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사회에 나눠야 진짜배기 불교입니다”
불교 궁극적 목적은 ‘중생구제’
그 구체적 실천행이 ‘사회복지’
‘직업 승려’ 비판, 부끄러운 일
보살행 실천하는 수행자가 돼야
불공, 전각서 목탁 치는게 아냐
중생 행복케 하는 게 곧 ‘불공’
깨달음, 중생에 회향돼야 의미
“사회복지가 바로 불공의 실천”
목포와 불교는 다소 어색하다. 큰 사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역 불심(佛心)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도 듣기 쉽지 않다. 그래도 부처님 법을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대중들은 많다.
폭우와 폭염이 반복되던 여름날, 목포행 기차에 올랐다. 목포와 호남불교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도착한 곳은 목포의 심장 유달산. 목포의 다른 이름이자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목포의 역사, 호남의 문화와 함께해 온 곳이 바로 유달산이다. 산의 크기는 다르지만 목포를 호령하는 기세는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그것 못지않다. 유달산 조각공원과 달성공원을 거쳐 달성사로 향했다. 달성사는 목포팔경(木浦八景) 중 제8경 ‘달사모종(達寺暮鍾)’ 즉, 달성사의 종소리를 간직한 사찰이기도 하다.
성곽처럼 솟아 있는 입구를 지나 들어가니 아담한 절이 나온다. 극락보전과 명부전, 종각, 종무소 등의 전각 몇 채와 석탑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달성사에서 목포 시내와 바다를 눈에 담고 잠시 마음을 고른 뒤 주지실의 문을 두드렸다. 큰 키와 호탕한 웃음을 장착한 보각 스님이 반갑게 손을 내밀어 준다.
부처님, 대흥사, 달성사
“달성사는 대흥사에 계시던 선대스님들이 목포의 불교를 지키기 위해 전략적으로 창건한 사찰입니다. 극락보전 부처님은 강진 백련사, 법당 종은 대흥사 만일암, 지장보살은 나주 운흥사에서 모셔왔어요. 대흥사 차원의 지원과 노대련 선사의 원력으로 태어난 곳이 바로 달성사입니다.”
보각 스님은 2022년 가을부터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중앙승가대에서 평생 후학들을 가르친 뒤 강진 백련사 주지 소임을 거쳐 계속해서 포교와 전법에 진력 중이다.
달성사에서 스님은 매월 초하루와 초삼일에 법회를 열어 불자들을 만나고 매주 화요일 저녁에는 목포불교대학에서 강의한다. 또 매월 세 번째 목요일에는 목포교도소에서, 매월 두 번째 금요일에는 화성교도소에서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스님들의 기본 임무잖아요. 그래도 제가 잘하는 것이 포교이니 인연 따라 불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은사스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것도 전법이었습니다. ”
스님의 출가본사는 대흥사다. 현대 호남불교의 중흥조로 존경받는 천운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했다. 스님의 출가는 어쩌면 필연이었던 것 같다.
“저는 태몽부터 남달랐습니다. 하하. 어느 날 가사장삼을 수한 노스님이 산에서 내려와 바랑을 열어 큰 목탁을 꺼내 주셔서 어머님이 그것을 받아 가슴에 안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태어났다고 해요. 제가 초등학생일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가시는데 지역에서 유명한 무당이 어머님 앞으로 와 ‘향냄새가 지독하게 난다. 향내 나는 아들이 있네’라고 했답니다. 그 무당이 저의 출가를 예언한 셈이죠.”
스님은 7남 1녀 중 여섯째다.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절에 자주 다녔다. 어머니의 지극한 기도를 보며 자연스럽게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이웃을 잘 돌볼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중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광주로 나갔습니다. 그때 너무 추워서 어머니가 당신이 입으시던 빨간 내복을 빨아서 저한테 주셨어요. 광주 시내 구경을 하면서 버스에 앉아 있었는데 거지 아줌마가 어린애를 업고 차에 오릅니다. 어머님이 그들을 보시더니 ‘얼른 내복 벗어라’고 하세요. 어머님의 눈빛을 보고 저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었어요. 버스에 있던 어른들이 저를 보며 ‘착한 놈이네’라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어머님은 어려운 사람들이 집에 오면 꼭 상을 차려 주셨어요. 반찬이 하나일지라도 꼭 상으로 주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셨습니다.”
스님의 성장 과정에서 어머니는 그야말로 부처님이었다.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슴에 새기고 새겼다.
보각 스님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영암 망월사로 가 출가를 했다. 나중에 사형(師兄)이 된 망월사의 스님들이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추천했다. 그래서 광주 향림사에서 수행자의 길을 시작했다.
“어머님께서는 제가 계(戒)를 받을 때 직접 가사장삼을 해주셨습니다. 어찌나 정성을 들여 만들어 오셨는지 참 정갈했습니다. 출가하고 한참 뒤에 속가 집에 갔더니 유학(儒學)을 공부하셨던 아버님이 유언처럼 한 말씀 하셨습니다. ‘불도(佛道)도 도(道)이고 네가 좋아서 출가했으니 반대는 안 한다. 다만 중도 속인도 아닌 것처럼 어정쩡하게 살지 말라’고 말입니다. 아버님의 당부가 저에게는 큰 힘이자 숙제가 되었습니다.”
