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일체유심조
어디에도 없는 세상과 어디에도 없는 나를 만들어 놓으면 본질에 대해 궁구하더라도 끝내 그 본질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기본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방향성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세상에서 배우는 방식처럼 앞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배우고자 하는 자에 대하여 객관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배우는 자가 살아온 나이와 경험은 진리와는 아무 연관성이 없음을 알고, 출발하는 순간부터 마음으로 일으키는 분별을 쉬고,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바르게 배우다가도 바로 몸이 살아온 나이와 경험이 그 배운 것을 덮어버리게 된다.
아마도 대다수의 수행자들은 순탄하고 어려움 없이 저절로 된다는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수행을 어려워하고 어렵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은 아주 쉽고 간단한 이치이다. 어려운 이치가 아니다. 먼저 수행할 때는 지식도 필요 없고, 느낌도 필요 없고, 체험도 필요 없고, 체득도 필요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불필요한 노력에 시간을 보내면서 힘들어 한다. 만약 그렇게 하고 있다면 바로 멈추는 것이 지혜이다. 수행은 무엇을 얻고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얻고 알아야 하는 것이 없음을 알고,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은 의식(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인 것을 알아서 더 이상 발을 앞으로 디딜 틈이 없어야 한다. 혹여 텅 빔을 알았다는 마음을 낼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허깨비일 뿐이다.
“사대의 인연이 화합하면 색상의 차이를 조성할 수 있지만, 사대가 조성한 색상은 그 조성하는 주체와 대상이 모두 유심 망상이 취하는 주체와 대상이네. 만약 주체와 대상이 망상이라는 것을 안다면 사물의 자성이 있다거나 없다는 두 망견을 벗어날 수 있네.”
여기까지 이야기해놓은 모든 것들이 잡다한 견해들이고 불필요한 논리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논리나 견해들이 수행에서 단비 같은 역할이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갈증을 더 유발하는 설탕물이다. 설탕물을 많이 마신다고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그냥 맑은 물이면 충분하다. 이것이 원하기만 한다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한 마지막 언어를 사용하여 마무리 아닌 마무리를 하게 된다.
지금까지 ‘나’라고 알고 ‘나’라고 해온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바르게 알고, 몸과 마음이 만들어 놓은 허상에 대해 견해와 논리를 펴지 않으므로 허물이 생기는 일이 없음을 안다. 그리고 어떤 세상이든 그것은 마음의 조작일 뿐이지, 더 이상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모르는 것도 아닌 그저 토끼뿔로 알면 된다. 만약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아마도 그에게는 아직까지 오온을 ‘나’라고 하는 망념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망념을 사라지게 하는 수행을 하거나, 그 망념을 좋은 마음으로 바꾸려는 수행을 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수행은 닦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연마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은 수행하는 자의 실체를 알아내는 것이다. 많은 태어남 동안 번뇌로 똘똘 뭉친 ‘나’ 아닌 것에 대해 올바른 지혜로써 ‘내’가 아님을 밝혀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느낌이든, 지각이든, 의도이든, 의식이든지 간에 그 출발이 ‘나’로 시작하니 그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로 헤매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 생각, 생각, 이어지는 그 생각의 끊음이 아닌, 그 생각 속에 있는 듯 없는 듯한 ‘나’라고 하는 그 범인의 끊음을 말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 ‘나’는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신출귀몰하여 모든 것에 붙어 ‘나’라고 할 필요 없이 ‘나’로 되어버리니 그 자가 일으키는 망념에 금방 속아서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 흐르는 생각 속에 끌려가지만 않으면 지금까지 ‘나’라고 알고 있던 그 물질, 느낌, 지각, 의도, 의식의 혼란에서 ‘내가 아님’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면 두 번 다시 속는 일 없이 다시 발을 움직일 일도 없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