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는 ‘화두’요, ‘염불’이요, ‘수행’입니다”
지난 10월2일 국민훈장 모란장 수상
평생 동안 사회복지 헌신 공로 인정
1984년 앙골라 이재민 성금 모으며
복지 원력 세워…1994년 법인 설립
법인 내 20여 개 복지시설 운영 중
최초 치매노인 보호소 설치 등 성과
예산만 500억 원, 직원 1천명 달해
‘메머드급’ 사회복지법인으로 성장
몇 년 전 처음 성운 스님을 뵈었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팔순을 앞두고 있었지만 스님의 발걸음이나 손짓은 물론이고 얼굴 표정 역시 20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가장 선명했던 것은 스님의 ‘마음’이었다. ‘패기’였다. 누구보다 젊고 미래지향적인 당신의 생각을 설명하던 스님을 보며 ‘생각과 마음이 젊은 진짜 청년’을 만난 느낌이었다.
최근 성운 스님과 관련한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스님이 노인복지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0월 2일 제28회 노인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사회복지에 헌신하며 수많은 성과를 일군 것은 대한민국이 다 아는 사실. 스님을 옆에서 ‘아주 살짝’ 지켜봐 온 입장에서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곧바로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서울 삼천사로 향했다. 서울에 있지만 깊은 산속 어딘가에 있는 절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삼천사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계곡의 물소리는 시원했고 큰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산바람도 정겨웠다.
삼천사는 북한산 의상능선의 한가운데 등줄기를 이루는 용출봉(龍出峰), 용혈봉(龍穴峰), 증취봉(甑炊峰)에 둘러싸여 있다. 30여 개의 전각에 내외국인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 대찰(大刹)이 바로 삼천사다.
‘삼각산 삼천사(三角山 三千寺)’가 적힌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보물 마애여래입상에 절을 올렸다. 이어 다른 절의 산신각과 같은 ‘산령각’에 올랐다. 산령각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 보니 마치 신선이 된 느낌이다. 산의 기운을 온전히 품에 안고 성운 스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한민국 사회복지의 전설
스님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여전했다.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다시 한번 삼배를 올렸다. 전에도 그랬지만 스님 방에는 각종 상장들이 가득했다. 훈장부터 표창까지 종류도 다양했고 숫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스님은 이미 교정복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한 바 있다. 성운 스님이 설명한 노인복지 관련한 업적들부터 정리해 본다.
1994년 11월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삼천사복지재단을 설립한 성운 스님은 △인덕노인복지회관 설립 운영 △전국 최초 치매노인 단기보호소 설치 운영 △전문요양원 호암마을 설립 운영 △어르신 맞춤형 50여 개 프로그램 개발 노인종합복지관 제공 △단순 쉼터개념 소규모 경로당 통합 신개념 경로당인 노인복지센터 개설 운영 등 시대를 앞서는 노인복지모델을 제시 운영해왔다.
특히 2009년 300병상 규모의 최첨단 요양원과 재가방문, 데이케어센터 등으로 구성된 종합노인복지타운을 완공해 원스톱(ONE-STOP) 토털케어시스템을 구축했다. 2010년 고용창출 100대 우수기업으로 인정받았으며 지금까지 최우수 요양등급 시설로 운영 중이다.
성운 스님은 나아가 2000년 무의탁 어르신 100여 명에게 낡은 집 개보수 서비스 제공을 시작으로 △무의탁 독거 어르신 300여 명 무료 틀니 보급 △무의탁 어르신 칠순·송년 잔치 개최 △어르신 검정고시 학교개설 운영 △230여 명 어르신 대상 무료 장례서비스센터 제공 등의 사업도 펼쳐왔다.
“이번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게 된 것은 저에게 무한한 영광이며, 80년이 넘는 인생과70년이 넘는 수행자의 길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출가 수행자가 세속의 훈장이나 칭찬에 연연해서는 안 되겠지만, 저만의 공로가 아닌동고동락을 함께한 은평구민과 서울시민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또한 삼천사와 인덕원 등에서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의 노력과 헌신의 결실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인연은 제가은평구 진관외동 삼천사에 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1978년 삼천사에 왔다. 당시 삼천사 주변의 열악한 생활환경을 보고 자연스럽게 사회복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1975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기도를 하던 중 문수동자를 친견했습니다. 문수동자가 삼각산으로 가서 포교하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며칠 뒤에는 꿈에서 마애여래입상을 봤어요. 삼천사에 와 보니 꿈에서 보았던 마애여래입상이 계셔 여기서 짐을 풀었습니다. 당시 진관내·외동은 상이군경과 철거민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절의 보리쌀 등을 나눠주던 중 중생에게 나눔을 베푸는 일이 자비복지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성운 스님은 “종교와 사회복지는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저소득층과 차상위계층의 빈곤을 구제하는 데 국가가 비운 자리를 종교가 채워야 합니다. 출가 이후60년이 넘도록 화두를 참구하고 교학을 연찬하면서,진리는 대승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절감하였습니다.특히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으로 봉직하면서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성운 스님은 총무원장 녹원 스님을 모시고 1984년 조계종 사회부장 소임을 맡았다.
