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불교인문학살롱] 16. 소설가 샐린저의 문학세계

美물질주의 경종 울린 ‘영성의 문학가’

〈호밀밭 파수꾼〉으로 유명한 샐린저
소설 주인공 홀든 시선으로 사회고발
1940년대 禪에 심취…힌두교도 관심
〈테디〉 등 선불교 관련 작품들 다수

미국 소설가 J. D. 샐린저(1919~2010)는 선불교 수행과 힌두교 사상에 심취했던 작가다. 그의 〈호밀밭 파수꾼〉은 미국 기성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물질만능주의의 폐해를 꼬집은 작품이다. 
미국 소설가 J. D. 샐린저(1919~2010)는 선불교 수행과 힌두교 사상에 심취했던 작가다. 그의 〈호밀밭 파수꾼〉은 미국 기성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물질만능주의의 폐해를 꼬집은 작품이다. 

1940년대 미국 소설가로 J. D. 샐린저(1919~ 2010)라는 특이한 작가가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지구촌을 휩쓴 상실과 부조리, 히피와 탈(脫)이데올로기 시대에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단 한 권의 장편소설로 영문학의 총아가 됐다. 헤밍웨이와 윌리엄 포크너가 일으킨 현대문학의 광풍이 소진된 공백기에 그의 출현은 불가피한 시대적 단면이었다. 

샐린저는 작품에 못지않게 그의 인생론과 개인생활이 더 많은 관심을 끈다. 개인생활의 노출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미국문학이 지니는 하급층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종교적 분위기를 지닌 작품을 발표해 기성 미국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모더니즘의 급변기에 접어들었다. 유태인과 흑인 등 소수인종문화의 등장, 페미니즘과 생태주의 인식, 반전운동과 탈식민주의라는 조류는 질서와 전통을 존중하던 기존문학에 반성적 성찰을 요구했다. 미국은 더 이상 유럽형 문학을 고수할 수 없었다. 새롭게 인식할 세상이 필요하고 신비적으로만 여긴 동양사상과 선(禪)적인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동양적인 인간 존재의 문제를 서구 문명사회에 이식하여 소설화한 인물이 샐린저다. 

샐린저는 전기적 사실에서 남다른 이력을 보여준다. 사업가인 유태인 아버지와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명문학교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 만에 퇴학당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밸리포지 사관형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역시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했다. 또한 학창 시절 연기에 소질을 보여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사업가가 되기를 바랐던 부모에 의해 좌절당했다. 

다행히 맨해튼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해 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작가로서 활동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갖는다. 그동안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 도살장에 취업하지만 생명을 죽이는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고 2차 대전 동안 종군기자로 참가해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를 맡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 트라우마는 후일 그가 채식주의자가 되고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동기가 된다. 나아가 시골 지방에 칩거한 그만의 고립 생활은 2010년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샐린저는 처음 단편작가로 등장할 때 “찰나적인 영감으로 썼다”고 회상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실비아 웰트와 결혼하였으나 이내 별거했고, 이후의 세 차례 결혼도 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대신에 동양종교와 사상이 그의 삶과 문학의 주춧돌로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1940년 후반부에 선불교의 열렬한 신자가 되었고 1952년 이후에는 힌두교에 심취했으며 그 후에도 종파적 관심은 수시로 달라 1955년 이후에는 한동안 미국에 있는 힌두사원에 거주하며 참선 수행을 했다. 그의 선 수련은 이에 그치지 않아 자신의 신앙적 이론을 〈테디〉라는 단편을 통해 발표하기도 했다. 샐린저는 1967년 뉴햄프셔 주 시골 클라리 와이온으로 이주한 후 가족이 사는 집과 마주하는 길 건너편 코로니스 301 랩 로드에 집을 따로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거주했다. 

〈호밀밭의 파수꾼〉(1951)을 위시한 그의 장·단편 소설 대부분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 중반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있다. 이 시기는 샐린저가 서구형의 세속적인 욕망과 동양의 경건하고 종교적인 삶 사이에서 방황하던 때와 일치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코필드는 당시 샐린저의 분신이라고 할 만하다. 그 후에는 소설(시와 드라마를 쓰기도 하였다)보다는 종교적 삶에 집착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완벽주의적이고 선악의 이분(二分)이 분명했다. 소설의 익명성에 자신을 담았던 후반기에는 “선사상에 심취하여 명상과 글쓰기를 동등한 것으로 여겼고, 자아를 떨쳐 내려고 노력했다”는 심중의 고백처럼 결국 초연한 삶을 택했다. 

샐린저의 심적 세계와 종교적 자애심을 대변하는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 코필드는 1펜시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16세 학생이다. 작가처럼 성적 부진으로 세 차례 퇴학당한 그는 3일 반 동안 뉴욕 도시를 돌아다니면 갖가지 경험을 한다. 뉴욕은 가식과 거짓과 타락이 만연한 기성사회다. 타락한 자본주의 문명이 판을 치는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라고 할까. 그는 피카레스크적인 주인공으로 어른의 행동을 흉내 내면서 생의 모험을 이어간다. 작별인사를 하러 스펜서 선생님의 집을 찾아가고 기숙사로 돌아와 룸메이트 워드와 여자를 사이에 두고 싸우고 충동적으로 짐을 싸 그날 밤 뉴욕으로 향한다. 

