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살부터 탑까지…바위에 새긴 불국토
경주 남산 소재 탑곡 마애조상군
부처, 보살, 탑 등 바위에 새겨져
9·7층 마애탑, 명랑스님과 관계
불곡마애여래좌상을 참배하고 내려와서 동남산 문천길을 300m 정도 내려오면 버스 한 대 정도는 댈 수 있는 작지만 아담하니 괜찮은 주차장이 나온다. 서남산주차장이나 동남산 통일전 앞의 주차장 이외에 대형 버스 한 대 정도 주차할만한 공간이 있는 곳이 탑곡 마애조상군의 주차장이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탑과 절이 있었다고 해서 탑곡(탑골)이란 지명을 사용하였다. 탑곡주차장 주위로 예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작은 계곡을 따라 마애조상군으로 오르는 한가한 길은 부드럽고 포근하다. 꽃피는 철에 가면 계곡 길을 따라 좌우에 들어서 있는 아담한 집들 마당과 축대 사이의 이름 모를 꽃들이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나는 남산 참배 길에서 손에 꼽히는 이쁘고 한가하고 아담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탑곡 마애조상군은 1924년에 세워진 옥룡암 옆에 있다. 옥룡암의 ‘소림정사’ 법당의 초석은 신라시대 초석이다. 마당에도 신라시대의 크기가 다른 옥개석과 석재로 만든 석탑과 난간이 있다.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에 보면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신인사(神印寺)라는 글의 명문이 써진 기와가 출토되었다. 그렇기에 신라시대 신인사의 터로 추정한다. 그런데 지금은 기와의 행방은 모른다고 한다.
한국에는 신인종(神印宗)이라는 교종의 종파가 조선 초기까지 있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유림(神遊林)이었던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의 기도로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친 명랑(明朗) 스님을 개조로 한다. 또한 명랑은 신라 불교를 확립한 자장 율사의 조카이기도 하다. 관련 역사 기록은 이렇다.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고 하자 왕이 용궁에서 비법을 전수하고 온 명랑법사에게 방비한 방책을 물어본다. 명랑이 말하기를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하십시오’하였다. 절을 짓기 전에 당나라가 침공해오자 명랑은 비단으로 절을 임시로 짓고는 오방신상을 만들었다. 또한 유식종의 뛰어난 스님(瑜伽名僧) 12명과 함께 문두루비밀법 기도를 하니,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이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명랑은 신라 사간(沙干) 재랑(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인데,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딸 김씨이며 곧 자장의 누이라고 한다.
신유림은 낭산에 있었는데 신라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七處伽藍) 중 하나이며, 도리천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한 선덕여왕의 신비한 이야기와 함께한다. 신라는 불교를 삼국 중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 가섭 부처님이 법을 설한 곳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의 절터가 전불시대 칠처가람이다.
서울에 일곱 곳의 절터(칠처가람)가 있는데 첫째는 천경림(天鏡林, 지금의 흥륜사)이다. 둘째는 삼천기(三川, 지금의 영흥사)이다. 셋째는 용궁 남쪽(지금의 황룡사)이다.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이다.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 지금의 영묘사)이다.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이다. 일곱째는 서청전(請田, 지금의 담엄사)로서 모두 전불시대의 절터이다.
선덕여왕이 신하들에게 병도 없었는데 스스로 자신이 죽을 날짜를 말하면서,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하였다.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서 신하들이 물으니,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선덕여왕이 말한 날짜에 승하하자 장사 지내고 10년이 지난 뒤에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낭산 남쪽에 창건하였다. 사천왕천은 도리천에 있으니 선덕여왕의 신령스러움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천왕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나타나는 금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탑을 세우는 쌍탑 양식의 최초 사찰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 최고의 명장(名匠)인 양지(良志) 스님이 제작한 녹유신장벽전(綠油神將壁塼)이 동·서 목탑지 기단부에서 발견되어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탑곡의 옥룡사가 옛 신인사라는 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신인사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호국불교의 중심인 명랑의 신인종을 대표하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대표 사찰이 ‘조계사’인 것처럼, 종파의 이름을 사찰의 이름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대표 사찰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주 남산의 불국토 세상이 탑곡 마애조상군에 새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구성 내용이 풍부한 이유도 여기 있을 것이다. 신인사가 당나라의 침략을 막은 명랑의 신인종 중심 사찰이었어야, 탑곡 마애조상군에 이처럼 풍부한 부조가 남은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탑곡 마애조상군은 7세기에 조성된 경주 남산의 초기의 불교 유적이다. 탑곡 마애조상군이 새겨진 바위의 높이는 10m이고 둘에는 총 40m이다. 사면에 부처상, 보살상, 비천상, 금강역사, 좌선하는 스님, 사자 등 총 24구와 5m 높이의 9층 탑과 3.5m 높이의 7층 탑을 조각해 놓았다.
