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미디어 인 붓다] 44.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돌아오지 않는 해병’ 채 상병을 추모하며

전쟁고아 돌보다 산화한 해병대원들 희생 그려
무책임한 명령 희생된 ‘채 상병’ 돌아오지 못해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는 해병’ 돼서는 안 된다

이만희 감독의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한 장면. 
이만희 감독의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한 장면. 

사람들은 그들이 귀신도 잡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 나라 최고로 끈끈한 소속감으로 뭉친 집단이라고 한다. 바로 ‘해병대’다. 

국방의 의무로 징병제가 의무지만, 어떻게든 그 의무를 면제받는 게 특권인 사회에서 일반 군대와는 차원이 다른 훈련과 고생을 감내해야 하는 그 해병대를 일부러 자원해서 가는 청년들이 꾸준히 있다는 것도 놀랍고, 곱게 키운 자식이 해병대에 가겠다는 걸 걱정은 숨기고 격려로 나라에 내어주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도 놀랍다.

우리가 일상에서 그들을 볼 일은 별로 없다. 그들의 부대는 바다와 육지를 아우르는 험한 곳에 있으니까. 그러나 어떤 큰일이 닥치면 늘 그들을 보게 된다. 폭설이 내려 길이 막히면, 산사태로 어딘가 무너져 사람들이 위험하면, 장마나 태풍으로 마을이 잠기면 그들이 나타나 힘을 쓴다. 길을 뚫고, 바위를 치우고, 흙탕물을 헤치고 빨간 모자, 얼룩무늬 위장복 차림의 청년들이 누군가를 구해내는 것을 이 사회는 당연하게 누려왔다. ‘대민지원’이라는 이름으로.

‘국방’, 무력으로 나라를 지키는 군대 본연의 일 말고 민간에 생기는 온갖 험한 일을 맡아 사람들을 돕는 대민지원은 언제부터 이들의 몫이었을까? 

100년이 넘는 한국영화사에서 1990년 영화진흥공사가 영화관계자와 관객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6.25 소재 영화’로 응답자 전체의 12%가 꼽은 영화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감독, 1963년)이었던 것으로 미뤄볼 때 아마 처음부터였을 것이다.
해병대가 1949년 4월에 창설되었으니 생기고 1년 만에 6.25를 맞았던 해병대의 대민지원이 전쟁 내내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전쟁이 끝나고 겨우 10년 지난 시기에 군인으로 6.25를 겪어낸 당대 최고의 감독이 당대 최고의 연기자들을 출연시켜, 당대 최고의 블록버스터 급으로 만든 영화의 중심이 ‘대민지원’이었을까?

1950년 서울,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에 진입한 해병대 분대장 강대식(장동휘)이 이끄는 분대원들이 치열한 시가전 상황에 휩쓸려 고아가 된 영희(전영선)라는 아이를 구하게 된다. 아이는 구했지만 아이의 엄마는 죽었고, 전투가 끝난 후 진입한 건물 안에 학살당한 민간인 가운데는  분대원 가운데 한 병사의 누이도 있었다. 계속해서 북진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귀신도 때려잡을 이 해병들은 전장을 떠날 수 없고, 영희는 당장 갈 곳이 없다. 당장 맡길 곳도 마땅치 않고, 엄마가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본 아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구해준 해병대원들 뿐이다. 그래서 분대원들은 영희를 마대자루 속에 숨겨 데리고 다니다가, 대대장에게까지 허락을 받아 분대의 마스코트 명예 해병대원으로 입대시키기까지 할 정도로 아낀다. 그러나 이 배려는 전쟁 중의 한겨울,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깜짝 이벤트였고 이제 영희를 보살피던 분대는 최전방으로 가야한다. 영희를 대대본부에 맡기고 최전방에 투입된 이들은 대부분 영희에게 돌아오지 못한다. 10만 인해전술로 밀어 닥치는 중공군 앞에서 이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우를 지키기 위해, 영희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쳤다. 

