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도 얻음도 없다’는 가르침
쉬우면서 어려운 불교경전 ‘반야심경’
지혜마저도 “空하다”는 관세음보살님
‘공부해 얻은 경지에 안주말라’ 의미
초심자에겐 어려운 경
어느 사이 초기경전에서 대승경전으로 건너오게 됐습니다. 대승경전의 시작은 그 이름도 유명한 〈반야심경〉으로 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불자들에게 너무나 유명한 경, 불교신자가 아니어도 ‘아제아제’라는 구절로 친숙한 경, 한문 글자 수로는 260자여서 길지 않아 아침저녁 외고 법회 때마다 봉독하기에 적합한 경, 이것이 〈반야심경〉입니다.
〈반야심경〉을 초심자들에게 많이 권합니다. 그럴 수 밖에요. 법회 때마다 봉독하니 반드시 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외우고 나면 그 내용이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참 어렵습니다. 어려운 말은 별로 없는데 알쏭달쏭합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입니다.
사실, 〈반야심경〉은 초심자들이 만나기에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불교교리를 공부한 뒤에 읽어야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가 아니라 ‘완벽하게’ 불교교리를 이해해야 〈반야심경〉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냐고요? 〈반야심경〉은 관세음보살이 사리자(사리불) 스님에게 가르침을 주는 경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부터 〈반야심경〉을 차분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인생이 힘든 당신에게
지금 당신은 인생살이가 참 고달프고 그래서 우울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합시다. 그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을 어떻게 달래보겠습니까? 물론 세상에는 심심풀이땅콩으로 삼을 만한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거나 맛집을 찾거나 술 한 잔을 기울이거나 영화나 공연을 보러 가면 됩니다. 그보다 더 간단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스마트폰에 있지요. 1분이 되지 않는 숏폼은 두어 시간 정도는 뚝딱 날려버립니다.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은 대체로 임시방편이지요. 그때그때 ‘땜빵’하듯이 불안하고 우울하고 괴로운 감정을 떨쳐 버리는 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은 언젠가는 또다시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여러분을 덮치고 말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래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임시방편은 똑똑한 방법이 아닙니다. 아주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냥 해결이 아닙니다. 근심, 슬픔, 우울, 불안,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또다시 그런 부정적인 기분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고, 괜히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헛발질을 하고 번민에 신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오래오래 평화롭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는 사람은 이제 부처님이 일러주는 방법을 따라서 생활 속에서 실천해봅니다. 수행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짜증나고 힘들어하고 있는 내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자”라면서 자기 마음을 살피는 것이지요. 나를 힘들게 만드는 친구나 주변 상황이 관찰대상이 아닙니다. 괴롭고 힘든 내 마음, 내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아, 지금 짜증 나고 힘들어하는 내 자신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면서 자기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즉, 내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런 나는 내 가족과 세상과 어떤 관계로 이어져 있는지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오온, 십이처(육근과 육경), 사성제, 십이연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불교교리입니다. 이런 교리가 자세하게 실린 경전이 초기경전인 〈니까야〉와 〈아함경〉입니다.
수행자는 이런 교리를 아주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꿰뚫어버리는 경지까지 가야 한답니다. “아, 그런 것이구나”하며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찬찬히 사색하면서 내 몸과 마음에 대해 완벽하게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깥의 그 어떤 일에도 더 이상 휘말리거나 흔들리지 않게 되고, 불안하지도 않고 화가 나지도 않게 무심하고도 무덤덤하게 되며, 그러면서도 마음은 평화롭고 느긋하면서도 기분 좋고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지까지 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요? 있습니다. 아라한이라 불리는 성자들이 그런 분들입니다. 지난 연재에서 아라한은, 부처님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무학),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켰고(살적),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응공) 존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라한 중에서도 최고의 아라한이라 할 만한 분이 바로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사리자입니다. 그러잖아도 사리자는 지혜제일이라고 부처님에게 찬탄을 받은 분입니다. 부처님도 인정할 만큼 가장 지혜롭고, 그 심오한 깨달음의 경지를 얻은 분이지요.
아, 그런데 잠깐만이요. 바로 위의 문장을 다시 한 번만 눈여겨 봐주세요. ‘지혜’라는 말이 나왔고, ‘얻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렇지요? 이 두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야심경〉 속에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라는 문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리자를 부르는 관세음보살
아무튼 사리자는 바로 그런 성자(아라한)입니다. 그런데 관자재보살이 이만큼 지혜롭고 깨달음의 경지를 얻은 성자의 이름을 부릅니다.
“사리자여!”
대체 왜 부르는 것일까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합니다. 그건 바로 무엇인가를 더 가르쳐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리자는 부처님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올랐다고 인정을 받았는걸요? 더 배울 것이 없는 성자에게 또 뭘 가르치려는 것인가요? 결론만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얻은 경지에 안주하면 안 된다고 일러주기 위함입니다. 너무 싱겁습니다.
하지만 고생고생해서 얻은 그 성자의 경지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오죽하면 관세음보살님이 나섰겠습니까? 관세음보살(관자재보살)이 사리자를 불러서 그걸 당부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불교교리는 ‘원래’ 빈 것이고, 그런 ‘빈 것(空)’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런 교리는 처음부터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럼,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부터 사리자에게 이런 것들을 다 이야기해주면 될 일 아닌가요? 기껏 아라한이 되도록 일생을 바쳐 수행하고 그 경지에 도달해서 “이제 나는 잘 도달했다”라고 안심하고 있는데, 관세음보살이 대신 나서서 “그대가 공부한 교리는 빈 것이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다”라고 말하니 헛고생한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맥이 빠지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수행한 것은 다 뭐란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라한 중에는 관세음보살의 이런 말을 들으면 너무 충격을 받아서 두 귀를 막아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됐거든요. 난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이 해탈의 경지에 고요히 머무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법화경〉 앞머리에는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법회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고 나가버렸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 충격이 너무 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일단 아라한까지만을 제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전거 가르치는 아버지처럼
나는 이 부분에서 아이에게 두발자전거를 연습시키는 친절한 아버지가 떠오릅니다.
아이는 처음에 작은 보조 바퀴가 달린 네 발 자전거로 시작합니다. 아이는 조금 연습하고 어렵지 않게 씽씽 달립니다. 아이 마음에는 자전거를 이렇게 잘 탈 수 있다는 자부심도 넘쳐 흐를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입장은 좀 다릅니다. 충분히 네발자전거를 타면서 달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기다려준 뒤에 보조 바퀴를 떼어버리겠다는 입장입니다.
아이는 두 발 자전거 소리만 들어도 겁에 질립니다. 그때 아버지가 약속합니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자전거 뒤를 꽉 붙잡고서 함께 달려줄 거니까.”
아버지 말을 철석같이 믿고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 발 자전거의 페달을 밟습니다. 비뚤비뚤 아슬아슬 아이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래, 잘 한다. 아빠가 붙잡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마!”
이렇게 소리를 치면서 한동안 아이 자전거를 붙잡고 달리다가 아버지는 슬그머니 두 손을 뗍니다. 아이는 그런 줄도 모르고 내달립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