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백패킹 #캠핑…전에 없던 블루오션 사찰에서 피어났네

[서산 보원사 캠플스테이를 즐기다]

가파른 경사에 무거운 배낭
4시간 산행으로 힘은 들어도
짙은 녹음이 활력소가 된다
寺址 잔디밭 캠핑 유일무이
“스트레스 내려놓고 가세요”

첫날 하이킹 출발에 앞서 개심사 일주문 아래에 모인 캠플스테이 참가자들. 이때만 해도 코스가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초면인 사람들과 유쾌한 만남
사전 안내문을 읽다 눈에 들어온 짧은 문구, <1일차 개심사-백암사지-보원사 11.2㎞(난이도 상 4시간)>.

지난 5월 25~26일 서산 보원사에서 진행된 ‘캠플스테이(캠핑+템플스테이)’ 참가 신청을 마친 뒤 일정표를 확인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저질 체력으로 가능할까. 다른 날 갈 걸 그랬나?’ 젊은 날에 어깨를 다쳐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낸 지 10여 년. 산행이라곤 알지도 못하면서 얼마 전 아무 준비 없이 북한산에 올랐다가 다음날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알람시간보다 일찍 눈을 뜬 캠플스테이 첫날, 새벽부터 차를 달려 출발점인 개심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삼삼오오 정해진 장소에 모여드는 사람들. 전문가 포스를 내뿜는 하이커(hiker)와 백패킹이 처음인 사람까지 성별, 나이를 떠나 캠플스테이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참가한 이들이다. 올해부터는 백패킹 배낭과 텐트 등이 없는 사람을 위한 장비 대여도 가능해져 15명 정원에 세 배가 넘는 인원이 신청했다고 한다.

‘원효깨달음의길’을 오르는 참가자들.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이래서 원효 스님이 깨달았나’ 싶어진다.

‘ISTJ(MBTI 성격유형 검사 결과)’임에도 거듭된 사회화로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어렵진 않지만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필요한 법. 처음 보는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할지 고민하던 차에 안내자 ‘희맨님(본명이 ‘희남’이라 男을 man으로 표현)’이 조금은 신선한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을 제안했다. 앞사람과 이름이나 나이가 아닌 취미와 좋아하는 음식, 버킷리스트를 공유하는 것. 몇 차례 돌아가며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인상 깊었던 사람의 취미 등을 얘기하면 당사자가 손을 들어 자신을 소개하고 또 다른 사람의 취미를 말하는 식이다. “조기 은퇴하고 캠핑카를 사서 여행 다니는 게 꿈”이라던 김지혜님의 소개가 인상적이다. “젊어 보이는데 벌써 그런 꿈을 꾸느냐”고 꼰대 같은 핀잔을 주려 했지만 알고 보니 9살이나 많은 누나였다. 에너지 ‘뿜뿜’하는 취미 부자들 사이에서 ‘집돌이’에 고양이와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한다고 소개하니 스스로 소극적인 사람이 된 기분도 든다.

자기소개하고 간단히 몸을 풀고 본격적으로 시작한 하이킹. 적게는 8㎏, 많게는 15㎏에 달하는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는데, 개심사를 지나자마자 시작되는 가파른 경사가 예사롭지 않다. 취재와 촬영을 핑계로 배낭 대신 카메라 가방을 멘 게 다행일 정도. 사전에 “(하이킹) 난이도가 상(上)이라고 해도 평탄하게 걷는 구간이 대부분”이라던 보원사 김선임 종무실장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어쩐지 종무실장은 산행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간편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보원사로 넘어올 여러분을 맞이하겠다며 밝은 미소로 차를 타고 떠나시더라니….)

하이킹 쉬는 시간을 이용해 추억을 남긴다. 분명 초면인데 이상하리만큼 어색함이 없었다.

다양한 체험으로 채우는 하루
하이킹은 가야산 주변 4개 시·군이 함께 조성한 내포문화숲길을 무대로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불교를 주제로 한 ‘원효깨달음길’을 걷게 되는데, 초심자 기준 원효 스님께 이런 험난한 산을 오르내려서 깨달음을 얻으신 건지 묻고 싶어지는 난이도다.

하이킹 시작 30분 만에 행렬의 선두와 후미가 제법 큰 간격으로 나눠졌다. 안 쓰던 근육을 쓰는 초심자들이 전문가들처럼 걸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나름대로 후미그룹만의 유대감과 인간미가 매력적이다. 자주 쉴 수밖에 없으니 “덕분에 쉬어간다”는 말이 단골멘트. 후미를 챙기던 또 다른 안내자 ‘산님(산에서 달리는 트레일 러너였다)’ 덕에 수다로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점심은 오후 2시가 다 돼서야 먹을 수 있었다. 자기소개가 길어져 평소보다 늦게 출발한 탓이다. 바위에 걸터앉아 편의점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는데, 옆에서 정성스럽게 김밥을 싸온 중학생 영우와 아빠 정호님의 도시락에 눈길이 갔다. 누군가 영우에게 “엄마가 직접 싸주신 거니?”라고 묻자 옆에 있던 아빠 정호님의 한마디에 웃음바다가 펼쳐졌다. “엄마가 직접 ‘사주신’ 거예요!”

‘취나물두부쌈’에 도전한 우리 팀. 맨손으로 끓는 물에 취나물 데치는 건 나의 몫이었다.

경사는 가파르지만 초여름의 짙은 녹음을 만끽하며 오후 4시쯤 보원사에 도착했다. 산에서만 보낸 시간이 네댓 시간인지라 몸은 삐걱거리는데 왠지 모를 성취감이 솟는다. ‘이 맛에 산을 오르는구나.’

