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미 넘치는 통일신라 석불·석탑
금오봉 내려가면 세상 굽어보는 석탑 만나
남산을 기단으로 만든 삼층석탑 위용 ‘감동’
매번 절을 올리며 ‘불도를 이루리라’ 기원
석탑 옆 계단 따라가면 만나는 마애여래상
힘 있는 부처님 얼굴, 근엄한 자태에 숙연
경주 남산을 대표하는 한 곳을 꼽으라면 세 가지 경이로움을 품은 ‘용장사지’다.
불국정토를 대표하는 경주 남산에서 꼭 참배하길 권하는 최고의 불교문화유산이 있다. 금오봉 정상에서 서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좌상 그리고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용장사지다. 남산 등산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곳 용장사지에 온다면 탑과 불상과 풍경의 경이로움과 환희로움에 피곤이 사라질 것이다. 이곳을 참배한다면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자리에 앉아 잠시 명상에 들어야 한다. 경주 남산 불국정토의 모든 기운이 가슴 안에 꽉 찰 것이다. 또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내려오다 보면 여러분은 소원 하나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란 확신이 들것이다. 부처님 가피의 힘이 무량할 것이란 확신을 들게 하는, 남산이 받침 기단인 세계에서 가장 큰 삼층석탑과 듬직한 마애여래좌상과 경이로운 석조여래좌상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소원성취를 이루고 싶은 불자는 용장사지 삼층석탑과 두 불상은 꼭 참배하길 바란다.
한국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멋진 석탑을 꼽으라면 불국사 다보탑이나 석가탑이 꼽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독창적이고 멋진 석탑을 꼽으라면 용장사지 삼층석탑을 꼽을 것이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독창적인 석불을 뽑으라면 당연히 이곳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을 꼽을 것이다. 산을 기단으로 중생계를 내려다보는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둥근 세 개의 단과 좌대 위에 연화 좌대가 있고 가사를 깔고 앉은 석조여래좌상은, 중국이나 일본 아니 그 어느 불교국가를 가더라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전 세계 유일한 석탑과 석불이다.
한국의 불교 유형문화유산 중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불교 문화유산은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에 조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이 시기 조성된 독창적 문화유산 둘을 소개하자면 먼저 한국의 가장 독창적인 사리탑인 구례 지리산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 네 마리 사자가 석탑을 받치고 중앙에는 불보살이 있으며 그 앞에는 공양인물상이 석등을 이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8세기 중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사리탑이다. 다음으로 여래의 머리에 지권인을 한 화엄의 본존불상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200~300년은 앞서서 조성된 독창적 불상이다. 지권인을 한 화엄의 비로자나불상은 신라인이 조성한 독창적 불상이다. 이처럼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불교 문화유산을 조성하고 있다.
이제 용장사지로 가보자. 남산 정상 금오봉에서 용장사지 쪽으로 가다 보면 미끄럽고 조심을 요구하는 내리막길이 나온다. 조심조심 온몸을 산에 기대며 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나 다들 감탄의 외침을 하게 된다. 남산을 기단으로 저 밑 중생계를 굽어 살피는 웅장한 삼층석탑이 모두를 반기고 있기 때문이다. 용장사곡 삼층석탑은 높이 4.5m로 해발 400m의 금오산 정상 부근에 세워져 있다. 8~9세기 중반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용장사곡 삼층석탑은 1922년에 무너져 방치된 것을, 지금의 원래 자리에 복원하였다. 이후 도굴 시도로 2001년 상층의 기단이 피해를 보아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일제강점기 작성된 도면을 보면 2층 몸돌 윗면에 길이 15.2cm, 깊이 13.1cm의 방형 사리공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용장사곡 삼층석탑은 경주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서 있는 석탑으로 일명 세상에서 가장 큰 석탑이라 불린다. 기단을 산으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신라의 석탑은 삼층석탑이 대표하는데 각 층의 탑신인 몸돌 밑 기단은 보통 이중 기단의 형식을 취한다. 용장사곡 삼층석탑의 1층 기단은 경주 남산을 기단으로 서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 불리는 것이다. 참배할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이곳에 어떻게 이런 웅장한 석탑을 조성했을까’하는 놀라움이 든다. 주위에 있는 바위를 다듬어서 조성하였을 것인데, 남산 정상에서 생활하며 석탑을 조성한 석공은 그 정성으로 정토에 가는 수기를 미륵부처님께 받았을 것이다. 나는 올 때마다 석탑 기단 바위에 머리를 조아리고 미륵부처님께 기원을 올린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다음으로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1.6m 정도이며 용장사곡 삼층석탑 옆으로 난 데크 계단을 내려오면 오른쪽 옆 바위의 뒤쪽에 새겨져 있다. 부처님 두상의 나발이 남산의 다른 불상보다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며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옷은 두 어깨를 감싼 통견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연화 좌대 위에 앉아 있다. 용장골을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은 턱에 군살의 주름을 표시했고, 전반적으로 둥그스름해 풍만한 분위기를 보인다. 꽉 다문 입술과 큰 코, 힘 있는 얼굴에서 근엄한 분위기가 풍긴다.