보각 스님은 계(戒)를 받은 후 대흥사 동국선원에서 정진했다. 안거가 끝날 때쯤 대학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스승의 허락을 받고 세속의 책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출가 전부터 경영학에 관심이 많아서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불교학을 공부했으면 큰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일반대학의 경영학과에 가다 보니 경제적 어려움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사찰에서 부전 소임을 보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래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복학하려는데 일이 생겼어요. 제적처리가 돼 있었습니다. 경영학과에 결원이 없어 사회복지학과 2학년으로 재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역경’이 제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처님은 최초의 불교사회복지사”
스님은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해 사회복지학 공부를 이어나갔다. 사회복지 공부가 경영학만큼 재밌었다. 대학원에 입학해서도 아르바이트는 멈추지 않았다. 새벽에 기도를 하고 낮에는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는 다시 기도를 하는 생활이 반복됐다.
스님이 석사과정을 마치고 난 뒤 종단에는 큰일이 생겼다. 바로 10·27 법난이 일어난 것이다. 법난을 수습하면서 중앙승가대에는 사회복지학과가 신설됐다. 당시 학인스님들을 가르치던 호진 스님과의 인연으로 스님은 중앙숭가대에서 본격적으로 후학양성을 시작했다.
1985년 3월 수행관장 겸 사회복지학과 강사로 중앙승가대와 인연을 맺은 스님은 2년 뒤 전임강사가 되었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학인들에게 항상 강조했던 것이 남의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눈물 한 방울 부조하고 보시할 줄 모른다면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회복지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 중앙승가대 사회복지학과에서 공부한 스님은 1000명이 넘는다. 현재 불교사회복지시설을 책임지고 있는 시설장 스님의 60% 이상이 보각 스님의 제자들이다.
“제자들에게는 사회복지도 수행의 일환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직업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수행자입니다. 언젠가부터 ‘직업 승려’, ‘직업 수좌’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정말로 부끄럽고 부끄러운 표현입니다. 보살행을 실천한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수행자로서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는 당부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결국 사회복지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45년간 중생을 교화하셨습니다. 중생교화의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 사회복지입니다. 부처님께서 평생 보여주신 행보가 결국은 사회복지입니다. 그래서 불교와 사회복지를 따로 생각하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시대에 부처님이 계신다면 아마 사회복지사의 모습으로 출현하셨을 것입니다. 불교를 비롯한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중생구제입니다. 그 구체적 실천이 사회복지라고 생각합니다.”
보각 스님은 불교사회복지가 보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용수 보살이 〈대지도론〉에서 자비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자(慈)’를 ‘여락(與樂)’ 즉,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라 하고, ‘비(悲)’는 ‘발고(拔苦)’ 즉,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자비가 실천되지 않으면 무자비해집니다. 달라이라마 스님도 ‘나의 종교는 친절이다’고 하잖아요. 세월이 갈수록 남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는 자비에 대한 실천의지가 부족해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스님은 ‘불공’의 의미를 되새기며, 불공이 사회 속에 이뤄지도록 해야 함을 힘줘 말했다.
“불공(佛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각 안에서 목탁만 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공이 사회 속에서 이뤄지게 해야 합니다. 중생에게 친절을 베풀고 중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불공’입니다. 사회복지는 곧 불공의 실천입니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깨달음이라는 것도 중생 속에서 실천되고 회향되어야 진짜 의미가 있습니다. 깨달으면 불교가 완성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 뿐이에요. 깨달음을 사회에 나눠야 진짜 불교입니다. 저는 이러한 개념들을 명확히 하고 현장에서의 복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스님의 연구와 후학양성은 연구실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사회적 실천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은 것이다.
보각 스님은 2016년 4월에 인도 쉬라바스티에 ‘보광학교’를 건립했다. ‘보’는 스님의 법명에서, ‘광’은 어머니의 법명 광대행(光大行)에서 따왔다. 지상 2층짜리 건물 2개 동에는 20명의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실 12칸과 교무실, 화장실 등이 들어섰다. 학생 1명당 1대씩 사용할 수 있도록 컴퓨터 20대와 대형스크린을 갖춘 시청각실도 갖췄다. 학교 건립 기금 전액을 보시했던 스님은 지금도 해마다 6000달러 이상의 장학금을 보내고 있다.
보각 스님이 30년 동안 불교계 안팎에 기부한 금액만 30여 억원에 이른다. 법문 잘하는 스님으로 유명해 어느 해 부처님오신날엔 퀵 오토바이를 타고 옮겨 다니며 하루에 7번 법문한 적도 있다. 법문 사례금과 교수 월급, 원고료를 모두 저축해 보시한 것이다.
현장에도 뛰어들었다. 한때 물의를 빚은 소쩍새마을을 인수해 정상화 시켰고 2004년부터는 경기 화성의 사회복지법인 자제공덕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노인요양시설(묘희원 · 상락원)과 중증장애인 시설(불이원) 등에서 270여 명을 돌보고 있다.
