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회광반조 1
-멀리 가지 마.
물고기처럼 헤엄쳐 나가는 그녀를 보며 내가 말했다. 갑자기 싸아한 냉기가 전신을 엄습했다.
-나 잡아봐요.
그녀가 영화 속의 여배우처럼 웃으며 소리쳤다.
헤엄에 자신이 없던 나는 추운 아이처럼 팔짱을 끼며 소리쳤다.
-멀리 가지 말라니까!
그녀가 점점 멀어졌다. 출렁거리고 있는 것은 부표인가 그녀인가?
갑자기 그녀가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내가 소리쳤다.
그녀가 계속 허우적거렸다.
-왜 그래? 장난치지 마!
-살려줘요.
그녀가 소리쳤다.
그제야 누군가 물속에서 그녀를 당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번쩍 눈을 떴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벌써 차창 밖은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그녀를 물속으로 데리고 가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꿈은 모질다.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향해 나는 잠수부처럼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발을 잡은 검은 물체를 주먹으로 쳤다. 검은 물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더 깊은 바다 속으로 끌었다. 누군가 건져낸 그녀 앞에서 울고 있는 사내는 분명히 나였다.
-정애야!
왜 그때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을까? 움직여 그녀와 함께 갈 수 있었다면 차라리 이 험난한 세월을 살아내지도 않았을 것을. 그래서 붓다는 인생을 고라고 했던가?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자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코를 골고 있는 건 심 작가였다. 미카엘 기자는 작가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송 서화가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손으로 턱을 바친 채 차창 밖에 시선을 붙박고 있었다. 내가 부스럭거리자 시선을 돌렸다.
-몹시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송 서화가가 말했다.
-그러네요. 왜 좀 눈 붙이지 않고요?
-아직은 견딜 만하네요.
사알리 역에 닿은 것은 새벽 5시. 로봄인쿠로까지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길을 물어가며 세 번 정도 갈아타서야 로봄인쿠로로 들어설 수 있었다. 소읍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더니 산 너머를 가리켰다.
-저 산 너머에 있다오.
무작정 산길로 접어들었다. 잠시 걷다 보니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마을 아낙들이 모여 빨래하고 있었다. 목이 말랐던 참이라 물을 마시고 가자고 했다. 넷이 다가들자 아낙네들이 힐끔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산을 넘으려고 하는데 목이 마르군요. 물 좀 마시고 가겠습니다.
뚱뚱한 오십 대의 여자가 볼살을 실룩이며 그러라고 했다. 넷이 물을 마시고 걷는데 중년 사내가 삽으로 땅을 파놓고 그 속에 불을 피우고 무엇인가를 태우고 있었다. 구덩이 주위의 풀을 모두 베어 말끔했다. 불길이 풀숲으로 번질까 해서 손을 본 것이 분명했다.
-아주 불길이 사납구먼요.
송 서화가가 이상한 정도로 호기심을 나타내면 그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살펴보았더니 그럴 만도 했다. 사내가 태우고 있는 것이 종이에 그려진 그림과 노트였다. 사내가 다가오는 송 서화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생김새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단박에 알아챈 표정이었다.
-필요 없는 것들이라 태우고 있다오.
-아이고 아주 값진 것 같은데….
-내 아들놈 것이라오. 무슨 귀신이 붙었는지 이런 것이나 갖고 놀고 있으니…. 그래 내 오늘 큰맘 먹고 태우고 있는 거라오.
-그런데…?
송 서화가가 아랫마을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나는 그의 말을 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왜 집이나 공터, 들판에서도 태울 수 있을 터인데 산으로 올라 태우고 있느냐는 말이었다.
-제 놈이 아끼는 것들을 가지고 나가자 아들이 눈을 뒤집었다오. 설마 아비가 산으로 올랐을 줄이야 어떻게 알겠소.
사내가 마지막 그림을 태우고는 시원하다 하는 표정을 짓다가 성 서화가와 그의 일행을 새삼스럽게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이 나라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산 너머 마을로 가는 길입니다.
-왜 요즘 그 우물에 관심을 내는지 몰라.
사내가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송 서화가가 물었다.
-그 우물을 찾아가는 길이 아니오?
-우물이라니요?
-아니오? 난 또….
아랫마을에 붓다 생존 시 제세 중에 물을 긷던 곳이 있다고 하였다. 요즘 그 우물이 소문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하였다. 그가 말하는 무상사(無上士)라는 말이 별스럽게 들렸다. 무상사는 석가모니 붓다의 다른 호칭이다. 붓다는 정(情)을 가진 존재 중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친 호칭이 무상사다. 여래나 부처, 붓다라고 부르지 않고 정을 가진 사람으로 평등(平等)하게 본다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이내 그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럼 그 마을에 왜 가시오? 아, 그 수토파!
-수토파?
-우물 옆에 있는 아소카 왕이 세운 사리탑을 보러 왔구려.
