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지상백고좌] 청주 관음사 회주  함현 스님

“수행, 나를 밝히고 나를 꽃 피우는 것”

출가 전 송담 스님께 ‘시심마’ 받아
출가 후 해인사, 봉암사 등서 수행
서암 스님께 ‘無’자 화두 받아 정진

2022년 “정토 종지기 될 것” 선언
나이 들어 참선 어려워지자 결정해
연관 스님 원적도 결정에 영향 줘
역대 선사들, 염불정진 중요성 강조

함현 스님은… 보은 법주사에서 이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했다. 종립선원 문경 봉암사 주지로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했으며 현재 청주 관음사 회주 소임을 맡아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함현 스님은… 보은 법주사에서 이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 송광사, 통도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했다. 종립선원 문경 봉암사 주지로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했으며 현재 청주 관음사 회주 소임을 맡아 후학들을 제접하고 있다.

약 20년 전의 일이다. 당시 〈현대불교〉 신입기자이던 시절, 조계사 신도회가 문경 봉암사로 대중공양을 가니 동행해 현장 취재기사를 써보라는 데스크의 지시가 내려왔다. 불교의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신기할 때라 주저 없이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 이른 새벽 버스를 타고 달리고 또 달렸다. 1년에 한 번 문을 열어준다는 종립(宗立)선원에 도착한 기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수백 명의 불자들은 봉암사 곳곳을 참배하고 담 너머 선원의 스님들이 하루빨리 도를 이뤄 중생을 제도해주기를 발원했다. 

불자들이 대웅전에서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점심공양을 하는 사이 경내를 휘젓고 다니던 그 찰나. 희양산을 뒤흔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하는 거야?” 흡사 사자의 포효 같았다. 곧바로 주지실로 소환됐다.

“여기는 모든 전각이 선원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정신없이 다니면 스님들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모르나?”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고 두 손이 모아졌다. 한참 동안 혼이 난 뒤 스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호랑이 같이 큰 눈과 목소리를 가진 주지스님의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서울로 올라와 스님의 ‘정체’(?)를 수소문했다. 바로 함현 스님이었다. 당시 선방의 중진으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스님. ‘봉암사’라는 한국불교의 상징을 지키고 있는 수좌가 바로 함현 스님이었다. 

운명적 순간의 연속 
시간이 흐르고 흘러 최근 스님의 근황을 다시 들었다. 스님이 ‘정토(淨土)의 종지기’를 자처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안부도 여쭐 겸 서울 은평구의 도솔선원 문을 두드렸다. ‘함께 기뻐하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무디따(Mudita)’ 글씨가 걸린 벽이 인상적이었다. 

스님은 20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우렁찬 목소리와 큰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여전했다. 다만 시커멓던 눈썹의 반이 어느덧 하얗게 변한 것에서 세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주 관음사와 도솔선원을 오가면서 불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대중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한국불교의 대표적 수좌(首座)에서 염불 수행 전도사(?)로 반 발짝 자리를 옮긴 함현 스님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우선 스님의 부처님 인연부터 듣기 시작했다. 

“20대 초반의 어느 날 저녁에 조계사 근처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목탁소리가 들려요. 그 소리를 따라 가봤더니 대웅전에서 사람들이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나 말씀을 잘하시던지 스님의 법문이 귀에 쏙쏙 들어왔어요. 그래서 법회에 나가게 됐고 인천 용화선원에서 송담 스님을 모시고 참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좀 흐르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계사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법사스님께서 법문 말미에 ‘출가할 사람 손 좀 들어봐’라고 하시는데 대중 중 유일하게 저만 손을 들고 있더라고요.”

스님의 출가는 운명이었다.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고 했다. 조계사 대중으로 있던 스님이 추천서를 써줬다. 한 분은 법주사 주지 이두 스님이었고, 또 한 분은 해인사의 일타 스님이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다 옥천역에서 내렸다. “법주사 대불(大佛)을 먼저 보고 싶어서 내렸다”는 스님은 그길로 이두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1977년의 일이다.     

