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불생불멸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말이 있다. 선뜻 어떤 것이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유는 시작점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문제의 답에 빠지게 되면 헤어날 수가 없다. 문제의 답을 구하기 위해 일으키는 생각은 사유의 폭을 넓히지 못한다. 사유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묶여 있는 관념을 어떻게 풀어 놓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닭과 달걀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면 어떤 논리를 전개하더라도 나중에 자신의 궤변에 자신이 도로 갇히게 된다. 모양과 언어가 사용된다고, 그것이 존재한다고 단정하면 결코 안 된다. 존재성을 밝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는 존재성이라는 범위를 두리뭉실하게 사용한다.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우리의 신체는 많은 변화를 하지만 그 모든 변화된 모습과 상관없이 나로 인식하여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나’라고 정의하려고 하면 선뜻 ‘이것’이라고 말을 하지 못한다.그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그 순환 속에 자신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알려고 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이므로 알려고만 하지 않으면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 진리의 이치다. 진리는 부분도 아니고 전체도 아니다. ‘나’라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면, 순환 속에 나를 있다고도 하지 않고 나를 없다고도 하지 않으며, 안다고도 하지 않고 모른다고도 하지 않는 도리를 알게 된다.
“무상의 적정을 보아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빼어난 경계를 보았다고 할 수 있네. 빼어난 경계는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네. 만약 모습을 갖추고 있다면 생멸의 인(因)이 있는 것이니 빼어나다고 할 수 없네. 소위 무상이란 망상이 불생하고 불기하며 불멸하는 것으로 바로 내가 말하는 열반이네.”
세상의 사물은 시작과 끝이 없는 순환의 고리에 묶여 있다.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내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하나의 문제만 독립적으로 생겨난 경우는 없다. 꼭 하나의 문제인 것 같지만 그 하나의 문제는 모든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순환의 고리 가운데에서 찾아다니면서 분별하고 시비할 필요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경우이든지, 전체에서 하나가 빠진 전체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스스로의 일과는 무관한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부적인 대상에 대한 갈구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가장 가까이 있는 ‘나’라고 하는 자에 대한 바른 성찰이 필요하다. 이때 성찰의 의미를 마음대로 해석하여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인 생각으로 더듬더듬 두드리면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더듬더듬하는 자에 대한 의심이 필요한 것이다. 의심하기 위해서는 방편적으로 필요한 조건이 있는데 성찰하는 자와 성찰의 대상이 된 자에 대한 분리가 필요하다. 성찰하는 자는 움직임이 없는 자이고, 성찰의 대상이 된 자는 움직임이 있는 자라고 분명하게 알고 시작하여야 한다. 움직임이 없는 자는 움직임이 있는 자를 그냥 그대로 볼 뿐이지 어떠한 판단이 없다. 그러나 움직이는 자는 옳고 그름을 시비하고, 잘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분별할 것이다. 이때 자신을 성찰하는 자라고 믿고 성찰의 대상이 된 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 모든 선택이 즉흥적이라는 것을 안다. 옳음도 없고 틀림도 없고,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숫자를 그대로 말하는 정도일 뿐, 자신의 결정에 특별한 이유도 없다. 알고 나면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제까지 ‘나’라고 하고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새삼 보게 된다. 이때부터 성찰한다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지켜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
움직이고 변화하는 수행에서 움직임이 필요 없고, 변화하는 것이 필요 없고, 아는 것이 필요 없이, 오직 성찰하는 자로서 집중하는 모습에 즐거움이 생긴다. 안팎의 다툼은 사라지고, 무엇을 찾는 마음이 버려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에 물들지 않고, 의심하여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알고, 모양과 이름에 묶여 있는 오온이 내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서, 오고감이 없는 그것이 분명하였으니, 다시는 생로병사로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