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 진리 가르침 담아낸 경전
불교는 액운 없애는 종교인 줄 알던
20살 애송이 제자에게 건넨 ‘니까야’
그 안엔 ‘나란 무엇인가’ 사유 담겨
옛날 옛적 갠지스강 근처서
옛날 옛적 우리나라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인도 땅에서의 일입니다. 인도 북쪽 히말라야 산자락이 길게 내려오고 갠지스강이 조금 아래에서 도도하게 흐르는 곳, 바로 그곳에서 어느 스승 한 사람이 삶을 마치려는 참입니다.
왕자였던 스승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이 참으로 덧없고 괴로운 것을 보고, 덧없고 괴롭다면서도 벗어나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을 보고 조금 더 온전하고 완전한 삶의 의미는 없을까, 그걸 찾으려고 성을 나왔지요. 성을 나와서 무려 50년 가까운 세월을 길 위에서 지내며 처음에는 이런저런 수행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길을 묻고 그들이 일러주는 방법으로 수행을 하다가 자신이 추구하는 길이 아님을 알고 결국은 홀로 독자적인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에 스승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겠노라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스승은 길 위에서 30대를 보냈고, 40대, 50대, 60대, 70대를 보낸 뒤 80세가 되던 해에 이승의 삶을 마칠 시간이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황망한 마음에 간절하게 청했지요.
“스승님, 저희를 두고 떠나지 마십시오. 오래 오래 사세요. 저희 공부가 완성될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스승님은 계속 저희 곁에 계셔야 합니다.”
하지만 스승은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합니다. “지금 내 몸은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의지해서 억지로 이끌려 가는 것과 같다. 세상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없고, 만난 것은 헤어지게 마련이다.”
“스승님께서 이렇게 떠나시면 저희 제자는 앞으로 누구를 의지해서 살아가야 합니까? 그래도 스승님은 저희에게 긴히 당부하실 말씀을 남겨두고 떠나시겠지요?”
스승은 또다시 낮은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말해야 할 것은 다 말했고, 일러줄 것은 다 일러주었다. 마지막까지 아끼려고 주먹 속에 꼭 감춰두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내게는 ‘내가 제자들을 이끈다’라거나 ‘제자들은 내게 지시를 받는다’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 내가 이승을 떠난다고 해서 제자들에게 무슨 유언을 남길 것인가?”
심지어 제자들이 스승의 장례식을 어떻게 치러야 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도 “너희가 왜 그런 것을 걱정하지? 내 장례식은 세상 사람들이 아주 훌륭하게 잘 치러줄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스승은 떠나셨지요.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뒤늦게 화장터에 도착한 제자들 가운데 이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실 말이지, 난 이제 좀 살 것 같아. 스승님께서 우리를 좀 힘들게 했냔 말이야. 이제부터 우리는 자고 싶으면 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쉬고 싶으면 쉬고 이러면서 편안하게 지내보자구.”
이 말을 들은 또 다른 제자들은 깊이 탄식합니다. 스승의 화장이 끝나기도 전에 이런 목소리가 제자들 사이에서 나오니 어쩌면 지금부터 1년, 10년, 100년이 지나면 갠지스강 근처에 훌륭한 스승께서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심어주고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이끌었다는 사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스승이 인정할 만큼 수행을 한 제자들이 모였고 그들은 스승께서 생전에 날마다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던 가르침을 하나씩 기억해내며 외우고 그리고 합창을 하듯이 합송을 했습니다.
연필도 볼펜도 없고 종이도 책도 없던 시절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꾸 기억하고 외는 일뿐이요, 혼자서가 아니라 수행을 많이 한 제자들이 뜻을 모아 함께 외운다면 문자로 기록하는 것 이상으로 스승의 가르침은 단단하게 살아 숨 쉬며 먼 훗날까지 전해지리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백 년이 흐르고 이백 년이 흐르고 그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스승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도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제자 수행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외고 또 외며 그저 문자로 외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깊이 참선을 하면서 가르침을 온몸으로 체득하였지요. 제자들은 인도땅 여러 곳으로 ‘따로 또 같이’ 흩어지거나 뭉쳐지거나 하면서 수행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두 줄기로 크게 나뉘어 인도땅 너머 전해져서 한 줄기는 스리랑카로, 다른 한 줄기는 실크로드를 지나 중국으로 흘러듭니다.
