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불국토 경주 남산에 오르다] 13 두 번의 기적 열암곡 석불좌상과 마애불상(2)

넘어진 열암곡 마애불, 다시 세상에 나투다 

2007년 열암곡 사지 조사 과정서
박소희·채무기 연구원이 발견해
넘어졌음에도 호상에는 손상 없어
“1050년 지진으로 넘어져” 추정

2007년 열암곡 사지 조사 과정서 발견된 열암곡 마애불. 발견 당시 ‘5cm의 기적’으로 불리며 화제가 됐다. 
2007년 열암곡 사지 조사 과정서 발견된 열암곡 마애불. 발견 당시 ‘5cm의 기적’으로 불리며 화제가 됐다. 

2010년 발행한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열암곡 석불좌상 보수·정비 보고서’를 보면 열암곡 석불좌상에 있던 전각은 정면은 1.9m이고 측면은 1.8m이다. 열암곡 사지의 금당이라 생각하면 된다. 또한 초석이 남아있는 건물지에서 회랑의 흔적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한국불교 문화유산을 이해할 때 상식 하나. 지금의 한국불교 모든 전각 중앙에는 불상을 모신 불단이 있고, 스님이 불단 앞에 서거나 앉아서 설법한다. 이러한 모습은 빨리 잡아도 고려 중기 이후 선종 사찰에서 시작된 모습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사찰에는 금당 뒤에 강당이라는 건물을 세워서 스님이 설법을 하였다. 불상 앞에서 스님이 설법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8세기 신라에 선종이 들어오고 고려시대가 되면 금당 옆에 법당을 세우기 시작한다. 선종의 스님들은 깨달으면 부처님과 동격의 지위가 주어진다고 생각했기에 금당 옆에 법당을 세워 법을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찰은 금당 옆에 법당이 있는 여주 고달사가 대표적이다.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문의 중심 사찰로, 법당은 빠르면 고려 건국 직후인 10세기 중엽 늦으면 13세기에 세워졌다. 이후 조선 중기가 되면 금당이 법당과 합쳐지면서 금당이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대웅전 등의 전각의 이름만 남게 된다. 이후 어느 때부터 불단 앞에서 스님이 설법을 하게 된다.  

2007년 열암곡 사지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열암곡 석불좌상에서 남동쪽으로 30m 정도 떨어진 바위들이 모여있는 경사진 산 사면에 마애불상이 엎어진 상태로 발견된다. 열암곡 석불좌상의 불두가 발견되어 복원이 이루어진 이후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조사단이 열암곡 제3사지 사찰 터의 출입 동선을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조사하던 중 박소희·채무기 연구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열암곡 사지의 출입 동선을 파악하던 박소희 연구원의 눈에 길쭉하게 엎어져 있던 바위에서 인공적인 다듬어진 흔적이 보였다. 전문 연구인이었기 때문에 눈에 들어온 것이다. 바위 주위에 쌓여 있던 나뭇잎과 가지들은 치우고 손으로 더듬으니 가공된 흔적을 느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확인 작업을 한 결과 가슴과 어깨 그리고 다리와 대좌가 눈에 보이게 된다. 이후 흙에 덮인 마애불상의 얼굴이 나타난다. 무엇보다 불가사의한 모습은 위에서 밑으로 거꾸로 땅을 보고 누워있는데 코가 5cm 남기고 땅 위 바위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5cm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넘어진 무게 80t의 바위는 높이 6.20m, 두께 1.90m이고 폭은 2.50m이다. 이러한 크기의 바위에 고부조의 마애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머리에서 발까지 4.60m이며 발아래의 연화대좌는 1m로 40도 가까운 경사면에 엎어져 있다. 어느 때 지진의 영향으로 추정되는데, 위에서 밑으로 정면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넘어져 있던 마애불상이 발견된 것이다. 어찌 보면 땅을 향해 넘어져 있었기에 처음 조성한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을 것이다. 또한 조성된 모습 그대로인 국내 유일의 불상이란 점은 열암곡 마애불상이 한국불교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가 된다. 

경주 남산의 다른 석불좌상과 마애불상은 세월과 인위적 훼손 때문에 얼굴의 원형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열암곡 마애불은 조성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넘어지며 정면 얼굴 면이 땅에 묻혀 보존되었기에 조성 당시의 얼굴을 그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다. 코의 오뚝함은 통일신라 불상의 콧날을 예상하게 해준다. 거의 모든 전문가는 통일신라 불상의 콧날은 지금의 한국인처럼 뭉툭하게 조성되었을 것으로 예상했다. 불상의 콧날이 빼죽하고 오뚝한 모습이 원형이란 확인은 예상치 못한 새로움의 사실을 선물해 주었다. 

