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지휴 스님의 능가경 강설] 35. ‘찰나’도 ‘전부’도 모두 이름일 뿐

35. 일체 제법의 찰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에 있다 보니, 언제나 확고한 어떤 앎의 상태나 어떤 앎의 느낌으로 사물을 확인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적인 찰나의 앎의 상태는 없다. 지금 바로 알고 있는 그 마음뿐이다. 그 보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 외에 생각으로 키운 마음도 아니고, 생각으로 줄인 마음도 아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마음만 없다면 보이는 그대로의 마음이 전부다. 다만 그대로의 마음을 취하여 해석하면 안 된다. 그대로의 마음은 속함이 없기 때문에 ‘있다, 없다’의 개념으로 판단하면 그대로의 마음이 되지 못한다. 판단 없는 그대로의 마음이니 나만 알고 말하는 마음이 아니다. 이렇게 이름 붙이고 있지만 상대와 다른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대승경전 〈금강경(金剛經)〉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원음인 〈맛찌마니까야〉 제131 ‘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에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도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쪼갤 수 없는 마음이 우리의 본마음이다. 이쪽이나 저쪽의 조건으로 마음을 쪼개어 가져봐야 기쁨도 잠시이고 슬픔도 잠시뿐이다. 그런 마음은 돌고 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다른 마음을 가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보이는 것은 실재하는 현상계 같지만, 그것은 가지려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그것이 실재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일체법이 모두 찰나공이라는 이론에만 집착한다면, 일체법이 찰나에 괴멸된다는 사실이나 무루의 법이 결코 찰나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알 수 없네. 만약 한결같이 한 생각 한 생각이 무상(無常)이라면 찰나의 괴멸로 일체법을 개괄하는 것이니, 이렇게 되면 단견의 공에 떨어지고 말며 무위법 역시 괴멸될 수 있다고 여기게 되네.”

찰나같이 실체 없는 꿈을 좇는 허깨비처럼 자신을 괴롭게 하고 다시 그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다녀선 안 된다. 스스로 괴롭게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물질적인 것으로 괴로움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느낌적인 것으로 괴로움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지각, 의도, 의식적인 것으로도 괴로움을 벗어나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 다섯 가지를 존재의 다발[오취온(五取蘊)]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괴로움이 생겨나는 줄 알지 못하고 이것으로 괴로움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오취온은 찰나에 나타나고 찰나에 사라지는 아지랑이 같은 허상인데, 우리는 그것이 허상인 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잡아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것은 잡아 둘 수 있는 실재가 아니다. 인연 따라 움직이는 뜬구름이다. 정신이 혼미한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오아시스다. 멀리서 보면 있는 듯하지만 가까이 가면 다시 저 멀리 있는 듯이 보이는 무지개 같은 것이다. 뜬구름이나 오아시스를 찾아다니는 정신 나간 사람이 되지 말자. 밖으로 나가 찾아 헤매는 정신을 진정시키고 오취온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나 스스로가 될 수 없는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바른 사유인 오취온으로 나를 만들려는 마음을 버리게 되고, 오취온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마음을 버린 바른 언어와 바른 행위와 바른 생활을 하게 되고, 오취온의 유혹에서 바른 용기를 내는 바른 정진을 하게 되고, 오취온으로 인하여 많은 착오를 일으키더라도 오직 바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가진 바른 의식으로 집중하게 되고, 오취온의 뿌리 깊은 존재성을 끊어버리는 선정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바른 앎이 생기기 전까지의 과정 아닌 과정이고, 그 스스로가 드러나게 되면 ‘찰나’라는 것도 ‘전부’라는 것도 그저 이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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