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백금남의 소설 아디카야의 검] 44. “명상서 본 난타에 미쳐 쌍불도를 그렸소”

44. 아디카야의 눈물 1

-국가 보조 말이 쉽지요. 세월이 세월이라 그 옛날보다야 사람 사는 곳이 되었지요. 의학도 많이 발전했고요. 그러나 아직입니다. 달나라 별나라 가는 세상이지만 한센병은 잡기가 어려운 병이라오. 예방과 관리가 첫째인데 정부 관리 놈들 어디 이곳에 한 번이라도 와 봤어야지요. 그 사람들이 환자들입니까. 그 사람들 이곳 사정 몰라요. 아무리 구명해 달라고 울며 매달려도 소용없어요. 그저 사무적일 뿐이지요.

그렇다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이런 원시적인 형태의 어쩌고 하는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걸 나는 억지로 참았다. 인도는 단일 국가 중 한센병 환자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 내었기 때문이었다.

노인네가 걸음을 멈춘 곳은 병원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맨 위쪽의 판잣집 앞에서였다. 앞에서 몇 번 집주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노인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을 살며시 열었다. 곰보 유리창이 달린 나무문이었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나는 나도 모르게 손으로 코를 막았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던 노인네가 한순간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뒤이어 후다닥 안으로 뛰어들었다. 왜 그러나 하고 네 사람은 마주 얼굴을 쳐다보았다. 안에서 갑자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심 작가가 후다닥 안으로 뛰어들었다. 심 작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던 나는 깜짝 놀랐다. 대여섯 평이나 될까. 그냥 바닥만 평평하게 닦아 합판을 깔고 그 위에다 장판을 깔아 놓은 곳이었다. 주위엔 가재도구가 널린 것 같았다. 그 중앙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여자는 동쪽으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고 사내는 그 여자의 가슴을 베고 문 쪽을 향해 누워 있었다. 그들 주위는 온통 피범벅이었다. 흘러내린 핏줄기가 내가 들어선 입구까지 흘러 내려와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반대편으로 돌려져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사내는 승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찾던 이석원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눈을 뜨고 들어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생기가 느껴지는 눈이었다. 상상했던 모습이 저러했던가? 날카로운 콧날, 긴 얼굴, 활처럼 휘어진 엷은 입술….

그들이 흘린 피는 남자와 여자의 손목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여자와 사내의 손목은 포개어져 있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손목의 동맥을 잘랐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멍청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노인네가 사내를 향해 달려들려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사내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껄끄럽게 쉬어 있었으나 발음은 정확했다.

-이제 무슨 짓이오?

노인이 소리쳤다.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노인네가 다시 달려들려고 하자 사내가 눈을 시퍼렇게 치떴다.

-어르신의 손에 바늘구멍만 한 상처만 있어도 곧 감염되고 말 것입니다. 오시면 안 됩니다.

노인네가 안 되겠는지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마도 병원 사람들을 데리러 가는 모양이었다.

사내의 눈이 천천히 네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오셨군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심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오셨습니다. 오실 줄 알고 있었지요.

-댁이 아디카야요?

내가 물었다.

그가 웃었다.

-맞습니다. 이곳에서 저를 그렇게 부릅니다.

-한국식 이름은 이석원이고?

-그렇습니다. 제가 이석원입니다. 아버지 지안 스님을 죽이고 암자를 불태웠던 사람이오.

-왜 그랬소?

냉정을 가장하며 내가 물었다.

이석원이 자조적으로 입가에 웃음을 물었다.

-분명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찾아온 것 같으니 말씀드리지요. 지안 스님은 내가 죽인 게 아니었소.

-죽이지 않았다고?

심 작가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그가 머리를 내저었다.

-그를 죽인 건 내가 아니라 진리란 놈이었소.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군.

심 작가가 뇌까렸다.

-그렇소. 그대가 무엇을 이해할 수 있겠소.

-이해할 수 없다고?

심 작가가 되물었다.

-그렇소. 그대들은 그 무엇도 이해할 수 없소. 하기야 이해만큼 더러운 것이 있을까만….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가슴에 불을 맞은 것 같았다. 갑자기 심장이 벌떡거렸다. 그 사이로 그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니 내 말해 드리리다. 쌍불도를 아시오?

‘쌍불도?’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어느 날 쌍불도에 대해서 말하던 천추사원의 조실이 생각났다. 두 사람의 부처. 부처님의 고행상 옆에 이석원이 그려진, 분명히 그는 그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삽화=김상규
삽화=김상규

-물론 여기까지 왔으니 그걸 모를 리 없겠지. 그렇소. 그 쌍불도. 그러나 그건 아버지가 그린 것이었어.

-당신이 그린 것이 아니고?

내가 냉정을 가장하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나를?

그의 얼굴에 ‘천만에 그럴 리가 있겠느냐’는 미소가 흘렀다.

-그것은 내 아버지가 그린 것이었소. 천하에 다시없을 금어가 말이오. 그 금어가 미쳐서 자기 아들을 부처로 앉힌 것이오.