“처음 만난 은사스님은 얼굴이 하얗고 아주 미남이셨어요. 하하. 학승이셔서 그런지 말씀도 잘하시고 편안하신 인상이어서 바로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제자들한테는 ‘중노릇 잘하라’는 당부를 자주 하셨습니다.”

스님은 바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작은 방에서 무려 30명이 넘는 행자들이 함께 생활했다. 

“하다 보니 행자반장을 맡게 됐어요. 이것저것 일을 하다 보면 목소리가 커질 일이 많습니다. 강원 학인스님들이 공부하는데 제 목소리가 방해가 됐나 봐요. 200명이 넘는 학인스님 앞에 불려가 4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혼이 났습니다. 대중공사가 끝나고 마당에 나오자마자 쓰러질 정도로 많은 경책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행자를 마친 스님은 계를 받고 강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가야 했고 제대 후에는 바로 선원에서의 정진을 시작했다.  

“출가 전에는 송담 스님께 참선을 배웠습니다. ‘시심마(是甚)’를 화두로 받아 정진했습니다. 출가 후에는 해인사, 송광사, 백양사, 통도사, 대승사, 동화사, 봉암사 등에서 공부했습니다. 제방에 다니다가 서암 스님을 모시면서 무(無)자로 화두를 바꿨습니다. 서암 스님을 모시고 살 때 공부가 제일 잘 된 것 같습니다. 서암 스님은 항상 자비롭고 진솔하게 후학들을 제접하셨어요. 봉암사에 오시는 모습, 봉암사에서 가시는 모습만 봐도 공부가 됐습니다. 제가 좀 거칠게 여쭈어도 스님께서는 항상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님은 “성철, 서옹, 경봉, 구산, 월산, 서암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어른들이 우리 곁에 계셨다는 것은 큰 복이다. 우리 시대의 선지식들을 모시고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전했다. 

스님은 선원에서 정진을 하는 중에도 이두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청주 관음사에서의 포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님의 법명이 ‘함현(涵玄)’이 된 사연도 운명적이다. 

“해제를 하면 은사스님을 모시러 관음사에 가요. 가서 이것저것 사중 일을 살핍니다. 1980년대 중반에는 은사스님께 잡혀서 총무 소임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법회를 하면 수십 수백 명이 오고 그랬습니다. 법회에 오는 아이들이 계속 늘어났어요. 하루는 명단을 보니 ‘현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이 16명이나 됐습니다. 그때 제 법명이 현정이었습니다. 은사스님께서 주신 것이죠. 법회를 한 번 열면 여기저기서 현정이를 찾습니다. 개구쟁이 녀석들은 일부러 저 들으라고 현정이를 찾았어요. 도저히 그대로는 법회를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아 은사스님께 말씀을 드리고 제가 존경하는 함허득통 선사의 ‘함’자와 은사스님께서 주신 ‘현’자를 묶어 ‘함현’으로 법명을 바꿨습니다. 하하.”

스님은 제방에서의 정진을 이어가며 2005년부터 4년간 봉암사 주지를 지내기도 했다. 봉암사 주지소임 회향 후에도 수행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일’이 생겼다.

봉암사 대웅전에서 예불을 올리는 스님들의 모습
봉암사 대웅전에서 예불을 올리는 스님들의 모습

“참선·염불은 ‘不二’… 지향하는 곳은 같다”

부처님께서 왜 대기설법 하셨는가
중생 근기 따라서 法을 설하신 것
불자들도 근기 맞춰 수행 하면 돼
‘쉼 없이 정진하라’는 부처님 당부
출재가 모두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정토의 종지기가 될 것”
“나는 이제부터 새살림을 차리려고 합니다. 선행 공덕을 살뜰히 키우면서 나의 이웃들을 끝없이 살려 나가는 일이 살림입니다. 나의 공성의 오두막인 극락정토를 장엄하는 정토의 살림꾼, 아미타부처님의 본원(本願)을 깊이 믿고 널리 권하는 정토의 종지기가 될 것입니다.”

