한 마디면 끝이 난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영양소가 농축된 알약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음식의 맛은 책이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상상으로 가늠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극효율’의 시대다.
장자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이 가는 길만 필요하다고 해서 나머지 땅을 다 덜어낸다면, 결국 무서워서 한 치 앞도 걷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이다. 공기나 물처럼 너무 흔해서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실은 절대적으로 소중한 것이다.
복도를 지나가다 우연히 학생들의 대화를 듣는다. 이 정도 교육여행 경비면 자기들 몇몇이서 체험학습을 쓰고 외국으로 여행을 가자고 한다. 교복도 편한 후드티로 대체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극효율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이지 하나도 틀린 말이 없다. 그러나 공기와 같은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소속감이 다 휘발해 버린 생각이다. 공유된 경험과 공유된 추억 없이 어떻게 공동체를 말할 수 있을까. 극효율 앞에선 다양성 속에서 차별하지 않고 개별성을 존중할 수 있는 격식과 품위도 허례허식에 불과하다.
학생들에게 늘 간만큼 되돌아와야 내 땅이 된다고 말한다. 멀리 가기만 했지 간만큼 되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도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음미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고서는 내 삶이 결코 내 것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남을 이기는 경쟁의 노력이 아니라, 나만의 스토리로 경쟁력을 만들려는 노력이어야 한다. 매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 나는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소명 같은 ‘나만의 영점’을 찾아야 한다.
무턱대고 많이 돌린다고 해서 렌즈의 초점은 맞춰지지 않는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비로소 렌즈의 초점을 잡을 수 있듯이 나의 방황과 후회는 결코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아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나를 조종하는 능력주의와 최적화는 경쟁을 당연시하고 시행착오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극효율의 허깨비 놀음이 바로 높은 자살률과 저출산율, 우울증 증가로 출렁이는 것이다. 우리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 뿐이다.
다이어트처럼 평생 좋은 방법만 찾아다니다 정작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효율성의 역설이다. 나만의 영점을 믿을 때 밖으로 구하는 마음을 쉴 수 있다. 나의 영점은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