-방금 그대의 아버지가 미쳤다고 했소?

-하하하 미치지 않았으면 그럴 리가 있겠소! 일가를 이루다 보니 삼세가 보인다는데, 도대체 나는 그 경지를 이해할 수 없었소. 하기야 그 경지가 이해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아버지를 죽였다?

그게 이유가 되느냐는 듯이 오오스마 기자가 물었다.

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흘렀다.

-그것을 찢으러 들어가던 날 밤이었소. 아버지는 내가 들어올 줄 알고 있었지. 자신이 그린 쌍불도 앞에 척추를 펴고 꼿꼿하게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으니까.

바람이 부는 것인가. 열린 문이 흔들렸다. 힐끗 나는 밖을 내다보았는데 먼 산등성이가 보였다.

-아버지는 내가 그림을 찢으러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소. 난타란 허깨비에 속아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었소. 아버지는 늘 내게 말했소. 넌 분명히 난타 존자의 후생이라고. 그때마다 나는 코웃음을 쳤소. 지금이 어떤 세상이오. 우리의 마음까지도 뇌과학으로 규명되는 세상이오. 그런데 전생 후생? 어림없는 수작 아니오. 그런데도 아버지는 명상 중에 본 난타에게 미쳐 쌍불도를 그렸소.

-그렇다고 아버지를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돼!

심 작가가 조급하게 소리쳤다.

그에 상관하지 않고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같은 금어로서 미쳐버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소.

-용서할 수 없었다니? 정말 그래서 아버지를 죽였다고?

심 작가가 또 조급함을 드러내었다.

그는 심 작가의 성급함에 상관하지 않았다. 할 말을 그대로 해나갔다.

-그런데 그렇게도 지키려 했던 쌍불도를 이상하게 가로막지 않았소.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았소. 이제 갈 때가 된 것처럼 스스로 촛불을 쌍불도와 자기 몸에 붙였소. 그때 어떻게 알았겠소. 이미 아버지가 몸에 휘발유를 덮어썼다는 걸.

-무엇이? 스스로 휘발유를 덮어썼다고?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이 이내 말을 이었다.

-그렇소. 그는 그렇게 쌍불도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났소. 왜겠소? 왜 쌍불도와 하나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났겠소?

-그래. 왜?

역시 심 작가였다.

그의 음성이 이어진 것은 잠시 사이를 두고서였다.

-아버지는 내게 보여준 것이오. 어떠한 것도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는 대승(大乘)의 경지를 말이오. 그는 불을 붙이기 전에 내게 마지막으로 말했소. 삶보다 먼저 시작된 저 시원의 끝에 누가 있을 것 같냐고. 나는 이제 본래 대로 돌아가리라고.

-그렇다면 그대가 지안 스님을 죽이지 않았단 말인데 그럼 지안 스님의 상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심 작가가 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와중에도 어느새 그의 말꼬리가 내려가 버렸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머리를 내흔들었다.

-나는 처음 아버지를 구하려고 했었소. 비록 그림을 찢으러 들어가긴 했지만. 그러나 불은 삽시간에 옮겨 붙었고 그 바람에 단상이 무너져 내리면서 촛대가 목에 박힌 것이오.

-거짓말이다. 촛대가 위에서 떨어졌다면 부처를 모신 단상이었을 텐데 그 정도라면 목에 박히기는커녕 튕겨 나갔을 것이다. 박힐 수가 없어.

심 작가는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사건을 작품화하기 위해 나름 많이 노력했다는 생각이 나는 들었다.

심 작가의 말을 들은 그가 희끄무레하게 웃었다.

-대단하군. 그러고 보니 부처님에게 올린 공양기(供養器)와 불상 등 단 위의 물건들이 촛대와 함께 연달아 떨어진 것 같구려. 하지만 그것이 이제 와 무슨 소용인가.

-그건 그렇고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오?

심 작가가 다시 나설 것 같아 내가 물었다.

그가 쿨쿨 웃었다.

-그대들이 이곳까지 찾아온 걸 보면 더 잘 알 것 아니오.

-하지만 모든 것은 사실이다?

내가 물었다.

-나는 내 본래면목을 찾아다니다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오.

-그래 여기까지 오면서 무엇을 보았소?

-비로소 보입디다. 나의 삼세가.

-삼세?

-과거, 현재, 미래.

-정말 삼세를 보았단 말이오?

이번에도 내가 물었다.

-내가 아무리 부정하고 부정해도 고래로 이어져 온 나의 업장, 그 업장 말이오.

-정말 그 업장을 보았다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심 작가가 물었다.

-그때부터 꿈만 꾸면 난타가 보였소, 그가 묻고 있었소.

-물었다?

말이 너무 느리다는 듯이 또 심 작가가 물었다.

-자, 부처님은 무아(無我)라고 했다. 나는 유아라고 한다.

-무아? 유아? 무슨 소리야?

또 심 작가가 되받았다. 〈계속〉

▶한줄 요약

이 기자 일행은 드디어 이석원을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서 아버지 지안 스님의 죽음에 대해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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