큰 바위의 사면에 유명한 황룡사지 9층 목탑으로 추정되는 9층 탑이 새겨져 있는 곳이 이곳이다. 무엇보다 자장 율사는 황룡사에 9층 목탑을 건립하도록 건의한 승려였다. 자장 율사의 조카이며 신인종의 개조인 명랑의 신인사의 마애조상군에 있는 9층 탑은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 준다. 자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옥룡암에서 바위로 다가가 정면을 바라보면 왼쪽에 9층 탑이 있고 오른쪽에 7층 탑이 있다. 그리고 두 탑 중앙 위쪽에는 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천개가 부처님 머리 위쪽을 받치고 있다.
신인사의 마애조상군 정면에 명랑의 외삼촌인 자장 율사가 건의하여 만든 9층 탑이 있는 것이다. 명랑은 신라 중심 사찰 황룡사의 국통이었던 자장 율사의 조카였기에, 신라 불교를 대표하는 황룡사의 9층 탑을 새겨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쪽의 7층 탑 또한 명랑과 관련된 사찰의 탑이 아닐까 싶다. 〈삼국유사〉에 보면 명랑과 관련된 사찰은 금광사와 사천왕사가 있다. 그런데 금광사면 더 멋질 것 같다.
금광사는 명랑이 살던 집에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조상하였더니, 금의 빛이 난다고 해서 금광사라 하였다. 정면에 조각해 놓은 불상과 7층 탑은 금광사의 황금 불상과 황금 7층 탑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이 또한 역사의 사실적 실체와 남아 있는 문화유산을 종합하며 그려보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두 탑 밑에는 사자가 호위하면서 탑을 받치고 있다. 해학적이라 사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절에 이러한 모습이 있다면 무조건 사자구나 하면 된다. 상원사 문수전 앞 고양이로 알려진 것도 사자상이다. 이건 무조건이다.
당에 들어가 도학(道學)을 배웠다. 장차 돌아오려 하는데 곧 해룡의 청으로 인해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받고 황금 1000냥을 받아 몰래 땅 밑으로 가서 자기 집의 우물 바닥으로 솟아 나왔다. 이에 집을 버려 절로 만들어서 용왕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몄더니 광채가 특별하였고 인하여 금광(金光)이라 이름하였다.
왼쪽 바위에는 여래좌상과 보살이 여래를 바라보고 앉아 있다. 여래와 보살 주위에 일곱의 비천상이 날아오르고 있는데, 정면을 향해 날고 있는 형상을 그린 것이다. 더 왼쪽의 보리수 아래 선정에 든 스님은 불교가 전래 된 삼국시대 수행하는 모습을 알려준다. 이때는 인도처럼 나무 밑에서 선정에 드는 것이 일반적인 수행의 모습이었나 보다.
오른쪽 바위에는 보리수에 앉아 계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인다. 불상 위와 옆에 두 비천상이 날아올라 있다. 뒤쪽 면은 편평한 공간이 나오고 더 뒤엔 소나무가 들어서 있다. 이곳도 건물터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인되지는 않았다. 바위에는 채색의 흔적이 분명한 삼존불이 감실의 흔적을 보이며 조성되어 있다. 삼존불의 중앙 본존불과 양 협시보살의 좌대는 꼭 허공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오른쪽에도 나무가 새겨져 있다. 나무가 울창한 남산의 불국정토를 상징하는 것일까 싶다.
앞에는 우람한 입불상이 있다. 사각의 연화 좌대에 불상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연화 좌대에 발등을 조각했는데 볼 때마다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불상 뒤에도 스님이 그리고 앞 바위에도 스님의 상체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으로 돌면 희미한 신장상이 긴 창을 쥐고 있다. 바로 뒤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다. 무너진 석탑을 1977년 복원한 것이다. 단층 기단과 1층 탑신, 희미한 동면 문비의 표현, 3단의 옥개 받침과 1단의 별석 탑신 받침이 9세기 후반 조성된 것으로 보이게 한다.
탑곡 마애조상군을 조성한 시기는 7세기 중엽과 9세기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마애불상의 양식은 고형이다. 그렇기에 7세기에 마애불상이 조성되고, 9세기 위쪽으로 불사가 확대되며 불상과 삼층석탑이 조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