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스토리텔링 경전에세이] 12. 〈법구경〉(담마빠다) ③

전생의 혈연, 금생의 법연

423편 게송으로 이뤄진 ‘법구경’
게송마다 다양한 에피소드 존재
내용 알아야 게송들 완벽히 이해
이왕이면 ‘두꺼운 법구경’ 읽기를

그림= 최주현
그림= 최주현

게송만으로는 쉽지 않다
〈법구경〉 ‘분노의 품’에 들어 있는 게송을 소개합니다.

항상 신체적으로 제어되고
살생을 여읜 성자들은
불사의 경지에 도달하니
거기에 이르러 근심을 여읜다.
(225번째 게송)

이 시를 읽어보시죠. 어떤 것이 느껴지나요? 뭐, 별로라고요? 괜찮습니다. 사실, 그냥 그렇지요? 이런 구절보다는 〈숫타니파타〉에 들어 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구절이 더 와닿는다는 사람들 많습니다. 

이 게송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세속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은 행동과 말, 생각을 제어하기 쉽지 않습니다. 사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나 또는 내 가족, 내 친구, 내 편을 먼저 챙기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기 일쑤요, 이런저런 일로 속상할 때는 함부로 행동하는 바람에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성자들은 다릅니다. 아주 심오한 이치를 공부하고 깨달아야 성자라는 소리를 듣지만 법구경의 게송을 읽어보자면 무엇보다 자신의 행동을 잘 조절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작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으로도 성자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행동거지를 제어하고 조절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성자는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기에 스스로도 죽음을 떠난 불사(不死)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그곳에 도달하면 이 세속에서 늘 마음을 힘들게 했던 온갖 근심과 고민은 자취를 감춰버린다고 〈법구경〉은 말합니다.

혹시 지금 마음이 온갖 근심과 걱정에 가득 차고 속 시끄럽고 밤에 잠을 잘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면 법구경의 구절처럼 자신의 행동을 잘 살펴서 스스로를 제어하는 데에 몰두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자, 아무튼 〈법구경〉 225번째 게송은 이런 성자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같은 보통의 세속 사람들에게는 어찌 되었거나 와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두꺼운 법구경(법구경의석)’을 펼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슨 사연으로 이런 게송을 읊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늙은 부부, 부처님에게 달려오다
어느 때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탁발을 하러 어느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부처님을 보더니 달려와서 엎드려 발목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동안 어디를 다니느라 오랫동안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느냐. 늙은 부모를 모시는 것이 아들의 도리가 아니더냐.”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내가 네 얼굴을 오늘에야 처음 보았구나”라고 말이지요.

부처님은 늙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묵묵히 있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당황했지요. 그런데 이 남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어서 집으로 가자. 네 어머니를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

부처님은 그 남자가 이끄는 대로 그의 집으로 향했고, 집에 도착하니 늙은 여인이 반갑게 나오면서 앞서의 남자가 하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집안에 있던 자식들을 모두 불러서 “네 형이 왔다. 어서 나와서 인사를 하거라”라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 늙은 부부는 학수고대하던 아들을 만난 부모 심정이어서인지 그 얼굴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을 대하듯 반갑게 하대하더니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서둘러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렸지요. 공양을 마치자 부부는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우리집에서만 공양을 하십시오.”
하지만 부처님에게는 한 집을 정해놓고 탁발을 하는 법은 없었기에 그 원칙을 일러주자 부부는 말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집에서 공양 초대를 받았다면 그곳으로 가십시오. 단, 그 집의 사람은 우리 집에 와서 음식을 가져가, 그것으로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렸으면 합니다.”

이렇게 해서 무려 석 달에 걸쳐 부처님과 제자들은 노부부의 집에서 공양을 하거나 다른 이의 집에서 공양을 하더라도 노부부의 음식을 들게 됐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이 “아들아~”라고 맞아들여도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그들을 향해 정성스레 법문을 들려주었고 노부부는 석 달 동안 부처님에게서 법을 청해 들었습니다. 노부부는 천천히 성자의 경지로 나아갔지요. 마음 속 번뇌와 의심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한 해탈의 경지로 다가간 것입니다.

