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미디어 인 붓다] 48. 웹툰·창극·드라마 〈정년이〉

여성국극에 담긴 ‘평등’이란 화두 

2019~2022년 네이버서 연재된 웹툰 〈정년이〉
한국전쟁 직후 여성국극단 배경으로 서사 전개
“여성서사 새 지평 평가”…창극·드라마화 인기

2023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창극 〈정년이〉의 공연 모습. 사진출처=국립극장 페이스북
2023년 국립극장에서 열린 창극 〈정년이〉의 공연 모습. 사진출처=국립극장 페이스북

12대 전국비구니 회장을 역임한 본각 스님은 ‘여성 수행의 의미와 가치’라는 논문에서 “석가모니에 의해 불교 교단이 만들어진 기원전 4세기경의 초기 불교에서는 남성과 동등하게 출가하는 여성 수행자가 있었고, 교단 내에서도 그 사람의 과거나 사회적 계층을 전혀 묻지 않고 남자 수행자와 평등하게 비구니로 자격을 부여했다”고 밝혔다. 당시 사회적으로 성차별과 신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교 수행에는 남녀가 평등했다는 것이다.

영화 〈서편제〉에는 소리꾼 송화가 아버지와 장터를 지나갈 때 국극단이 공연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새로운 장르인 국극이 대중적 인기를 얻는 시대가 되었는데도 오랜 전통인 판소리만 고집하며 자식을 닦아세우는 소리꾼 아버지 때문에 외롭고 힘든 소리 길을 떠도는 송화의 고단함과 전통이 외면 받는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렇다. ‘국극’이라는 이름만 보면 아주 오래된 전통문화일 것 같지만 사실 국극도 새로운 장르였던 시절이 있었다. 국극 가운데도 ‘여성국극’이 따로 있었고, 그 여성국극도 쇠락해서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나 했는데 여성국극이 몇 년 전부터 대중문화에 돌풍을 다시 일으키고 있다. 실재하는 국극단과 살아있는 국극 연희자들이 보여주는 공연 무대를 통해서가 아니라 포털 사이트 연재된 웹툰 한 편에서 시작된 바람은 이제 동시대 대표적 문화 현상이 되고 있다. 해당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정년이〉 방송을 앞두고 제작사와 공중파 방송국 사이에서 소송 문제가 불거질 정도다.

‘정년이’는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서울의 여성국극단을 배경으로 한 웹툰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창극 배우가 되고 싶은 목포 소녀 정년이와 선후배 동료 소리꾼들의 열망과 경쟁, 도전과 성취, 갈등과 우정을 담은 웹툰 〈정년이〉는 2019년 4월부터 2022년 5월까지 3년에 걸쳐 네이버에서 연재되는 동안 “여성 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연재 시작 이듬해에 ‘2020년 올해의 양성평등 문화콘텐츠상’을 수상하며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은 것은 〈정년이〉라는 인물과 서사, 재현 방식이 현실 사회 안에 바람직한 젠더 가치관을 펼쳐낸 공이 크다는 공적 지표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울림을 만들어내는데 재미도 있으니 팬덤이 커지면서, 지난해에는 국립창극단 최초로 웹툰을 원작으로 한 창작극으로 무대에 올랐고, 드라마로도 각색돼 10월 12일 첫 방영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만화’를 지자체의 대표 콘텐츠로 삼은 부천시에서 오는 10월 3일부터 6일까지 부천 한국만화박물관 일대에서 열리는 올해 만화축제의 공식 포스터 주인공도 ‘2024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정년이’다. 

지자체가 지원하는 축제는 지역민들이 문화를 즐기는 자리이기도 하면서, 그 문화행사를 통해 지역의 경제와 산업을 홍보하고 성장시키려는 의미도 크다. ‘만화! 더 큰 만남(Manhwa! Wide Open)’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만화와 웹툰이 영화, 드라마, 게임, AI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면서 더 많은 산업과의 만남으로 미래로 가는 길을 열어주기를 바라는 지자체의 바람을 담은 주인공에 ‘정년이’를 내세운 것이다. 이 정도면 신드롬이다.

