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언제나 사람과 만났다
붓다가 만난 사람 중엔 진상 많아
오후불식 안하겠다는 두 제자에겐
자기경험 통해 수행자 자세 일깨워
긴 법문 음미하는 게 니까야 매력
세상에 널린 진상 중생
경전을 읽다보면 항상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부처님의 법문 스타일이 묻고 대답하기, 즉 ‘문답’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긴 법문이 이어지기 때문에 제자들은 일방적으로 듣고 있어야 하지만, 그러기까지 부처님은 당신을 찾아온 사람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 말은, 경전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늘 거룩한 신심으로 다가와서 엎드려 가르침을 받들어 모시는 제자와 신자들만 있지는 않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엉뚱한 행동을 하거나 자기 생각을 부처님 말씀이라 우겨대거나 난 죽어도 부처님 말씀을 따르지 않을 거라는 제자도 있고, 자기 궁금증을 늘어놓고는 어서 빨리 대답하라고 다그치며 대답해주지 않으면 제자노릇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지요.
온갖 진상을 부리는 손님들이 있어서 자영업자들이 속을 끓이는 뉴스를 볼 때마다 2600여 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이 떠오릅니다. 경전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은 진상 중생이거든요. 하지만 진상 손님들 때문에 마음을 다쳐서 ‘아프니까 사장이다’라는 사이트에 하소연하는 우리네 자영업자와는 좀 다릅니다. 부처님은 ‘아프니까 이렇게 내게 왔지’하는 마음으로 그걸 또 다 받아줍니다.
요즘 내가 자주 강의하는 초기경전 〈맛지마 니까야〉에 등장하는 온갖 진상 ‘손님’들 가운데 음식과 관련한 이야기 두 편을 짧게 소개합니다.
죽어도 오후불식은 못한다는 제자
“수행승들이여, 나는 밤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병이 없고 건강하고 가뿐하며 몸에 힘이 있고 편안하게 지낸다. 그대들도 밤에 음식을 먹지 말기를 바란다. 그러면 병이 없고 건강하고 가뿐하며 몸에 힘이 있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으니,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이 부분을 읽으면 2600여 년 전 부처님이 지금의 야식문화를 미리 내다보신 것 아닌가 하여 소름이 돋을 정도입니다. 그 옛날, 음식이 변변치 않았을 그 시절에도 부처님은 밤에 음식을 먹지 말 것을 권했습니다. 부처님이 아주 많이 강조한 것이 ‘때, 시기’입니다. 무엇인가를 하기에 적절한 때! 바로 그것을 잘 헤아려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처님이 특히 신경쓰신 때(시기)는 음식을 먹는 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는 한 끼 식사 말고는 그 외에 먹는 음식은 전부다 때 아닌 때에 먹는 식사(非時食)이라고 규정했지요. 정오가 지나면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오후불식(午後不食)도 부처님의 전통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밤에 먹지 않으니 오히려 몸이 건강하고 힘이 넘치고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조언을 따라서 때 아닌 때에 식사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앗싸지와 뿌납바쑤까 두 사람이 거부합니다. 여러 동료들이 말렸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했지요.
“말도 안 됩니다. 우리는 저녁에도 먹고 아침에도 먹고 낮 동안에도 먹습니다. 그렇게 먹어도 병이 없고 건강하고 가뿐하고 몸에 힘이 넘치고 편안하게 지냅니다. 아니, 대체 왜 우리가 눈앞의 이익을 외면하고 미래의 이익을 추구해야 합니까? 여러분도 우리처럼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배불리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느긋해지고 살도 통통하게 오르는데 이런 눈앞의 이익을 왜 마다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결국 부처님에게 가서 이 일을 고합니다. 부처님의 일처리 방식은 문제의 당사자를 늘 불러와서 그의 면전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은 먹어야 살맛이 난다고 주장하는 제자 두 사람이 불려왔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사실 확인을 한 뒤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득합니다.
“내 말 들어! 너희는 제자고 나는 스승이야. 감히 내 충고를 거부했다고?”
이런 식의 으름장이 아닙니다. 그들보다 먼저 집에서 집이 없는 곳으로 나아간 수행자, 그 당시 모든 종교인들이 권하는 수행법과 교리를 다 접한 뒤 궁극적인 해답을 주지 못함을 체험하고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여 스스로 깨어난 존재, 붓다는 진리를 찾아 길을 나선 사람들을 대신해서 종교적 방황을 먼저 하였고, 그렇게 하나씩 깨달은 이치를 들려주면서 뒤따라 집을 나온 구도자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분입니다.