나발이 없는 민머리에 육계는 높게 솟아 있다. 눈은 아래를 향해 내리뜨고 있으며 입술은 도톰하다. 특히나 귀는 어깨에 닿은 정도로 매우 크게 조각되어 있으며 어깨가 넓어서 가슴을 활짝 편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마애불상은 시무외인과 여원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왼손은 가슴에 오른손은 밑을 향하고 있는데 모두 손등을 보이는 아주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보이고 왼쪽 어깨를 감싼 편단우견의 모습인데, 발목까지 내려온 옷 주름은 9단으로 접혀있다. 발은 바깥을 향하여 벌려져 있고, 연화좌대는 5장의 연꽃이 위로 향한 앙련이다.

마애불상은 몸통에 비해 머리가 크고 발이 짧은 4등신의 비율을 보이는데, 이것은 참배자가 마애불상의 밑에서 우러러볼 때의 시각 처리를 위한 계획된 조형미다. 고부조로 조각되어 볼륨이 강한 상호를 보이며 눈매의 날카로움과 어깨의 당당함은 통일신라 8세기 후반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미술사적으로도 경주 남산의 삼화령 삼존불과 배리 삼존불 그리고 석굴암 본존불상의 조형미를 잇고 있는 중요한 불상이다. 또한 손등을 보이는 수인은 경주 남산 왕정골 석조여래좌상 등 극히 드물게 확인되는 특이한 수인이다.

마애불상이 서 있던 원래의 자리는 지금의 자리로 판단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애불상의 바닥에 닿은 부분은 당시의 손상이 보이고, 땅에 닿지 않은 조각 부분은 손상이 전혀 없다. 이것은 넘어진 그 상태에서 변동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넘어지면서 움직이게 되었다면 현재 보이는 조각 면에 긁히고 까인 자국이 남아있을 것인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마애불상은 넘어진 그 상태로 발견된 것이며, 지금 자리가 원래 세워져 있던 자리라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마애불상이 넘어진 이유는 지진 때문으로 추정된다. 서 있던 마애불상이 앞으로 넘어진 것인데, 뒤 바위들을 보면 지진의 흔들림에 의해 앞으로 밀쳐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은 지진밖에 없다. 그런데 넘어진 시기는 확정하기 힘들다. 

문헌상 지진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에 64년을 시작으로 932년까지 총 53차례 나오는데, 779년의 지진이 눈에 띈다. 혜공왕 15년(779)의 기록은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백여 명에 이르는 심각한 지진이었다. 만약 이때 지진으로 마애불상이 무너진 것이 맞는다면 8세기 후반의 조형미를 보이는 마애불상은 조성하자마자 넘어진 것이 된다. 

하지만 779년에 넘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8세기 후반이라면 통일신라 전역에서 불사가 이루어지는 불교문화가 최고로 꽃이 피던 시기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경주 인구는 100만 명에 육박하는 도시였다. 35채의 금을 입힌 호화로운 주택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최고의 경제력과 힘이 있던 불교국가 통일신라에서 조성된 지 얼마 안 된 열암곡 마애불상이 넘어졌다면 그냥 놔뒀을까 싶다. 80t의 육중한 무게로 인해 바로 세우지 못했다면 주위에 또 다른 마애불을 조성하여 세우지 않았을까 추정도 해 본다. 통일신라 불교문화와 경제력의 최전성기였던 8세기 중후반 열암곡 마애불상이 조성되자마자 넘어졌다면 그냥 놔두진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고려사〉를 보면 1012년부터 1015년 사이 집중적으로 경주에 지진이 6번 일어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1012년 음력 3월 3일에 지진이 있었는데 같은 연도인 1012년 음력 5월 2일에 황룡사 구층목탑을 수리하고 있다. 1966년 석가탑 해체 수리를 하던 중 사리외함 밑에서 발견된 응고된 상태의 ‘묵서편’에 고려 현종 14년(1024)과 정종 4년(1038)에 석가탑을 중수한 기록이 확인됐다. 여기서 발견된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에는 1022~1024년에 지금의 석가탑인 무구정광탑을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에는 1036년과 1038년에 지진이 발생해 탑이 상하게 되어 보수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1012년과 1038년 사이에 큰 지진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2018년 건설기술연구원의 조사보고서에는 주변 암석의 노출에 따른 연도 측정을 한 결과 1550년 무렵 주변의 암석이 노출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2023년 7월 25일 ‘열암곡 마애석불입상 보존관리방안 최종보고’에서 연구원의 ‘4-2 전도시기 추정’에는 암석 표면 노출 연대를 측정하여 1050년 전후 317년의 측정값으로 발표하였다. 마애불상 부조의 완벽함과 1012~1038년 지진의 피해를 본다면 1050년 전후 넘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만 지금의 완벽한 형상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1550년대라면 조선이 건국된 이후이기에 유학자들에 의해 훼손됐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열암곡 마애불상은 황룡사 구층목탑과 불국사 삼층석탑이 지진에 피해를 본 1050년 전후에 넘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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