시원한 연꽃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곧바로 텐트 피칭에 나섰다. 캠프 사이트는 바로 법당 뒤편, 보원사지 오층석탑이 한눈에 들어오는 잔디밭이다. 보원사에서 빌린 텐트를 ‘뚝딱’하고 설치하자 몸 하나 누일 내 집 마련도 끝. 잠시 누워 한숨 돌리니 사찰음식 만들기 체험이 이어졌다.

하이킹을 하며 생긴 후미그룹만의 끈끈한 유대였을까. 4개 팀으로 나눈 사찰음식 만들기도 후미그룹과 함께했다. 올리브오일에 두부를 부쳐 끓는 물에 데친 취나물로 감싸는 ‘취나물두부쌈’이 주 메뉴. 아스파라거스와 영양부추, 노란 국화꽃은 가니쉬(garnish)다. 칼질, 데치기, 부치기, 장식을 분담해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만들었는데 팀원 한 명이 심오한 감상평을 내놨다. “아즈텍 무덤 같지 않아요?” 왜 하필 무덤이었을까…. 이렇게 만든 두부쌈에 연잎밥, 각종 나물 반찬으로 저녁공양을 하니 영화 ‘파묘’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서원탑 만들기 시간에 정성스럽게 빚어낸 나의 안심탑.
서원탑 만들기 시간에 정성스럽게 빚어낸 나의 안심탑.

해가 진 저녁시간엔 보원사 연등공방에서 서원탑 만들기가 진행됐다. 찰흙이 아닌 도자기흙으로 나만의 탑을 빚고 서원을 새기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유산 활용사업에 걸맞게 보원사지 오층석탑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면 된다. 흙을 잘라내고 모양을 잡고 물을 묻혀 다듬는데, 어릴 적 못다 이룬 미술시간의 꿈을 펼쳐내기라도 하듯 왠지 모르게 ‘진심모드’가 됐다. 반듯하게 빚어낸 나의 탑을 본 강사님이 “전에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입꼬리와 어깨가 장대양봉처럼 솟아올랐다.

취침 전 짧은 다과 시간을 이용해 참가자들의 소감을 들어봤다. 지난해 혼자 참가했다가 올해 여자친구와 함께 돌아온 서광선님은 “지난해에는 런칭한지 얼마 안 된 느낌이었는데 이번에 확실히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라며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종교 거부감 없이 절에 스며들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아빠의 제안으로 참가한 영우는 “또 오고 싶다”는 말을 줄기차게 내뱉었다. “프로그램이 성공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아빠 정호님은 “아들과 오토캠핑을 자주 다니다 백패킹에 관심이 생겨 터닝 포인트로 삼아 참가했다”며 “아들이 이렇게 좋아할지는 몰랐다. 너무 만족스럽다”고 했다.

둘째 날 이른 아침, 텐트 문을 열면 눈앞에 안개 낀 보원사지가 펼쳐진다.
둘째 날 이른 아침, 텐트 문을 열면 눈앞에 안개 낀 보원사지가 펼쳐진다.

학창시절 집안에서 “역마살 낀 게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밖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던 나. 캠플스테이는 매일 사람 만나 취재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이제는 집에 있는 시간이 행복한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맞아, 나 이런 거 좋아했지.’ 외향적이고 쾌활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생기를 얻는다. 이날 밤, 가득 낀 구름 때문에 은하수를 이불로 덮고 잘 순 없었지만 다음날 이른 아침 눈앞에 펼쳐진 오층석탑과 보원사지 풍경이 아쉬움을 달래준다.

아침공양 이후엔 보원사 운영위원장 정경 스님과의 차담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정경 스님의 키를 묻는 질문에 40대에 2㎝가 더 자라 185㎝가 됐다고 답한 스님. “어려서 절집에 들어와 콩나물과 미역줄거리 먹고 키가 커져 큰스님이 됐다”는 우스갯소리에 스님과 일반인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다. 스님은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가르침이 담긴 <화살경> 내용을 소개한 뒤 “사회생활하면서 어떻게든 쌓일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를 보원사에 다 내려두고 가시라”며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보원사 운영위원장 정경 스님과의 차담.
보원사 운영위원장 정경 스님과의 차담.

보원사에서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오층석탑 앞 필라테스. 앞서 참가한 사람들이 호평을 쏟아낸 코너다. 그도 그럴 것이 문화유산과 드넓은 잔디밭을 전세라도 낸 듯 활용하니 한강변 필라테스와는 격이 다르다. 레크리에이션 전문이 아닌지 의심될 만큼 위트 넘치는 강사님의 신호에 따라 팔다리를 움직이고 몸통을 비틀다보니 군대 유격체조 8번 자세(온몸 비틀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마지막엔 맨발로 잔디밭을 느끼면서 양말과 신발에 길들여진 발바닥에 새로운 느낌을 선물한다.

남은 건 보원사에서 다시 개심사로 넘어가는 일. 둘째 날은 난이도가 낮은 코스로 돌아간다. 하이킹 도중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은 덤. 원점회귀를 앞두고 마지막 하이킹을 하지 않는 나는 다른 참가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기분 좋은 에너지를 가득 안고.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가지고 해야 하는 백패킹.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으로 배낭에 물건을 넣다보면 정작 산을 오르다 힘들어 포기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둘 쓸모없는 물건을 버린다. 삼독(三毒)의 첫째인 탐심도 이렇게 내려놓을 수 있길. 도량에서 보낸 하루가 모두의 활력소가 되길.

법당 옆 잔디밭에 텐트를 펼칠 수 있는 절이 또 있을까.
보원사지에서 오층석탑과 함께한 필라테스.
보원사지에서 오층석탑과 함께한 필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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