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미디어 인 붓다] 53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정부는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가이 포크스 가면 쓴 V가 그리는 혁명 서사시
가면 뒤엔 한 사람 신념 있음을 위정자는 알라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한 장면.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한 장면. 

한겨울 한밤중, 전시도 아니고 천재지변도 아닌 아주 평범하게 하루를 마감하려던 보통의 하루, 시민들이 국회 앞에 모여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일,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국회에 난입해 국민들이 법을 세우라고 뽑은 국회의원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출입을 막는 일,  비상계엄령 때문이었다.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 행복을 약탈하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대통령의 계엄선포 담화문 하나로 군대가 저렇게 움직여지는 거구나. 

이런 일은 또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 군대가 방송국에 밀고 들어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며 ‘반공을 구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하겠다’는 포고문으로 권력을 잡은 군사반란. 그렇게 권력을 잡고 헌법까지 뜯어고쳐가며 장기집권하던 대통령이 술자리에서 자기 심복들에게 총 맞고 죽은 후 벌어진 사태는 1979년 12월 12일에 벌어진 〈서울의 봄〉(김성수 감독)에서 다룬 바로 그 군사반란이었다.

그렇게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은 1980년 10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작전명령 ‘불교계 정화수사계획-45계획’을 수립해서 조계종 종단스님 등 153명을 강제연행하고 군·경병력 3만2천여명을 투입해 전국 사찰과 암자 5천731곳을 일제 수색한 법난을 저질렀다.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불행한 사건으로 꼽히는 ‘10·27법난’은 아직도 그 사태를 누가 입안하고 명령했는지 낱낱이 밝혀지지 않았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는 “10·27법난이 한국불교의 전통과 명예를 훼손한 명백한 국가범죄인 만큼 대통령 사과, 책임자를 비롯해 사건 전모에 대한 정확한 규명, 피해보상 등이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2024년 12월 3일 밤 11시에 선포된 비상계엄령은 정권을 찬탈하려는 군인들이 벌인 쿠데타도 아니고 대통령이 직접 군대에게 명령한 것이었다.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소총으로 무장하고 국회 본관 창문을 깨가며 강제 진입한 군대에 맨몸으로 맞서 국회를 지킨 시민들의 힘은 놀라웠다. 이런 비상한 상황에서 국회는 바로 ‘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날이 밝기 전 계엄 소동이 철회되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현실 속에서 새록새록 되새겨지는 영화다. ‘상호 복수, 피의 복수’ 또는 ‘장기간에 걸친 불화, 항쟁’을 뜻하는 ‘벤데타(Vendetta)’라는 낯선 단어가 자꾸 익숙해지는 건 영어 실력이 늘어서가 아니라 억압과 통제가 너무 어처구니없기 때문이다.

제3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악의 세력으로 전세계를 짓밟는 동안, 미국을 비난하는 국가주의의 미명 아래 꽁꽁 묶인 2040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통금과 밀고, 언론 통제와 거짓 정보, 감시와 처벌이 독재를 지속하는 방식이다. 이런 세계에서 홀연히 나타난 ‘V’는 영화 내내 자신의 원래 이름도, 내력도 밝히지 않고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나타나 악을 처벌하고 ‘V’라고 표식을 남기는 그를 ‘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오독이다. V는 사실 정신집중캠프의 실험용 수감자였던 그가 갇혀있던 방의 번호다. 그러니까 ‘5호실 무명씨’가 어떻게 피의 복수를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항쟁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면서 혁명의 아이콘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승리의 주역 ‘브이’로 떨쳐 일어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지를 제목 〈브이 포 벤데타〉에 담고 있는 영화다.

통금 시간, 어두운 밤길을 몰래 나선 방송국 직원 이비가 못된 남자들에게 잡혀 막 험한 일을 당하려한다. ‘밀고자’의 표식을 내보이며 능글맞게 이비를 압박해오는 사내들을 처단하고 V가 이비를 데려간 곳은 영국 국회의사당의 상징 빅벤 꼭대기. 거기서 V는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을 배경으로 침묵에 쌓인 런던에 폭약과 불꽃을 터뜨린다.

이제 무기력과 체념에 눌린 채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던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강력한 언론 통제를 바탕으로 정보를 조작하고, 조작된 정보를 바탕으로 국가를 더더욱 강력하게 통제하던 전체주의 정권의 지도부는 V를 찾아내려고 안달이 난다. 그 와중에 V는 유유히 방송국에 들어와 생방송 중인 스튜디오에 서서 전 국민을 향해 1년 후 11월 5일, 국회의사당을 폭파시키겠노라고 선언한다.

마침 V와 함께 있던 이비를 잡으려고 핀치 형사가 방송국에 진압부대를 이끌고 와있던 상황이라 쫓는 자와 빠져나가려는 자가 엉켜 방송국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혼란의 와중에 달아나던 이비가 얼떨결에 위기에 처한 V를 돕게 되면서 둘은 함께 지내게 된다. 자신과 이비를 지키려다보니 V가 이비를 억류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둘은 서로를 알아나가게 된다. 

처음의 11월 5일에서 예정된 다음의 11월 5일까지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비와 V, V와 독재정권, 독재정권과 민중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 사이에 많은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이비와 사람들이 바뀌도록 만든다. V의 칼끝이 점점 더 권력의 핵심을 향해 겨누어질수록, 언론을 통한 조작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나선다.

이 와중에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던 방송진행자 고든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대신 최고권력자를 패러디하는 쇼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그는 V로부터의 억류에서 달아난 이비를 숨겨준 벗이며, 동성애자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고든의 죽음은 지금껏 숨죽여 살던 이비를 극단으로 몰아붙인다. 저들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기만 하며 살 것인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울 것인가.

마침내 11월 5일, 혁명의 그날. 거리는 혁명을 진압하려는 군인들로 에워싸이고, 폭약을 가득 실은 차량은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그 차량을 출발시킬 사람은 누구인가? V는 말한다. 그 일을 할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고. 그 폭약은 자신의 선물이라고. 국회의사당을 지키려는 군인들을 향해 수많은 가이 포크스들이 다가온다. 이비와 V를 잡으려던 핀치 형사가 이비에게 묻는다. V는 누구였냐고. 이비는 대답한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고, 또 어머니였고, 나의 동생이었고, 당신이었고, 그리고 나였어요. 우리 모두였어요.”

〈브이 포 벤데타〉는 여전히 지속되는 이야기다. 정권은 언론을 통제하려 갖은 수를 쓰고, 제 목소리와 소신을 가진 사람들이 계속해서 방송에서 사라지는 걸 우리는 여태 보아왔다. 매카시가 미국 의회에서 쥐고 흔들던 ‘빨갱이 명단’이라는 종이는 실체가 없는 ‘거짓’이었지만 수많은 사람을 때려잡는 무기가 되었다. 그러나 영화 속 V의 대사처럼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며, ‘너희들이 가진 건 총알과 내가 그 총알에 쓰러지기를 바라는 희망뿐’이지만, ‘널 쓰러뜨리는 건 내 칼이 아닌 네 과거’이고, 총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 ‘가면 뒤에는 그저 살덩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념이 있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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