“녹원 큰스님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제 주변 도반들의 추천으로 사회부장 소임을 맡게 됐습니다. 도반들이 ‘해인강원을 졸업해 내전(內典)에도 밝고 영어에도 능통해 국제적 감각이 있고 또 현대사회 흐름을 잘 알고 있어’ 추천했다고 합니다. 저에게는 과분한 평가였죠.”
성운 스님의 불교사회복지 원력도 녹원 스님을 모시면서 구체화됐다.
“제가 사회복지법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종단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 앙골라 이재민 돕기 모금을 하면서입니다. 불자들의 마음을 모아 6000만원을 모금해 전달했습니다. 실무책임자로서 그때 개신교와 천주교가 어떻게 사회복지사업을 벌이고 있는지 알게 됐어요. 한없이 초라했던 불교 현실에, 정부와 함께 일을 하고 있던 이웃종교 상황에, 두 번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몇 년 뒤 복지법인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불교사회복지에 대한 얘기를 꺼내니 녹원 큰스님만 저의 뜻을 지지해주셨고 다른 소임자들은 눈만 깜빡이고 있던 상황이 기억나네요.”
이후 스님은 10여 년간의 노력 끝에 1994년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사회복지시설을 수탁하거나 새로 건립했다. 현재 인덕원은 20개가 넘는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종사자만 1000여 명에 이르고, 시설 이용자만도 연간 1000만명이 넘는다. 매년 예산으로 약 500억원 이상을 집행하고 있다. ‘초불교적’ 규모다.
성운 스님은 “인덕원의 인(仁)은 사랑과 자비요, 덕(德)은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인덕원을 그런 곳으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베푸는 마음 가지면 만 가지 소원 이룬다”
대승보살행, 진정한 사회복지의 길
중생제도, 중생복지가 수행의 목적
자비로 고통 속 중생과 함께 해야
끝이 없는 배움의 길과 회향
스님의 방에서 또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잡지 〈타임(TIME)〉이었다. 스님은 〈타임〉지와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했다.
“시대에 맞게 부처님 법을 전하려면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파벳도 모른 채 〈타임〉지를 보며 영어 공부를 시작했지요.”
해인사 강원을 졸업한 직후였다. 스님은 불교가 세계적인 흐름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에 현대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걸망을 짊어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른스님들은 세속 공부를 만류하던 시절이었다. 해인사 일타 스님도 똑똑한 성운 스님이 수좌가 되기를 당부할 정도였다. 그러나 스님은 불교가 중생들의 삶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울에서 검정고시부터 시작해 만학도가 되었다.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조계사 화장실에 딸린 창고에서 지내며 경비도 보고 화장실 청소도 도맡았다.
“영어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타임〉지를 읽었어요. 그걸 읽으며 세계정세에 눈을 떴지요. 정치, 경제, 문화, 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흐름을 파악하고 불교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확인했어요. 그리고 불교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됐습니다. 저에게 〈타임〉지는 세계 문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주문이었습니다. 저를 이룬 것이 부처님의 경전이라면 세상을 알게 한 것은 〈타임〉이었습니다.”
스님의 꾸준한 공부과정은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어려운 환경 때문에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찾아주기 위해 경찰서와 보호소를 찾아갔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합니다.”
스님은 은평구사원연합회장을 겸임하면서 1995년부터 매년 호국충혼법회를 통해 40~50명의 서울 지역 청소년에게 30여 년간 약 10억원의 장학금을 전달해 오고 있다. 2024년에는 (재)삼천사성운장학재단을 설립해 은평구 거주 동국대 학생 30명에게 장학증서와 함께 장학금을 전달했다.
또한 배움을 갈구하는 사회복지사, 공무원, 회사원 등 직장인에게 자기개발 교육기회를 제공하고자 의정부 신흥대학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은평구에 강의실을 마련, 전문학사와 일반학사 50여 명을 배출시켰다. 동국대 석좌교수로 출강해 노인복지분야 석·박사 논문 제자 73명을 배출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은 물론 미래인재 양성에도 진력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의 복지철학은 동국대 박사학위 논문 ‘아쇼까왕의 복지사상 연구’에 잘 나타나 있다. 1990년대 이후 불교사회복지가 급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교복지의 정체성과 프로그램이 빠져 있음을 인식하고 인도 고대 아쇼까왕의 통치이념에 나타난 복지사상의 배경과 내용을 연구해 논문으로 발표했다. ‘아쇼카왕의 복지사상 연구’는 우리나라 불교사회복지 연구에 있어 기준이 됐다.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수행자로서 ‘노인복지 현장경험론’(2003년), ‘사회복지실천 현장론’(2004년), ‘노인복지론’(2007년), ‘사회복지현장실습’(2007년), ‘뉴 가이드 노인복지론’(2008년), ‘불교사회복지론’(2010년) 등을 통해 복지현장 중심의 복지서비스 모델을 제시했다.
