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이상국의 ‘오래된 사랑’
오래된 사랑/ 이상국
백담사 농암장실 뒤뜰에
팥배나무꽃 피었습니다
길 가다가 돌부리를 걷어찬 듯
화안하게 피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몇 백 년이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햇살이 부처님 아랫도리까지 못살게 구는 절 마당에서
아예 몸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
지나가는 바람에도
제 속을 다 내보일 때마다
이파리들이 온몸으로 가려주었습니다
그 오래된 사랑을
절 기둥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바라봐주었습니다
- 이상국 시집,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비, 2005
〈감상〉
이 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세 번, 숨이, 칵, 막혔다. “여기까지 오는데/ 몇 백 년이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에서 한 번, “아예 몸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 지나가는 바람에도/ 제 속을 다 내보일 때마다/ 이파리들이 온 몸을 가려주었습니다”에서 두 번, 그리고 “그 오래된 사랑을/ 절 기둥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바라봐주었습니다”에서 세 번 숨이 막힌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아예 몸을 망치기로 작정한 듯/ 지나가는 바람에도/ 제 속을 다 내보일 때마다/ 이파리들이 온몸으로 가려주었습니다”에서는 오르가슴 같은 절정을 느꼈다. 어느 시인이 있어 팥배나무 화안한 속내와 그를 가려주려는 이파리들의 온몸의 사랑을 이리 뜨겁게, 그러나 애틋하고 애절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이상국 시인의 그윽하고 애틋한, 그러나 따뜻한 시안(詩眼)의 마음이 아니고는 도저히 퍼 올릴 수 없는 사랑의 심연이다.
그런데 이상타. 팥배나무꽃은 하얗다. 그래서 이상국 시인도 ‘화안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내 색맹의 마음은 이 시를 자꾸 붉은 색으로 읽는다. 어디서 그런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있을까. 그것은 팥배나무의 ‘팥’에서 팥의 색깔이 먼저 연상되기 때문이다.(실지로 팥배나무는 꽃이 지고 난 다음에는 팥처럼 붉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팥배나무의 꽃은 온통 하얀색이다. 그러기 때문에 “화안하게 피”어 오르는 시어가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심상을 추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시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시인은 “백담사 농암장실 뒤뜰”에 갔다. 그런데 팥배나무가 화안하게(하얗게) 피었다. 그것도 “길가다 돌부리를 걷어찬 듯/ 화안하게 피었”다.(아, 길가다 돌부리를 걷어차면 얼마나 아픈가. 정신이 확 돌만큼 아프다 못해 얼얼하다.) 그런데 그것을 이상국 시인은 “화안하게 피었”다고 자신의 아픔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첫 번째 복선을 깔아놓았다. 두 번째 복선은 바로 다음 행에서 시작된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걸어오는데(달려오는데) 몇 백 년이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햇살이 부처님 아랫도리까지 못살게 구는 절 마당에서/ 아예 몸을 망치기로 작성한 듯/ 지나가는 바람에도 제 속을 다 내보일 따마다/ 이파리들이 온몸으로 가려주었”다는 대목에서 필자는 곧 자지러지는 듯한 애처로움을 느낀다.
“햇살이 부처님의 아랫도리까지 못살”게 굴다니, 이런 망측한 일이 어디 있는가. 관능도 이런 관능이 없다. 그런데도 관능보다도 애처로움이 더 앞서는 까닭은 무엇인가. 비로소 우리들의 눈길은 그 다음 행에 가서 멎는다. 바로 “오래된 사랑”이다. 조강지처보다 더 “오래된 사랑”이기에 그것은 관능이 아니라 대자대비의 관세음보살과 부처님의 보살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상국 시인과 함께 “절 기둥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그것을 바라보며 “오래된 사랑” 속으로 침잠해든다.
사실 팥배나무는 외로운 꽃이다. 군락을 이루지 않고 한 그루씩 드문드문 자라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중생들의 외로운 모습을 상징한다. 대중 속의 고독. 우리 중생들과 팥배나무는 그런 점에서 매우 닮아 있다. 또한 개별자로서 우리는 팥배나무처럼 누구나 한 사람 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사랑은 어쩌면 고해를 헤쳐 나가는 우리 중생들의 고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행이 있기에 우리들 사랑은 속곳까지 다 드러내보여도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부처님의 자비 광명의 이파리가 우리들의 속곳을 온몸으로 가려준다. 그것이 이 시의 발화점-오래된 사랑이다. 그 발화점이 없다면, 부처님의 자비광명의 이파리는 물론 우리 개별자-팥배나무로서의 의미도 무참해지고 만다. 아니 몇 백, 몇 천 년을 이어온 우리들의 사랑법(불교)도 ‘똥 막가지’ 하나에 불과하다. 팥배나무와 우리들의 사랑, 부처님과 우리들의 참 오래된 사랑, 참 장하고 거룩한 사랑이다. 불과 14행에 불과한 이 시가 더 큰 희망과 먹먹한 감명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불순한 생각 하나. 이 시를 지독한 남녀상열지사의 천박한 사랑이 아닌 애틋한 사랑, 무궁한 사랑으로 승화시켜주는 것은 그 사랑이 “절(집) 기둥에 기대어/ 눈이 시리도록 바라봐”줄 수 있는 이상국 시인의 순백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의견은 하나도 제시하지 않은 채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이 시를 보편적 사랑을 뛰어넘는 절대적(아가페적) 사랑으로 변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땀기 흥건한 사랑이 아닌 애처롭기 그지없는 그윽한 사랑을 맛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엄경〉과 〈대승기신론〉에 수연불변(隨緣不變)이라는 말이 나온다. 변화무쌍한 세상의 이치를 따르지만 그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래된 사랑’이 그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외도를 하고, 인연들이 변해도 ‘부처님과 나’, ‘부처님과 우리’의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국 시인이 구태여 농암장실(聾庵丈室)을 끌어들인 것도 결국은 그것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농암장실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귀머거리 방’이기 때문이다. 제 속곳까지 다 내보이는 사랑이지만, “이파리들이 온몸으로 가려주”는 수화(手話)의 사랑이기에 이 오래된 사랑은 더욱 애틋하고 처연한, 그러나 따스한 사랑이 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