선방의 상징이자 또 다른 이름으로 존경받던 함현 스님이 2022년 돌연 염불행자의 길을 선언했다. 수많은 대중들이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갔다.

“비구 함현은 엎드려 발원하옵니다. 이 목숨을 마칠 때 궁극의 평안과 안락의 문이 연꽃 피듯 저절로 열려지이다. 그 문 앞에서 성중과 더불어 이 몸 맞아 정토로 인도해주실 아미타부처님께 미묘한 빛과 향기로운 소리로 찬탄하고 공양하고 예배 올리옵나니 바라옵건대, 천상·인간·아수라 세계의 항하사 중생들이 봄비 기다리는 설렘으로 아미타불께 귀의해 여덟 가지 고통 벗어나 정토에 태어나게 하소서.”

함현 스님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왜’일까?

“한참 참선을 열심히 할 때, 봉암사에 함께 살던 수경 스님과 연관 스님이 염불 수행을 하자고 했습니다. 연관 스님이 ‘참선도 해봤고 남방에 가서 수행도 해봤으니, 이제 노년에는 셋이 모여서 북을 치고 꽹과리를 두들기며 염불이나 합시다’라고 해 속으로 저는 ‘이 노장들이 미쳤나’하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참선하기 쉽지 않은 몸이 되었어요. 그래서 수행의 방법을 바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60여 일간 일본 시코쿠 순례를 하면서 염불 수행을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겨울 안거 때 도솔선원에서 폐관 정진을 했습니다. 방 안에서 하루 8km를 걷고, 절 300배와 염불을 하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됐습니다.” 

함현 스님이 염불 수행을 확신한 계기는 연관 스님의 입적이었다. 연관 스님은 코로나19에 감염돼 병원을 찾았다가 말기암 진단을 받고 스스로 곡기와 물을 끊어 2022년 6월 본래 자연으로 돌아갔다. 

“연관 스님을 보내드릴 때 동료 선후배 스님들이 함께 염불을 해줬습니다. 다소 불편해 보이던 연관 스님의 얼굴이 ‘아미타불’ 염불을 하면서 맑게 변하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마지막에는 아주 편안한 표정으로 이번 생의 인연을 마무리하셨어요. 연관 스님을 보내드리면서 염불 수행을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정토법문은 그 실천이 쉽고 일상적이기에 이 시대의 삶들에게 크나큰 위안과 은혜로운 빛을 주는 최적의 법문”이라며 “물러남 없는 신심(信心)으로 앉으나 서나 오직 아미타불만을 염(念)하면 생각 생각이 아미타불이 되어, 붉은 지혜의 해가 솟아올라 보배 나무와 보배 연못이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고 말한다.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을 믿고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 내세에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선(禪) 수행을 중시하는 한국불교에서 정토신앙은 오랜 세월 타력신앙 혹은 하근기 수행법으로 치부돼왔다. 그렇다고 수행자들이 염불을 터부시한 것은 아니다. 

중국 영명 연수 선사는 “참선만 하고 정토수행을 하지 않으면 열에 아홉이 길을 잃나니 중음의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을 따라가리라”고 경계하며 “참선도 하고 염불수행도 했다면 뿔까지 달린 호랑이와 같나니 현세에는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내세에는 부처나 조사가 되리라”고 강조했다. 

운서 주굉 스님은 “한결같이 산란하지 않은 마음으로 염불만 하면 그가 지은 공덕의 크고 작음에 따라 결정코 구품연화대에 왕생할 것”이라고 설했다. 

또 한국불교의 새벽을 열었던 원효 스님은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하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 근대 한국선의 중흥조인 경허 스님도 “온갖 인연 쉬고서 다만 아미타불을 염하니, 곧 그것이 여래선이며 그것이 바로 조사선”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참선과 염불이 다른 건 아닙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마음을 한 번 뒤집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법의 차이일 뿐입니다. 향하는 곳은 같아요.” 