“마음 밭 가꾸는 농사꾼이 됩시다”
마음 밭에 씨앗 뿌려 농사 지어
열매를 먹는 것이 바로 마음공부
“法의 맛은 맛 중의 맛임을 알라”
“밥 먹는 시간보다는 더 수행을”
보각 스님은 수행자로서도 모범적으로 살아왔다. 매일 일과(日課)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좌우명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아함경〉에 보면 ‘몸뚱이는 음식을 먹고 살고 마음은 기도를 먹고 산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 좌우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적어도 하루 세끼 밥 먹는 시간 이상은 기도해야 수행자라고 봅니다. 말로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자가 아닙니다.”
자제공덕회 이사장을 맡으면서는 〈법화경〉 사경을 시작했다. 그간 쓴 사경집만 벌써 206권에 달한다.
“주옥같은 부처님 말씀을 따라 적으며 공부하고 또 공부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사경도 같이 합니다. 몇 년 전 서울 동산불교대학에 강의하러 갔더니 ‘나무아미타불’ 10만 8천 번 사경이 졸업 과제라고 합니다. 저는 108만 번을 쓰자고 생각하고 하루에 108번을 4번씩 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25만 번 정도 썼습니다. 이와 함께 매일 108배를 하고 〈금강경〉을 1독 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불자들에게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불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경전만 봐서는 불자가 아닙니다. 박제된 불교, 절에 머무는 불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능엄경〉에도 ‘부처님 가르침을 날마다 배우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진짜 불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수행을 하면서 사회와 이웃을 위해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심전경작(心田耕作)’을 강조했다.
“부처님께서 아침 일찍 가사를 입으시고 탁발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때 한 농부가 부처님께 얘기합니다. ‘나는 손수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가꾸어 곡식을 거둬들인 다음에야 음식을 먹습니다. 당신도 밭을 가십시오. 그리고 씨를 뿌리십시오. 갈고 뿌린 다음에야 드십시오. 그게 맞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정성껏 기르고 수확한 다음에 먹습니다. 나에게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입니다. 지혜는 쟁기와 호미이며 부끄러움은 호미자루, 의지는 쟁기를 매는 줄, 생각은 내 호미날과 작대기입니다. 항상 몸을 근신하고 말을 조심하며, 음식을 절제하여 과식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실을 김매는 것으로 삼고 있습니다. 노력은 내 황소와 같아 나를 안온의 경지로 실어다 줍니다. 물러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곳에 이르면 근심걱정이 없습니다. 이 밭갈이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고 감로의 과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마음의 밭에 씨앗을 뿌려 농사를 지어 그 열매를 먹는 것이 바로 마음공부, 마음수행입니다. 지금부터 좋은 씨앗을 뿌려 열심히 농사를 지어 봅시다.”
스님의 법문은 계속됐다. 특유의 입담으로 평소 좋아하는 구절을 곁들어 설명을 이어갔다. 스님은 〈법화경〉의 “자비로움을 집으로 삼고 인내를 옷으로 삼으라”는 구절을 소개했다.
“〈법화경〉 ‘법사품’에 나오는 말씀으로 ‘자실인의(慈室忍衣)’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자비로 집을 삼고 인내로 옷을 삼으라는 뜻이죠. 자비와 인내만 있으면 세상 속에서 너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툴 일이 절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게 된 것은 존경하는 석주 큰스님을 만나면서입니다. 평생 부처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진력하셨던 큰스님은 항상 하심(下心)으로 대중들을 대하셨습니다. 손자, 증손자뻘 사람들이 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스스로 낮추는 큰스님의 모습은 항상 아름다웠고, 저에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큰스님께서는 항상 ‘자실인의’를 강조하셨습니다. 자비에는 적이 없고, 인내를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스님은 석주 스님이 손수 써준 글씨를 보여주며 경전 구절을 하나 더 소개했다. 〈법구경〉에 나오는 “법(法)의 보시는 보시 중 으뜸이고, 법(法)의 맛은 맛 중의 맛이다. 법(法)의 즐거움은 즐거움 중에 으뜸이고 욕망의 소멸은 모든 괴로움을 이긴다”는 말씀이다.
“성철 스님께서는 진리, 법(法)이 다른 곳에 있다면 출가하지 않고 그리로 갔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법(法)을 불교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부처님 가르침이 곧 법이고 진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법을 나누는 것이 제일 큰 보시이자 공덕입니다.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법의 참맛을 알게 해주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혼자만 아는 법, 혼자는 느끼는 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와 우리,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법을 알고 실천할 때 불국토(佛國土)를 만들 수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믿고 공부하고 정진할 때 모든 욕망은 소멸할 것이며 열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보각 스님과의 인터뷰는 유쾌했다. 두 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마치고 스님은 바랑을 챙겼다. 화성으로 간다고 했다. 대중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즐겁고 신난다는 보각 스님의 여정에 꽃길만 가득하기를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