송 화가가 넘겨짚는 사내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아, 네.’ 하고 입을 닫아버렸다.
-하긴 신묘하긴 신묘하지.
-네?
-그 안에 무상사의 사리가 들어 있다고 하는데 가끔 그 속에서 영서(靈瑞)가 일어난다오. 그것이 명계의 신들이 내려와 경배할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는데 귀 밝은 이는 그때마다 하늘에서 연주되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고도 하거든. 하기야 거기가 미륵보살님의 본거지니 그럴 수밖에.
-그렇게 유명한가요?
송 서화가의 물음에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 탑의 내력도 모르고 무작정 보러 온 것이오?
-와 본 이들이 자꾸 가보라고 해서.
송 서화가가 어울리지 않게 뒷머리를 끄적거렸다. 사내가 기가 차다는 듯이 잠시 아랫마을을 바라보고 섰다가 송 서화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탑 뒤쪽에 범지(梵志)라는 연못이 바로 그 연못이라오.
-연못?
송 서화가가 되뇌자 정말 답답하다는 듯이 사내가 송 서화가 앞으로 돌아섰다.
-무상사가 살아 계실 때….
그렇게 시작된 사내의 말은 이러했는데 내게는 무상사라는 호칭이 역시 별스럽게 들렸다.
무상사 생존 시 바라문이 음녀를 죽이고 부처님을 비방한 장소가 있는데 그 연못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 마을에 한 음녀가 살았다. 외도에 홀린 여자였다. 그녀는 외도의 말에 홀려 무상사를 비방하고 돌아다니다가 고목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외도들은 얼씨구나 하고 무상사와 그녀가 정을 통해 그녀를 죽인 것이라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그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으나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데바닷다라는 무상사의 피붙이가 있었는데 질투가 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재능만은 출중했다. 무상사의 아내가 처녀였을 때 샤카족 야쇼다라 공주를 사이에 두고 연적 관계에 있기도 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무예 시합에 패하고 야쇼다라를 무상사 즉 싯달타 왕자에게 빼앗김으로써 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갖게 되었는데 싯달타가 궁을 나가 깨달음을 얻은 뒤 카필라성으로 돌아오자 그에 교화되어 같은 왕족 출신인 바드리카, 난타, 아니룻다 등과 함께 출가했다.
데바닷다는 유독 지식욕이 강했다. 시기심 또한 강한 인물이었다. 그의 지식욕은 무서울 정도였다. 출가하고 언제나 무상사 곁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무상사는 그것을 나무라곤 했다.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그때까지도 자기 아집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기 아집이란 것이 별다른 게 아니었다. 자기식의 사상을 만들어내고 불법을 효도했다. 원채 머리가 영리하다 보니 이것저것 어깨너머로 들은 지식을 이용해 도반들과 불법을 비판하기를 좋아했고 도반들은 그의 폭넓은 지식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상대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만큼 아는 게 많았다는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무상사는 데바닷다를 불러 호되게 나무랐다. 끝내 그는 교만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교단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야심을 품고 기회를 노렸다.
어느 날 당시 천축에서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 라자가하에서 빔비사라 왕 등 여러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무상사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무상사여, 그대는 이제 연로하여 편히 쉬실 때가 되었습니다. 차후 제가 교단을 통솔하겠습니다.
무상사는 분수를 모르는 그를 나무랐다. 그보다 더 뛰어난 제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의 오른편에 설 수 있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에게도 맡기지 않은 교단을 맡기라고 나섰으니 나무랄 만도 하였다.
이에 분개한 그는 교단을 뛰쳐나가 빔비사라 왕의 아들 아쟈타삿투를 찾아갔다. 왕자는 부왕이 석존을 믿고 외호하는 것과는 반대로 교단 내에서 유력한 인물로 믿어지는 데바닷다를 주목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에게 왕위를 찬탈할 것을 꾀하였다.
-이제 당신은 부왕을 죽이고 왕이 될 때가 되었습니다. 나도 무상사를 없애고 교단의 주인이 되겠습니다.
권력욕이 무척 강했던 왕자는 그의 말대로 왕위를 찬탈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무상사를 살해하려 했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자객을 보내 무상사가 지나는 길목의 산 위에서 큰 돌을 떨어뜨렸다. 무상사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자객들이 무상사에게 교화되고 말았다.
그는 며칠 후 포악한 코끼리를 보내 무상사를 죽이려 했다. 역시 코끼리도 주인 앞에 선 개처럼 무상사에게 순종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수포가 되자 그는 베살리 출신의 수행자 여러 명을 회유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무상사의 제자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찾아가 수행자들을 설득했다.〈계속〉
▶한줄 요약
로봄인쿠로 들어선 이 기자 일행은 마을에서 아소카 왕이 세운 사리탑에 대한 전설을 듣게 된다. 전설은 붓다와 데바닷다의 이야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