옷 주름이 형식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삼륜 석조여래좌상보다는 조성 시기가 뒤로 가는 9세기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왼쪽 어깨 옆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던 흔적이 보이는데, ‘太平二年八月…’로 확인되었다. 태평 2년은 중국 송나라 태종의 연호로 보면 977년이 되고, 요나라 성종의 연호인 태평이면 1022년이 된다. 다른 명문은 너무 닳아 있어서 판독하지 못하여 연도가 명확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통일신라시대 8~9세기 조성된 용장사지의 불상에 고려 초기 명문이 새겨진 이유가 무엇일까?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의 양식은 고려 초기의 양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용장사지의 삼층석탑과 석조여래좌상은 분명 8~9세기 조성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런데 왜 명문에 태평 2년이 새겨진 것일까?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구층석탑의 명문을 보면서 이러한 해석을 해본다.
월악산 송계계곡 길을 쭉 올라가면 사자빈신사지의 사사자구층석탑이 있다. 이 탑의 기단에는 고려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원적(怨敵)인 요나라가 사라지길 기원하며 태평 2년 4월에 석탑을 조성하여 기록한다는 명문이 있다. 고려 현종과 강감찬은 1019년 귀주에서 요나라의 대군을 물리친다. 고려가 명운을 걸고 싸운 여요전쟁(麗遼戰爭)을 마무리하는 승리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후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렇기에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이 원적을 물리치길 기원하며 조성한 것처럼, 1022년 사자빈신사에 구층의 석탑을 세운 것이다. 그러면서 1022년 경주 남산 불국정토의 최고 사찰인 용장사의 마애여래좌상에도 이와 같은 기원의 명문을 새긴 것은 아닐까 싶다. 비약이 심한 이야기지만, 문헌 자료가 정확하지 않은 옛 유적의 해석은 개인의 몫이니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은 마애여래좌상에서 고개를 돌리면 서 있다. 석불좌상의 총 높이는 3.4m로 대좌는 2m이고 불상은 1.4m이다. 석조여래좌상의 세 개의 둥근 연화문 좌대와 둥근 받침은 유례가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불두는 오래전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대 발견 당시 사진에는 이미 불두는 사라진 것으로 확인된다.
1924년 조선총독부에서 쓰러져 있던 불상과 삼륜 좌대를 세웠으나 다시 무너져서 1932년 무렵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삼국유사〉에 용장사의 대현이 미륵불을 돌면서 수행했다는 이야기에서 불상은 미륵불상으로 보인다. 또한 도상을 분석하여 ‘승형석불상’이나 ‘보살형미륵상’이라는 등 여러 의견이 있다.
유가종(瑜伽宗)의 개조 대현대덕은 남산의 용장사에 살고 있었다. 그 절에는 미륵불의 석조 장륙상이 있었는데 대현이 늘 불상의 주위를 돌면 불상도 또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
-〈삼국유사〉 中
옷 주름이 사실적으로 조각된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에는 한국 석불상에서 보기 힘든 모습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삼릉곡 석조여래좌상에서 보이는 것 같은 매듭 장식의 술이 무릎에 늘어뜨려 있다. 가사는 사각의 천을 왼쪽 어깨에 고정해 두르게 되어 있다.
현대의 한국스님들의 가사는 왼쪽 어깨 부분에 고리가 있어 끼우게 되어 있는데, 용장곡과 삼릉곡 불상의 가사는 매듭을 지어서 고정하고 늘어뜨린 끝에는 술로 마감을 한 모습이다. 여기에서만 보이는 참으로 고급스러운 가사의 고정장치다.
두 번째는 삼륜의 기단이다. 커다란 바위 받침 기단 위에 복련의 좌대 같은 다듬은 문양을 새겨놓고, 그 위에 고복형 석등의 둥근 북 같은 기단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1단의 좌대와 다시 북 모양의 기단과 좌대와 기단 그리고 앙련의 연꽃 문양이 선명한 좌대가 올려져 있다.
세 번째로 삼륜 기단과 좌대 위에는 삼단 문양의 앙련의 연꽃 좌대가 올려져 있는데, 삼단의 연화 좌대에 가사를 깔고 불상이 모셔져 있다. 아주 독특한 삼륜의 좌대와 그 위에 가사를 깔고 있는 삼단의 연화 좌대 위에 미륵불상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불상의 앞에서만 본다면 가사 좌대만 보여 알 수 없다. 불상의 옆에서 보면 앞쪽에는 가사가 늘어져 있고 뒤에는 삼단의 연꽃 좌대를 볼 수 있다. 꼭 옆으로 가서 살펴보기를 바란다. 이러한 불상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라만의 불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