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애월읍에는 ‘유수암(流水岩)’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유수암천(泉)’의 비석에는 “한라산 서북 나래 드리운 곳에 우뚝 솟은 절마루! 그 아래 십리에 봉소형(蜂巢形)을 이루었고 감천이 용출하니, 유수천(流水泉)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 맑은 이 숲에 마을이 태동한 것은 삼별초가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삼별초의 김통정은 고려 원종 12년인 1271년 진도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게 패하자 남해현의 유존혁과 합류해 제주로 들어왔다. 제주에는 이문경의 삼별초가 고려의 김수와 고여림의 군사를 꺾고 승기를 잡은 상태였다. 제주에 입도한 삼별초는 항바드리에 성을 쌓고 1272년부터 도서 및 연안을 공격하며 전선 구축에 나섰다. 〈유수암리지〉에 의하면 이 시기에 삼별초군과 함께 제주에 들어왔던 어느 고승이 지금의 유수암 절동산 아래 맑은 샘을 발견하고 그 언덕 아래 사찰을 창건하여 불사를 시작한 것이 이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
〈북제주군의 문화유적〉에 의하면 이 유수암리 절동산 사찰은 ‘태산사(泰山寺)’로 명명하고 있다. 유수암천 남쪽의 고대사찰 추정지에서 ‘태산석(泰山石)’이라고 음각된 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태산사는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절동산 하단에 흐르는 유수암천을 중심으로 동·서·남쪽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절터의 경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는 다량의 유물 등이 산포되어 있음이 확인됐다. 이 유물들 중에서 도질토기나 청자백상감편 등으로 보아 사찰 창건연대는 12세기 이상으로 소급한다. 유수암천에서 유물산포지를 지나 동산으로 오르는 길에 설치된 계단은 마을 중심부의 절동산에 사찰 건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구전에 의하면 1273년 여원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색이 짙어진 김통정은 홀로 남은 늙은 어머니와 가족들을 이곳 유수암사지로 피신시키고, 한라산 붉은오름에서 최후의 혈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자결로서 항쟁을 끝냈다. 〈고성리지〉에 의하면 당시에 유수암사지의 감실로 피신한 그의 어머니는 “이곳에서 불빛이 보이지 않게 되면 입구를 막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곳은 말린 눈비아기풀의 불빛으로 7일 동안 밝혀졌다. 그러나 결국 그 마른 풀빛마저 꺼졌고 감실의 입구가 닫히면서 김통정의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대로 그곳에 묻히게 되었다.
이런 사연으로 감실은 ‘종신당(終身堂)’이라 불리게 되었다. 비록 1987년 이 유수암사지 구역에서 발견된 비가 마모가 심하여 ‘태산석(山石)’인지, ‘태암(岩)’인지 알기가 어렵고, 작은 불상을 모시던 감실 종신당이 ‘태산감당’인지 ‘태암감당’인지도 정확하지 않으나 그곳에 서린 옛이야기는 아직도 선연한 물줄기처럼 흘러 내려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수암리지〉에서는 감실에서 생애를 마친 여인은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했던 승화후 온의 부인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비 오는 날 유수천을 지나 태산사 계단을 올라 바라본 제주의 바다는 애련하다. 여·몽전쟁 당시 제주의 해안가에는 방어용 돌담이 세워졌다. 시작은 삼별초군을 막기 위해, 다음은 그들을 지킬 목적으로 돌담은 점점 길어져 제주를 둘러 ‘환해장성’이 되었다. 그 노동은 온전히 민초들의 몫이었다. 오늘도 그들의 피땀과 눈물은 곰보돌 무더기가 되어 헐리어진 채 거센 시류의 풍랑 앞에 서 있다.
[인현 스님의 제주 山房日記] 유수암 태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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