함현 스님은 책을 확인하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함현 스님은 책을 확인하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다른 듯 같은 길, 참선과 염불
스님은 참선과 염불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참선과 염불 수행 방법은 무엇일까? 스님은 먼저 참선법에 대해 〈선관책진〉에서 독봉계선 선사가 말씀하신 것으로 대신하겠다고 했다. 

“그대가 무(無)자를 참구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이 공안 공부의 목숨을 ‘어째서 개에 불성이 없는가’에 두어라. 그대가 ‘만법귀일’을 참구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이 공안 공부의 목숨을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에 두어라. 그대가 염불로 참구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이 공부의 목숨을 ‘염불하는 이놈이 무엇인가’에 두어라. 그리하여 마음을 돌이켜 스스로를 지켜보며 깊고 깊은 의심의 바다 속으로 끝없이 들어가라. 그대가 만약 화두를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면 다시 그 공안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끝까지를 분명하게 들어서 처음과 끝을 하나로 꿰뚫어라. 이렇게 하면 앞뒤가 절로 잡혀 몰록 의정이 맺힐 것이니, 이 의정이 끊이지 않도록 간절히 마음을 써라.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발을 들고 몸을 뒤쳐 허공에서 한바탕 곤두박질을 치게 될 것이니 이때에 다시 와서 산승의 방망이를 맞도록 하라.”

‘행주좌와’의 여여한 염불수행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첫째, ‘행(行)’은 아미타부처님에게 연꽃 공양을 올리러 간다고 관상한다. 이 수행은 아미타부처님에게 연꽃 공양을 올리러 간다고 그리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는 수행법이다. 

둘째, ‘주(住)’는 아미타부처님에게 기대어 서 있다고 관상한다. 이 수행은 아미타부처님에게 기대어 서 있다고 그리면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수행법이다.

셋째, ‘좌(坐)’는 극락정토에 핀 연꽃 위에 앉아 있다고 관상한다. 이 수행은 극락정토에 핀 연꽃 위에 앉아 있다고 그리면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수행법이다. 

넷째, ‘와(臥)’는 아미타부처님의 무릎을 베고 있다고 관상한다. 이 수행은 아미타부처님의 무릎
을 베고 있다고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수행법이다. 좀 더 명확한 설명이 이어졌다. 

“아미타불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이 없어요. 〈아미타경〉을 있는 그대로 독송합니다. 주석서들을 보면 더 헷갈릴 수 있어요. 원전을 보는 게 가장 좋아요. 불교에는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대기설법을 하셨느냐? 중생 근기에 따라서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불자들도 각자의 근기에 따라 참선이나 염불 등의 수행을 하면 됩니다. 활로를 구한다고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실천할 때 이뤄진다 했습니다. 바른 실천이란 바르게 기억하고 바르게 집중하고 바르게 통찰하기입니다. 이는 모든 불문수행의 요체로 정토법문도 이를 여읜 특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스님의 말씀에는 거침이 없었다. ‘수행’에 대한 당부도 구체적이었다. 

“수행이라는 것은 나를 밝히는 것입니다. 나라는 꽃을 피우는 것이죠. 그런데 거짓과 가식으로 꽃을 피워서는 곤란합니다. 수행자들이 왜 출가를 했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래의 출가정신, 초발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삶은 순간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신속하고 무상한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쉼 없이 정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울림이 있을까요? 부처님의 이 말씀을 출재가 모두가 꼭 가슴에 새겼으면 합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뭔가 모를 여운이 가득했다. 도솔선원을 나서며 〈머리 한번 만져 보게나, 극락 간다네〉 중 ‘함현 자계’의 한 구절을 가슴에 새기고 새긴다.

“이보게 함현, 이제 머리나 한번 만져 보세나! 머리를 돌려 스스로를 보아야 하네. 눈빛을 되돌려 스스로를 점검해야 하네. 그래야 출가의 첫 뜻을 저버리지 않고 진정으로 부처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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