석 달이 지났을 때 노부부는 가장 높은 성자의 자리인 아라한의 경지에 들었고 그리고서 이승의 인연을 다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부모님 장례를 치르듯 노부부의 장례를 위해 화장터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전생 부모의 화장을 마치고
그런데 석 달 동안 부처님 제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무리 노부부라 하더라도 어찌 부처님을 아들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지…. 부처님에게는 카필라바스투의 숫도다나왕이 아버지요, 마하마야 왕비가 어머니 아닌가 말입니다. 마야 왕비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에는 마하파자파티 고타미 왕비가 정성을 다해 기르셨으니, 아버지 어머니라면 이런 분들이어야 마땅할 텐데 부처님은 어쩌자고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노부부가 부모 행세를 하는 걸 묵묵히 받아들이셨단 말인지요.

제자들이 의심을 품고 있는 걸 아신 부처님은 노부부와 당신의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제자들이여, 이 노부부는 과거 오백 번의 생애 동안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였고, 오백 번의 생애 동안 나의 아저씨와 아주머니였고, 오백 번의 생애 동안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나는 이렇게 길고 긴 생애 동안 이 노부부에게 양육되었다.”

당신의 전생을 환히 기억하는 부처님이기에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노부부는 아직 지혜로운 성자가 아니었기에 이런 전생을 기억해낼 수는 없었지만 그 오랜 생애 동안 친애하던 습이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부처님에게 다가가서 “아들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과거에 함께 산 인연과 현재에 만난 행복으로 사랑은 물속의 연꽃처럼 다시 솟아오른다.”

나는 이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기쁘고 행복한 적이 있었다면, 그건 그 사람과 세세생생 참 좋은 인연이었다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지금 당신의 부모, 당신의 배우자, 당신의 자식, 당신의 친구와 친척들은 이번 생뿐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전생을 거쳐 오면서 사랑과 존경의 인연으로 함께 정을 나눈 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누군가와는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고 괜히 미워진다면 어떨까요? 아마 다음 생에 또 만나서 또다시 미워하게 될 것이 뻔하니 금생에 토닥토닥 정을 쌓아야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노부부 이야기가 〈법구경〉 225번째 게송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밝히지 않았군요. 노부부의 화장을 마치고서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여쭈었지요.

“이 노부부는 다음에 어느 곳에 태어날까요?”
“이 두 분은 거룩한 경지를 이루었기에 다시 태어남은 없다. 태어남이 없으므로 죽음이 없는 불사의 열반에 이르렀다.”

그런 뒤 부처님이 들려준 게송이 앞서 225번째 게송이라는 것입니다. 

아하, 부처님이 전생 그 어느 때인가 아주 많이 부모자식 인연을 맺은 이와 금생에 다시 만났고, 이번에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서 법을 주고 받았다는 것. 행여 전생에 자식을 기르느라 속을 태우거나 눈물바람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금생에는 부처님에게 법문을 듣고 성자의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 이런 사연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전생의 혈연이 금생에는 법의 인연으로 아름답게 꽃을 피운 것이지요.

두꺼운 법구경, 얇은 법구경
〈법구경〉에는 423편의 게송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게송마다 이렇게 긴 사연들이 달려 있으니 이런 내용까지 포함한다면 〈법구경〉은 얼마나 두꺼워질까요? 사연들은 때로는 현대인들에게 비현실적이어서 그리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조금만 그 냉정한 지성을 느슨하게 한다면 불교가 뿜고 있는 향기를 담뿍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 계시던 시절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인연으로 부처님과 만나고 새롭게 인연을 맺었는지를 익힐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구경〉 읽고 싶은데 추천 좀 해주세요”라는 청을 받으면 저는 늘 되묻습니다.

“두꺼운 걸로 읽으실래요? 얇은 걸로 읽으실래요?”
이왕이면 두꺼운 〈법구경〉으로 행복한 불교 여행에 나서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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