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의 ‘무소의 뿔 경’
‘무소의 뿔처럼~’ 구절, 유명
온전한 자기 자신 마주하려면
오롯이 혼자되는 시간 가져야
블로그 세월 20년
블로그를 시작한 지 제법 오래됐습니다. 2004년 9월부터였으니 20년 세월입니다. 처음에는 가까운 친구들과 소소하게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였지요. 그러다 어느 사이 거의 내 일기장처럼 블로그를 이용하게 됐습니다. 가족과 있었던 일, 갈등, 길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을 관찰하며 품은 느낌, 읽은 책, 읽고 있는 책,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푸념과 은근한 자랑 등등 주제와 소재를 가리지 않고 블로그에 마구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왜 이토록 블로그에 열을 올리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가족이 잠든 밤 시간에 컴퓨터에 글을 올리는 내 자신에게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칭얼거리고 응석을 부리고 그들의 ‘우쭈쭈’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어떤 글감을 만나면 지체하지 않고 블로그에 올려서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내 모습에 아연실색했습니다. 문장을 가만히 머금고서 전후 맥락을 이어가고 깊이를 더하도록 다듬어야 하지만 블로그 포스팅은 순간의 감흥에 젖어 한풀이하듯 올리면 그것으로 끝! 날 좀 알아달라는 투정, 이웃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성마름, ‘나 이런 사람이다’라는 은근한 자기과시….
이런 일이 이어지다보니 홀로 풍경을 바라보아도 블로그에 올릴 내용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조용히 적막을 즐길 곳에 머물러도 이런 내 모습과 심정을 사람들에게 이러저러하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요? 생전 보도듣도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내가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 정작 내 가족에게는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면서, 또 그럴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왜 바깥세상을 향해 끝없이 내게 공감해달라고 칭얼거리는 것일까요?
이런 의문이 들면서 블로그를 향한 내 충성도가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 관심사인 책과 불교에 대한 글 말고는 소소한 일상의 기록을 올리는 일이 점점 뜸해졌습니다.
SNS 늪에 빠진 사람들
사설이 길었습니다. 하지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블로그 사랑은 그래도 양반입니다. 주변에는 SNS에 빠져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의 장면부터 먹은 음식, 입은 옷, 심지어 자기 집의 온갖 광경들을 사진 찍어 올립니다. 또는 남의 SNS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친구도 없고, 인심도 흉흉해서 세상과 소통하기를 포기하거나 기대를 반 접어버렸다는 사람들도 홀로 늦은 밤, 몇 시간을 SNS에 빠져서 지냅니다. 문을 닫고 들어앉은 자기만의 공간 속에서도 세상을 향해 쉬지 않고 접속합니다. 그러면서 외롭다고 합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암만 생각해도 두렵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엇이 두렵냐고요? 혼자라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남들은 무엇을 하며 살까, 남들도 나처럼 지낼까, 나는 남들만큼 사는 것일까. 내 인생의 기준이 내게 있지 않고 바깥에 있기 때문에 행여 그 기준을 채우지 못했을 자신이 속상하고, 이런 속상한 자신을 어떻게든 포장해서 바깥에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익명의 사람들이 24시간 날 훔쳐보는데 일단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홀로입니다.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홀로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하고, 홀로 책임을 지고 감내해야 하고, 홀로 늙어가야 하고, 홀로 병들고, 그러다 홀로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내려갑니다. 그렇게 홀로인 것이 외롭고 힘겨워 친구를 찾고 배우자를 찾고 가정을 이루고 돈을 모으고 업적을 쌓지만 끝내는 홀로입니다. 그걸 찌르르하게 절감하면 외롭다는 생각이 엄습해도 거뜬합니다. 인생은 외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인생입니다. 아, 이렇게 해서 숫타니파타의 저 명문장이 등장합니다.
홀로 부처이신 연각불
모든 경전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됐다고 하는 숫타니파타에는 참으로 감동적인 싯구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단연 압권이랄 수 있는 것이 바로 ‘무소의 뿔 경’입니다. 무소의 뿔이란 단어에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코뿔소의 외뿔이란 뜻으로 친근합니다. 이 경은 41개의 시로 이뤄져 있는데 그중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혼자서 가라고 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가 나오게 된 배경에는 아난다 존자가 연각불에 대해 질문을 하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대답을 하는 형식이 있음을 기억하면 좋습니다.
연각불도 ‘불’ 즉 우리가 아는 부처(佛)가 맞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가리킬 때는 ‘위없는 바르고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자(無上正等覺者)’라고 하는데, 연각불은 이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은 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연각불이나 같지만, 이후의 행적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나눠주려고 남은 생애를 중생 속에서 보낸 분이지만 연각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홀로 깨달음을 이루고(연기법 하나를 깨달았다는 뜻도 있습니다만) 깨달음의 경지에 홀로 머물다가 삶을 마친 부처입니다.
그러니 그토록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홀로 부처’라 해도 좋을 연각불의 경지를 들려주는 것이라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부처님 없는 세상에 태어나 홀로 수행하느라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요? 그러니 자신과 함께 수행의 길을 걸어갈 친구를 찾았을 테고, 세속의 삶이 그리울 때도 간혹 있었을 테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덧없음을 뼈저리게 깨닫고서 홀로 수행자로 살아가다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혼자서 가라, SNS를 끄고
누군가가 곁에 있어서 함께 하면 좋겠지만 그런 친구가 생기고 교제가 생기다보면 정작 애초의 목표보다 그 사람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 집착으로 인해 괴로움이 반복되니 이런 일을 잘 살펴서 꿋꿋하게 자신의 목표를 향해 홀로 가기를 권합니다.
“교제가 있으면 애착이 생기고/애착을 따라 이러한 괴로움이 생기니/애착에서 생겨나는 위험을 살펴/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2번째 게송)
좋은 벗을 사귀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런 행운을 얻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나보다 인격적으로 훌륭하거나 하다못해 엇비슷한 사람을 ‘벗’이라 합니다. 이런 벗을 사귀어야 내가 성숙할 수 있는데 행여 만나지 못했거든 차라리 홀가분하게 여기며 혼자서 마음공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친구를 얻은 행복을 기린다./훌륭하거나 비슷한 친구를 사귀되/이런 벗을 만나지 못하면 허물없음을 즐기며/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3번째 게송)
일상에서 늘 스스로를 잘 지키고 보듬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곁눈질하게 되고 괜한 망상에 휩쓸립니다. 곁눈질한다는 것은 자기 삶을 누군가에게 기대려는 마음입니다. 일상의 매 순간 자신을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두 눈을 아래로 하여 새기며 경솔하게 걷지 말고/감각기관을 지키고 정신을 수호하며/번뇌로 넘치게 하거나 번뇌에 불타지도 말고/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29번째 게송)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고, 탐욕스런 세상에 머물러도 그에 물들지 않고 인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물에 때 묻지 않는 연꽃같이/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37번째 게송)
혼자 있으면 외롭습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결코 부정적인 느낌인 것만은 아닙니다. 어쩌면 나 자신과 온전하게 마주하는 시간일 수도 있지요. 그럴 때 내가 보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고 싶으며,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 그 사이에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알게 됩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아니면 절대로 나는 나를 알지 못하니 지금 당장 휴대폰을 끄고 혼자 있어 보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