〈정년이〉의 인물들은 ‘소리’를 하지만 웹툰에서 그 소리는 말풍선 속 텍스트와 프레임 속 캐릭터의 표정을 통해 상상만 가능했다. 그런데 여태 동서양 고전이나 전통 판소리를 원작으로 한 작품을 올리던 국립창극단이 아예 웹툰에는 없던 소리를 직접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화제도, 흥행도 보증하는 국립창극단에서 〈정년이〉를 2023년 첫 작품으로 올리면서 웹툰을 모르던 창극 팬덤에 원작 웹툰의 애독자 팬덤이 몰리면서 창극 〈정년이〉는 순식간에 전회 매진되어 예정에 없던 추가 공연까지 이루어졌다.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려는 욕망에 온 존재를 걸고 서로 경쟁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서로 응원과 연대를 나누는 〈정년이〉의 서사와 캐릭터들은 여성의 성장 서사를 다루면서도 ‘여성의 적은 여성’이 되도록 만드는 비열한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하다. 

그동안 국립창극단과 창극 〈홍보씨〉 〈패왕별희〉 〈나무, 물고기, 달〉 등을 함께 한 이자람 감독이 “만화를 볼 때 독자들의 상상력이 발휘되듯, 판소리도 관객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이라며 재미있게 작업했고, 관객이 호응해 전회 매진되었다고 해도 공연 무대는 많은 대중들에게는 멀다. 시간도 공간도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김태리, 문소리, 신예은 등 당대 인기 여성 연기자들을 캐스팅한 드라마로 펼쳐지게 되었다. 

여성국극의 역사는 다른 전통 예술에 비해 굵고 짧았다. 원래 소리꾼 하나가 고수의 북과 추임새만 곁들여 1인극으로 펼쳐내던 판소리가 여러 창자들로 배역을 나누어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기존의 판소리를 분창(分唱)하는 형식인 창극이 등장한 것이 20세기 초반부터였고, 그 창극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새로운 매체인 영화와 경합하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국악원에서 소리를 하던 ‘여성국악동호회’가 1948년에 따로 여성만 출연하는 창극을 공연하면서 시작했으니 전통 문화라고 하기보다는 당대 여성들의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였던 것이다.

소리 중심이었던 기존의 창극과 달리, 소리와 춤과 연기가 어우러진 여성국극은 한참 전쟁 중이던 시기인 1950년에 임시수도 부산의 부산극장을 중심으로 공연이 이루어졌다. 전쟁 중에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나 1960년대이후로 쇠퇴하고, 처음 여성국극을 시작했던 주역들은 대부분원래 시작한 자리였던 국악계로 돌아가면서 한 시대를 반짝 풍미했던 독특한 과거의 유산 정도로 여겨졌다. 

젊은 남성들은 죄다 전선에 있어야하던 시기에 무대 장치, 의상, 분장, 조명과 같은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소리와 춤, 연기가 어우러진 무대를 만든 여성들의 무대는 각별했을 것이다. 그리스 고전극이나 중국의 경극에서는 남성이 여성 역할을 하는 것과는 달리 여성국극은 남장 배우가 남성 역할을 맡았다. 이 남장 배우의 존재가 인기의 한 동력이기도 했다.

당시 남자 주인공 역의 임춘앵, 조금앵, 김경애, 박보아, 김정희, 김경수 등은 요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남자 악역, 남자 희극까지 다 전문 분야가 따로 있었다. 이들 여성국극 스타들이 1962년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에 이어 국립극장 산하 전속단체의 하나로 현재 국립창극단의 전신인 국립국극단이 창설될 때 주축이 되면서 ‘여성’만의 국극은 쇠락하게 되었다. 

웹툰 〈정년이〉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하면서도 배경이 되는 시기를1956년으로 한 것은 막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시점이다. 국악계에 연줄 하나 없고 스승도 없는 흙수저 윤정년이 재능과 열정만 품고도 국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대적 쇠락이 벌려놓은 틈새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 〈정년이〉에서는 웹툰 작가가 주인공 정년이의 모델로 참조했다던 영화〈아가씨〉의김태리배우가 정년이 역할을 맡았다는 인연도 재밌지만, 대중문화가 여성혐오와 여성의 성적대상화 양극단를 쏟아내는 이 시대에 ‘정년이’라는 캐릭터가 이처럼 하나의 신드롬이 되는 것도 재미있다. 이 관심의 바탕은 젠더 평등과 연대가 이 시대에 간절한 화두이기 때문일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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