스님 방에는 월탄 스님 사진도 있다. 성운 스님은 2022년 8월 스승 월탄 스님을 보내드렸다. 1969년부터 50년 넘게 모신 스승과의 이별은 쉽지 않았을 터. 월탄 스님은 불교정화를 위해 1960년 11월 24일 대법원에서 할복한 육비구 중 한 분이다. 월탄 스님은 “당시 대법원장 방에서 ‘우리는 비구승인데 불법(佛法)에는 대처승이 없다는 것을 죽음으로 증명하려고 합니다’라고 밝히고 할복을 단행했다”면서 “불교를 위해 순교하겠다는 각오를 지닌 희망자를 모집하여 참여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은사스님은 정법에서 어긋나면 뇌성(雷聲) 같은 사자후(獅子吼)로 엄한 아버지처럼 경책하셨지만, 평소에는 따뜻하고 자상한 미소로 격려해 주시던 어머니 같은 분이셨어요. 세세생생(世世生生)의 원력을 금생에 다 이루지 못하고 가신 아쉬움이 있지만, 다음 생에는 서원(誓願)을 반드시 이루시리라 확신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
스님 방에는 성철 스님의 글씨 ‘불기자심(不欺自心)’도 있었다. 성운 스님의 좌우명이 바로 ‘불기자심’이라고 했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뜻이죠. 청정한 자리에 있는 것이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청정한 자리에 있으면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없어요.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스님의 불교와 수행, 수행과 복지에 대한 말씀이 이어졌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은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다른 표현입니다. 수행의 완성과 중생복지를 가리키는 말이죠. 또한 이고득락(離苦得樂),발고여락(拔苦與樂)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역시 사회복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나눔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베풀면 언젠가 그 베풂이 다시 돌아옵니다. 그곳이 바로 깨달음의 자리입니다. 조건 없이 주니까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조건 없이 주면 또 다른 인연이 만들어집니다. 조건 없는 자비를 실천하는 대승보살 사상이야말로 진정한 진리이며,복지의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스님은불교 자체가 중생복지라고 강조했다. 수행하는 목적 역시 중생제도와 중생복지를 위해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종교가 고유의 이념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전개하는 활동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보편적 자선이 바로 사회복지입니다. 종교 가운데 특히 불교는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의 존엄과 평등사상에 이념과 가치를 두고 중생구제의 방편으로 복지활동을 실천했어요. 과거 전통사회와는 달리 사회 환경이 급변하면서 새로운 양상의 사회문제가 대두되었고, 이에 대한 정책과 제도적 장치로 생겨난 것이 사회복지입니다. 사회적 활동에 불교가 주체가 되어 불교의 가치규범이나 원리, 사상 등을 기반으로 사회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적 활동을 불교사회복지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사회복지의 선구자, 아니 대한민국 사회복지의 선구자로 존경받고 있는 성운 스님은 주저함이 없었다. 스님의 말씀은 한참 동안이나 계속됐다. 긴 시간 스님 말씀을 듣고 마당에 나오니 무언가 모를 청량감이 느껴진다.
“복덕을 얻으려거든 씨를 뿌리십시오. 씨를 심지 않으면 열매를 얻지 못하니 모든 생명들을 위해 이익되게 하면 복덕은 스스로 돌아옵니다.” “열매를 얻으려면 씨를 뿌려라. 씨를 심지 않으면 열매를 얻지 못하나니 베푸는 마음 늘 가지면 만 가지 소원을 이룸이니라.”
경내에 세워진 스님의 말씀도 눈에 들어왔다. 다시 산을 내려가려는 중생에게 전하는 스님의 말씀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육취윤회경〉에 ‘보시의 공덕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부처님 말씀을 보시하면 큰 지혜를 얻게 되고, 의약을 보시하면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다. 등불을 보시하면 항상 눈이 밝아지게 되며, 음악을 보시하면 목소리가 아름다워진다. 침구를 보시하면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고, 좋은 말을 보시하면 항상 창고가 가득 차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번뇌의 중생계가 다하는 날을 기약할 수 없지만 고통의 바다 아닌 곳 또한 어디에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지혜와 자비로 고통 받는 중생들과 함께 하는 일입니다. 무한한 자비심과 차별 없는 평등심으로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하게 된다면 우리가 바로 미래의 부처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