퇴학 통지가 집으로 우송되기 전에 술 담배를 하고, 옛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옛 친구와 만나고 호텔에서 여자와 자려다 15달러를 갈취 당한다. 수녀를 만나 10달러를 기부하고 여동생이 보고 싶어 밤중에 아파트로 숨어든다. 오빠가 학교에서 다시 퇴학당한 것을 알아챈 동생 피비가 뭘 하고 싶으냐고 물을 때 홀든은 소설 제목이 된 희망을 이야기한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 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다시 집을 나와 앤톨리니 선생 댁에 가지만 성추행을 당하여 충격을 받은 홀든은 마지막으로 피비를 보고 서부로 떠나려 한다. 다음 날 아침에 피비가 다니는 학교를 찾아가 학교 담벼락에 그려진 외설적인 낙서를 지우고 다닌다. 이후 그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 작품은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세상을 청소년의 시선을 빌어 고발한다. 3일 반에 걸쳐 목격한 뉴욕은 쾌락과 허식의 세계이다. 홀든의 행적은 방황이면서 무엇인가의 목적지로 향하는 탐색이며 순례다. 사회는 위선과 허구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그가 다녔던 펜시고등학교는 말을 타고 폴로를 즐기는 학생들의 사진으로 광고하지만, 학교에는 말이 없다. 그런 기성세대가 과연 세상의 거짓을 책임지고 젊은이들의 방황에 충고할 의향이 있는가를 작품은 묻는다.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급격하게 성장한 홀든은 기성세대의 추악한 면을 알았으므로 자신이 아이들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구체적으로 학교 담벼락에 쓰여 있는 외설적인 욕설까지 지우기도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기성세대가 어지럽힌 세상을 새롭게 정화시키려는 실천자이고 아이들이 더 이상 물들지 않도록 지켜주는 기사이다. 

어른들은 홀든을 문제 학생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기성사회가 그렇다고 여기는 그의 외양이다. 하지만 실재 그는 기성사회가 인식하기 어려운 고상한 기질을 지닌 ‘기사형 청년’이다. 사회는 자신들의 판단과 기준이 다르면 자기 식대로 믿어버린다. 그렇다면 그를 어떤 인간으로 봐야 할까?  

샐린저는 작품에 이런 명언을 적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하려는 것은 세상은 부도덕하고 가식과 위선의 정신병을 앓고 사람은 어른들이고 그런 사회에서 아이들은 정신적 혼란을 겪는다는 내용이다. 샐린저도 세상은 실재가 아닌 허상이 가득한 곳이라고 여긴다. 미국 작가 제임스 룬드 카이스트가 샐린저를 ‘심원한 종교적인 작가(a profoundly religious writer)’로 지칭한 말을 빌린다면 뉴욕, 미국, 나아가 현대사회에는 본질적인 것들이 거의 없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허상은 불교의 공(空) 사상에 닿아있다. 공(空)은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 중의 하나로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요약된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건만 문명에 취한 그들은 자신의 외양과 실재를 인위적으로 구분하려 한다는 것이다. 

홀든은 파계의 3일을 보내지만 매번 자신의 행동과 주변상황을 비평적으로 해석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일탈을 자각하고 있다. 여동생 피비의 말대로 지금까지 ‘좋아하는 것’이 없었지만 이제 ‘좋아하는 것’을 자각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구원의 목자가 되려하는 순간, 세상은 그를 정신병원에 보내버린다. 어쩌면 홀든은 그것마저 이미 알아차리고 스스로 선택한 길일지도 모른다. 작가 샐린저도 시대를 위한 펜으로 시대의 타락을 경고했지만 글의 한계를 인식하고 절필에 가까운 은둔을 선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샐린저에게는 동양 선(禪)을 소재로 한 단편도 적지 않다. 단편들은 미국의 허위(Phony)를 동양의 선사상으로 교화하려한 문제작으로 앞서 소개한 〈테디〉 외에 〈아홉 이야기들〉은 선불교의 시각에서 본 죽음과 윤회를, 〈프래니와 주이〉는 선 수행을 다뤘다. 2차 대전 후 다원주의 국제사회가 형성된 시기임을 감안한다면 샐린저의 작품정신은 미국의 물질만능과 가식의 세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임을 이해할 수 있다. 

샐린저의 소설은 변천의 시대와 상관없는 미국전통도 유지한다. 미국소설의 특징은 매번 변화하는 시대에 부응하는 아메리칸 아담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개척기의 립 반 윙클, 허먼 멜빌의 해양소설 영웅인 이쉬밀, 2차 대전 후에는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핏즈 제라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청년 개츠비, 마크 트웨인의 헉 핀 등은 미국 역사를 반영하는 아메리칸 아담들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코필드도 미국적 아담으로서 미국과 미국인의 허식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갖는다.

샐린저는 유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용감한 군인과 실패한 남편, 창조적인 열정으로 가득 찬 작가에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은둔을 택한 남자까지, 모두 한 인물 안에 들어 있다.” 그 인물이 ‘홀든 코필드’다. 그리고 홀든은 “이 세상에 있기는 했지만, 거기에 속해 있지 않았던” 불온한 시대의 이탈자이다.

▶박양근 명예교수는 1993년 〈월간에세이〉 에세이스트로 천료, 2003년 〈문학예술〉에서 ‘한흑구론’으로 문학평론가가 됐다. 국제한국본부 부이사장, 부산수필문인협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부경대 영문과 명예교수이며 부산국제문학제집행위원장, 영남수필학회장, 부경수필문인협회 지도교수를 맡고 있다. 각종 저술을 하면서 동서인문학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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