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박몽구의 ‘운주사 와불 곁에서’
운주사 와불 곁에서 / 박몽구
얼마나 겨드랑이가 간지러웠으면
천년 동안이나 저렇듯 미소를 지우지 않고 지내왔을까
지금이라도 다복솔에 붙어서 우는
매미의 날개를 얻어서
승천을 거들고 싶다
날개가 돋다 만 자리를 자꾸 만지는 나그네에게
운주사 와불은 빙긋 미소만 지어 보일 뿐
하늘로 올라가는 게
꼭 좋은 건 아녀
멀리만 보지 말고
내 곁의 아픈 가슴에게
꽃향기 한 올이라도 건네봐
미소를 지을 뿐
등을 보이지 않는다
겨드랑이 사이로 어린 나그네는
돋다 만 날개를 찾아다니고……
- 박몽구 시집, 〈개리 카를 들으며〉, 문학동네, 2001
시를 읽고 나니 내 겨드랑이에도 날개가 돋은 듯 간지럽다. 간지러움은 첫 행부터 시작된다. “얼마나 겨드랑이가 간지러웠으면/ 천년 동안이나 저렇듯 미소를 지우지 않고 지내왔을까” 읽기만 해도 와불의 간지러움이 전달돼 키득키득 웃음이 나온다. 양쪽 겨드랑이에서 무엇이 스멀스멀 솟아나온 듯 온몸으로 웃음이 퍼지며 간지럽다.
하지만 시인에게 그 간지러움은 그냥 간지러움이 아니다. 매우 역동적인 간지러움이다. 시인 자신이 “지금이라도 다복솔에 붙어서 우는/ 매미의 날개를 얻어서/ (와불의) 승천을 거들고 싶”은 간지러움이다. 시인은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서 지내며 미소만 짓고 있는 와불(臥佛)의 모습에서 승천하지 못한 부처님(혹은 중생들)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다복솔에 붙어서 우는/ 매미의 날개를 얻어서(라도)/ (와불들의) 승천을 거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또 거기까지가 인간의 한계임을 이내 깨닫는다. 시인은 곧바로 2연에서 자기의 생각이 얼마나 가당찮은 인간의 욕심 자리인지를 알게 된다. “날개가 돋다 만 자리를 자꾸 만지는 나그네”가 되어 와불의 승천을 돕고 싶지만, “운주사 와불은 빙긋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인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가당찮고 세속적이었던가를 조용히 알아차린다. 다복솔의 매미 날개를 얻어서라도 자신의 승천을 돕고 싶어하는 시인에게 운주사 와불은 “하늘로 올라가는 게/ 꼭 좋은 건 아녀”라고 점잖게 타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멀리만 보지 말고”(이상만 쫓지 말고), 지금 당장 “내 곁의 아픈 가슴에게/ 꽃향기 한 올이라도 건네봐”라고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가르침을 준다.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기실 이것이다. 이상만을 쫓아 허허로운 삶을 살지 말고 지금 당장 내 옆에서 아파하고 신음하는 이웃(중생)들을 위해 지금 현재의 삶을 잘 살라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와불이 추구하는 세상이고 우리 중생들이 추구해야 할 현세의 삶인 것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운주사를 찾고 운주사 중에서도 와불을 찾아 시를 읊고 노래한 것도 바로 와불에 숨어 있는 그러한 뜻 때문이다.
그렇건만 박몽구 시인은 그것을 다 알아차렸으면서도 마지막 3연에서까지 겨드랑이의 간지러움-승천의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겨드랑이 사이로” “돋다 만 날개를 찾고 다니는” “어린 나그네”로 묘사한다. 여기서 중요한 시어가 등장한다. 바로 “어린 나그네”의 “어린”이다. 처음 시작할 때는 “날개가 돋다 만 자리를 자꾸 만지는 나그네”였고, “지금이라도 다복솔에 붙어서 우는/ 매미의 날개를 얻어서/ 승천을 거들고 싶”은 “나그네”였지만, “하늘로 올라가는 게/ 꼭 좋은 건 아녀/ 멀리만 보지 말고/ 내 곁의 아픈 가슴에게/ 꽃향기 한 올이라도 건네”보라고 일러주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 “나그네”는 “어린” 나그네로 변한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어린”은 그냥 생물학적으로 ‘어린’도 되지만 “하늘로 올라가는 게/ 꼭 좋은 건 아녀/ 멀리만 보지 말고/ 내 곁의 아픈 가슴에게/ 꽃향기 한 올이라도 건네”보라고 와불의 미소 법문을 들었지만, 아직도 승천의 꿈-욕구-탐진치를 다 버리지 못한, 그래서 아직도 “돋다 만 날개를 찾아다니고” 있는 어리석은 중생을 뜻하고 있기도 하다. 이 시가 명작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처럼 지극히 인간적이고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천불산 기슭에 위치한 운주사는 와불 외에도 천불천탑으로 유명하다. 천 개의 부처님과 천 개의 탑이 와불을 중심으로 새 시대를 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정우 작가는 운주사를 ‘실패한 자들의 임시 망명정부’라 했고, 장길산의 저자 황석영은 “세상의 모든 천민이여 모여라. 모여서 천불천탑을 세우자”라며 새 세상을 향한 민중의 염원을 운주사에 담았다. 또 시인 임동확은 〈몸체가 달아난 불두에〉라는 시에서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한 열망들이 드디어 찾아낸 스스로들의 유배지”라며, 운주사를 역시 “임시 망명정부”라고 칭했다. 필자도 젊은 날 격정의 한때 〈설국(雪國)〉이라는 시에서 “내가 선 자리에도 연등(燃燈) 같은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눈나라 사람이 된 천불천탑(千佛千塔)들 잠든 와불(臥佛)을 깨워 새 세상 새천년을 일으키고 있었네”라고 썼다.
이 감상을 쓰는 내내 겨드랑이가 근질거렸다. 지금도 겨드랑이에서 매미 날개가 돋고 있는 것 같아 간지럽다. 간지러운 것 하나로 박몽구 시인은 와불의 미소를 영원한 미소로 바꿔 놓았다.
비유 내용은 다르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다. 이 역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파헤친 말이지만, “하늘로 올라가는 게/ 꼭 좋은 건 아녀/ 멀리만 보지 말고/ 내 곁의 아픈 가슴에게/ 꽃향기 한 올이라도 건네”보라는 와불의 미소 법문에는 견줄 바가 못 된다. 승천은 저 먼 어디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자비희사의 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