이 시기 한국 전쟁영화는 오락이나 시각적 쾌락이 아니라 경험의 재구성이었다. 감독도 배우도 관객도 모두 그 전쟁을 겪었던 전우였고, 난민이었고, 생존자였다. 그러니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허구가 아니라 재현이었고, 과장이 아니라 기록이었으며,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실린 마음도 뜻도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을 것이다. CG나 VFX 등의 가상의 효과가 없던 시절에 등장 인원이 1만 4500명, 동원된 엑스트라가 연 10만 명, 탱크, 군용기, TNT 1500발과 뇌관 5000여 개를 폭발시켜가며 실제 해병대원들이 아득한 산등성이를 휘덮고 황량한 겨울 들판에서 쏟아지듯 달려드는 압도적 스펙터클은 자본의 힘이 아니라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고, 전쟁 속에 ‘인간’을, 특히 ‘아이 하나라도 귀하게 지키려던 병사들의 희생’이 어떤 정치인이나 지휘관의 고함보다 영웅적이라는 것을 영화 안에 담으려는 감독의 진심과 연기자들의 열연은 그들이 구해낸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위한 간절함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가족도 아니고 우연히 거두게 된 고아 아이 하나가 안전할 세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그 해병대원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알게 되면 그 아이가 슬퍼할까봐 걱정한다. “나도 너희들만큼 살고 싶다. 내가 잘 싸운다면 그건 살기 위해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내 도락이 아니야!살기 위한 최악의 수단이야.내게도 부모가 있고 처자가 있다. 총을 들고 사람과 싸우기보다는 삽을 들고 흙과 싸워 효도하고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절절한 말로 출전을 명령하는 분대장(장동휘)이나 “영희에게 모두 무사하다고 전해라. 아기에게는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으니까. 어느 곳이든지 오빠와 아저씨들이 살고 있는 거라고 영원히 생각할 수 있게 말이야”라는 유언을 남기는 구 해병(구봉서) 같은 이들의 목숨을 건 ‘대민지원’ 덕분에 영희는, 우리는 안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21세기, 이제 더는 교전이나 전쟁고아가 없는 세상에서도 이 나라는 여전히 해병대에게, 그리고 많은 병사들에게 ‘대민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마치 그들이 언제라도 동원 가능한 자원인 것처럼. 스물 남짓한 청년들에게 구명조끼 하나 지급하지 않고 사나운 물길 속에 맨몸으로 들어가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를 위해 어찌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해 이맘때, 무책임한 명령으로 ‘대민지원’에 내몰려 순직한 채수근 상병. 1년이 다 되도록 희생된 채 상병의 명예도, 제대로 된 순직 사건을 조사하라는 해병대 전우들의 요구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외려 순직 사건을 조사했던 수사단장을 순직 사고 수사결과를 경찰에 이첩하지 말라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직해임하고, 희생된 병사를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박정훈 전 대령을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했다.

박정훈 해병대 전 수사단장 어머니인 김봉순 포항여성불교연합회장은 늘 소신껏 일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완벽하게 완수하는 것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고 복무해왔던 박 대령이 항명수괴죄로 몰려 보직해임되자 “부처님과 불보살님의 가르침대로 부정한 일은 소멸되고, 정의를 인정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안타까워하고, 시민 대중들과 해병대 예비역들은 정치가 홍수보다 더한 재해가 되는 세상에서 거리로 나서고 있다.

“당신은 포탄 속을 묵묵히 전진하는 병사들 편이었고, 좌절을 알면서도 인간의 길을 가는 연인들 편이었고, 그리고 폭력이 미워 강한 힘을 길러야 했던 젊은이의 편이었다.” 

소설가 김승옥이 이만희 감독의 묘비에 바친 이 헌사처럼 우리가 채 상병을 애도하고, 박정훈 전 대령과 예비역들의 옆에 서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그 청년들을 ‘대민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낼 자격이 없다. 더 이상 어떤 병사도 ‘돌아오지 못하는 해병’이 되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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