이런 스승에 대한 믿음을 지니지 않고 있다면 스승이 그 어떤 이야기를 들려줘도 쓸모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스승으로서의 자신이 실천해보지도 않고 제자들에게 강요한 적이 있는지 차분히 묻습니다. 그리고 수행자의 일곱 단계를 들려주면서 스승을 향한 믿음이 구도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일러주지요. 이 모든 이야기를 마친 뒤 두 제자의 정곡을 콕 찌릅니다.
“그대들은 길을 잃었고, 그대들은 잘못된 길에 빠졌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대들은 가르침과 계율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아는가!”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법문을 마칩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알려고 열망하는 믿음 있는 제자라면 스승의 가르침은 그에게 자양분을 줄 것이고 활기를 줄 것이다.”(MN.70 끼따기리 설법의 경)
스승이 제자를 설득하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불교 교리입니다. 이 이야기를 자꾸 읽고 곱씹으면 불교가 무엇을 말하는 종교인지, 부처님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를 파악하게 됩니다. 무작정 “좋은 말씀이다”라고만 여기지 말고 부처님이 간곡하게 들려주는 긴 법문을 거듭 거듭 음미해보는 일, 이것이 초기경전을 즐기는 나만의 방식입니다.
붓다가 육식한다는 소문 전하는 의사
부처님에게도 주치의가 있습니다. 지바까(Jivaka)라는 의사인데, 어느 날 그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세상에 떠도는 소문 한 자락을 들려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을 위해서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 음식을 만들어 대접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런 정황을 다 알면서도 그 음식을 드신다고 세상 사람들이 쑥덕거립니다. 이런 소문은 부처님에 대해서 잘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실이 아닌 말로 비방을 하는 것입니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갑니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느냐며 결국 사람들은 소문을 믿어 버립니다. 이런 말이 처음 누구 입에서 나왔을까요? 어쩌면 무심코 과장되게 말했거나 부처님을 향한 세상의 존경에 샘이 난 이교도가 짐짓 없는 말을 지어냈을 수도 있습니다. 소문이란 그런 것입니다. 처음엔 특별한 것 같지도 않지만 점점 부풀려지지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소문의 여신 이름은 파마입니다. 이 여신은 숨어 있던 장소에서 처음 나올 때는 아주 작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데 걸을수록 힘과 체구가 점점 커져 하늘에까지 닿는다고 하지요. 이 여신에게는 침묵을 모르는 입과 항상 쫑긋 선 귀가 달려 있습니다.(〈구스타프 슈바브의 그리스로마신화〉제3권에서)
소문의 여신 파마 때문인지 세상에 이런 말이 떠돌았고 주치의 지바카는 이런 소문을 부처님에게 고하면서 진실을 알고 싶다고 청합니다. 분명 그는 이 일을 통해 아름다운 가르침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과연 부처님의 대답은 길고도 친절합니다. 부처님은 당신 자신 때문에 죽임을 당한 고기는 일체 먹지 않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구도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못을 박지요.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수행자 자신을 위해 죽인 고기가 아니라면 육식이건 채식이건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서 먹는 것이 탁발의 기본정신입니다. 이때 수행자에게는 허물이 있는 음식이 있고, 허물이 없는 음식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수행자 마음에 세상을 향한 우정 어린 마음(자), 연민과 공감(비), 기쁨(희), 담담한 평정심(사), 이 네 가지가 있다면 허물없는 음식을 먹은 것이라는 말이지요. 붓다와 그의 제자들은 당연히 허물없는 음식을 먹는 사람임을 들려주면서 법문을 마칩니다.(MN.55 지바까의 경)
고의로 생명을 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마음 가득 자비희사를 품는다면 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식사라는 것이지요. 이 법문을 들은 지바까에게 어떤 마음이 일어날까요?
“맞아요, 맞습니다. 이런 부처님을 어떻게 믿고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부처님 당신을 내 인생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실 것을 다시 한 번 맹세합니다.”
부처님의 법문 하나하나가 어떤 배경에서 펼쳐지는지 이해하면서 읽으면 내 마음도 지바까처럼 기쁨과 행복이 가득 찹니다. 초기경전이 지닌 매력이 이런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