스리랑카로 전해진 스승의 가르침은 스님들의 암송으로 전통을 이어가다가 ‘니까야’라는 이름으로 문자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문자로 기록된 부처님 말씀이 중국으로 전해져서는 ‘아함경’이라는 이름의 경전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그러는 사이 인도에서는 스승의 제자들이 가르침을 더욱 증폭시켜서 수많은 경전들을 써내게 되었지요. 스승의 본뜻에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고 더 크게 꽃과 열매를 피워냈지요. 니까야와 아함경을 초기경전이라 부르고, 그 이후에 쓰인 경전들은 대승경전이라 부릅니다.
그날 고익진 교수님께서
1982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한 나는 불교가 궁금하고 불교를 공부하려고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라는 건 내게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이따금 엄마가 부처님오신날 등을 달러 절에 가시는 것 같았지만 내 고향 강원도에서 절의 역할은 아주 미미했지요. 불교는 부적을 써주고 길일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뿐이고, 근처의 교회는 대놓고 전도활동을 하고 멋지게 크리스마스 행사들을 하는 것에 비해 절에 다니는 아낙네들은 조용히 내색하지 않고 종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절에 다니는 것을 가족들 몰래 ‘해치우기’까지 했습니다. 불교는 액난을 막아주는 기도처이지만,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절에 다닌다고 하기에는 민망한 종교, 어린 내게 불교는 딱 그 정도였습니다.
이런 내가 불교학과에 들어갔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외삼촌의 권유 때문이었는데, 고등학생 시절 나는 좀 특별한 문제에 사로잡혀서 골똘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누구인지 물음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 이 녀석을 나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 왜 이것을 나라고 불러야 하는지,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또 다른 어떤 녀석이 이런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 녀석이 나인지….
이런 문제에 휘말리기 시작한 조카를 지켜보시던 외삼촌이 “네가 갈만한 대학은 한 군데밖에 없다”면서 동국대를 추천하신 것이지요. 사실 처음에는 인도철학과를 마음에 두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불교학과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정말 소중한 내 인생인데 다른 이의 추천에 내맡기고 그냥저냥 대학생활을 시작한 것이 무책임해 보이지만 그 당시 내게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휘감겨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였고 나는 여전히 길을 찾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그때 내가 만난 분이 고익진 교수님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의 석사학위논문인 〈아함법상의 체계성연구〉라는, 어렵고 딱딱한 내용을 읽어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방식으로 생각을 해나가면 나의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았지요. 그러다 선배의 권유로 고익진 교수님 댁을 찾아갔고, 병약한 교수님께서 강의를 마친 뒤 귀가해 누워서 쉬고 있는데도 무작정 들어가서 내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깡마른 얼굴의 교수님은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그때까지 내 답답함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기에 겁이 났습니다. 철딱서니 없는 어린 여자아이가 괜히 교수님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닌가 해서 말이지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신 교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하고 같이 공부해보자.”
힘이 하나도 없어 나직했지만 또랑또랑하게 내 귀에 꽂혔습니다. 불교 속에 정답이 있다거나 이런 경전 읽어보라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신하고 같이 방향을 잡아서 사색을 진행해보자는 권유였습니다. 나의 스무 살 시절은 그렇게 시작됐고, ‘나를 찾아 나선 애송이 제자’에게 교수님께서 제시한 방향은 불교경전에 담겨 있었지요. 그것이 ‘아함경’입니다.
점치고 부적 쓰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불교가 알고 보니 ‘나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은 내게 길을 알려주는 종교였습니다. 액난을 막고 복을 비는 것이 종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인생의 궁극적인 물음에 공감하고 답을 찾아 나선 자들이 갈구하는 복음(福音)이 종교였습니다. 그 복음을 진리라 부르고 법이라 부르고 ‘담마’라 부르겠습니다. 그것이 한가득 담겨 있는 경전이 바로 ‘아함경’이요 ‘니까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