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이 주는 생명·쉼의 에너지
속박 벗어날 때 일어나는 치유
존재는 도덕과 관계가 없는 것
의식에 따라 행동으로 나타나
“세상 살되 세상 것 되지 말라”
물질적 부족 나아진 현대사회
무엇을 추구할지 고민해봐야
오쇼 라즈니쉬 “명상밖에 없다”
명상·사랑으로 호흡 완전해져
이 세상에는 명상과 행위가 하나 될 때 완전한 성취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오래된 얘기지만 우리는 해방 후 1947년 미국의 보스톤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 선수의 마라톤 정신을 기억한다. 경기 중 길가에는 마라톤 선수들을 격려하려는 키스 축하객들이 몰려들었지만 서윤복 선수는 이들을 뿌리치고 달리기만 했다. 오로지 목표 외에는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길가에서 개가 뛰어들어 서 선수의 경기를 방해하여 넘어지면서 다른 선수들보다 뒤처졌다. 그러나 서윤복 선수는 좌절하지 않고 달렸다. 이처럼 서윤복 선수는 어떠한 유혹이나 위기의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달리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명상에도 적용된다.
명상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명상은 마음의 모든 잡다한 내용을 버리고 단지 존재하는 것이다. 명상은 그 상황에 온전히 깨어있는 것이다. 명상은 나와 존재 사이에 경계를 만들어내는 모든 장벽들을 무너뜨린다. 그 장벽들이 사라지는 순간, 문득 전체와 조화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슬방울이 연잎에서 미끄러져 호수 속으로 떨어질 때, 이슬방울은 자신이 호수의 일부라고 느끼지 않는다. 바로 호수 자체라고 느낀다. 명상은 그러한 상태에 존재할 때를 말한다. 서윤복 선수의 모든 행위는 명상상태에 있었고, 그 결과 온전히 한 개체로 존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붓다가 숲속을 걷고 있었고 더위로 인해 갈증을 느꼈다. 붓다는 제자 아난다에게 우리가 지나온 작은 시냇물에 가서 물을 담아오라고 탁발그릇을 주었다. 얼마 뒤 아난다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마침 우마차가 지나간 뒤라 그 물은 흙탕물이었다.
“좀 기다리셔야겠습니다. 다른 쪽으로 가면 큰 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서 물을 떠오겠습니다.”
그러자 붓다는 ”그냥 그곳으로 가서 다시 떠오라”라고 했다. 그리고 “물이 더럽더라도 기다렸다가 떠오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물이 더러우면 그저 조용히 시냇가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깨끗해지면 떠오라”고 덧붙였다.
아난다는 다시 그곳으로 가서 아직 깨끗하지 않은 물이 깨끗해질 때까지 냇가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리고 물이 맑아지자 다시 떠오며 붓다에게 감사했다. 무엇에 감사했을까? 아난다는 깨달았다. 마치 시냇물의 나뭇잎들, 진흙이 맑은 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듯이 마음속의 상처와 고통, 기억, 욕망들이 고요한 마음을 방해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많은 아픔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러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아픈 줄 모르거나 아픔을 치유할 줄 모른다. 치유는 더 이상 마음에 붙잡혀 있지 않을 때 일어난다. 마음으로부터 분리될 때, 비동일시 될 때, 완전히 벗어날 때, 속박이 끝날 때 치유가 일어난다. 현실을 바라보며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날 때를 기다리는 힘, 나라고 하는 현실을 초월할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다.
존재는 삶의 본질과 함께 하면서 에너지를 보존한다. 보존된 삶의 본질을 지속시키기 위해 명상을 한다. 내 스스로가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존재는 간섭하지 않는다. 존재는 영원하므로 급할 것이 없다. 존재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존재에 있어서는 옳은 일도 없고 그른 일도 없다. 존재는 사랑의 에너지로 살아간다. 오로지 자신의 각성과 자각에 따라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존재는 의식의 힘에 의해 행동으로 나타난다. 의식에 따라 개인의 삶의 패턴들이 형성된다. 먼저 개인의 행동이 바뀐다. 의식은 오직 침묵 속에서 성장한다. 침묵은 의식을 위한 올바른 토양이다. 머리가 혼란스러우면 깨어있거나 의식적이 될 수 없다. 의식은 순수하고 변함이 없다. 정말로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 행동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생각이나 행동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로 웃을 때 나는 깊은 명상적 상태 속에 있다. 웃으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말로 웃으면서 생각을 멈출 수 있다거나 만약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면 웃음은 단지 시늉을 하고 있거나 그저 웃음일 것이다. 정말 웃을 때 마음은 사라진다. 웃음은 무심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의 하나이다. 춤과 웃음은 모든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임종을 앞둔 말기암 환자는 그의 삶을 초월한다. 그는 생명이 눈앞에서 사라져가고 있음을 본다. 옆에 있는 가족들은 환자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지만 그는 편안히 웃으며 작별의 마음을 나눈다. 농담도 절로 나온다. 이미 삶이라는 것에 대한 미련이나 생각에서 벗어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적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잘 살고 있다. 먹고 살 걱정을 하기보다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한다. 그렇다면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걱정할 것인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물질 말고 추구할 것이 무엇인가? 오쇼 라즈니쉬는 이렇게 단언한다.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명상으로 습득한 영적인 마음은 물질과 영혼 사이에 어떤 구분도 두지 않는다. 물질과 영혼은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배추벌레는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배추벌레는 보디사뜨바들이다. 보디사뜨바란 나비가 될 수 있는 자, 붓다가 될 수 있는 자, 그 본질로서 붓다인 자를 의미한다. 하지만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유일한 방법은 나비들과 교류하는 것이다. 나비들이 바람 속을, 햇살 속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비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그들의 아름다움, 그들의 색깔을 보며 “나도 저들과 같아질 수 있을까?”라는 깊은 갈망이 일어난다. 바로 그 순간, 배추벌레는 깨어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과정이 시작된다. 이처럼 우리는 보디사뜨바로서 깨어있는 자와 더불어 수행을 한다면 누구나 배추벌레가 나비가 되듯 붓다(깨어있는 자)가 될 수 있다.
오쇼 라즈니쉬는 “명상이 중요한 것은 더 고요해지고, 더 이완되며, 더 평화로워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에 도달하기 위한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자기 자신의 의식의 중심은 전 존재의 중심”이라고 본 것이다. 명상은 내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오직 나만 전진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명상은 단순히 불행, 고통, 근심의 정반대 상태이다. 명상은 존재가 평화롭게 꽃피어나는 상태이다.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영원하게 느껴져서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명상적인 마음의 상태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하였다.
한편 오쇼 라즈니쉬는 “공동체로부터 달아나지 말라. 세상 속에 살아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관계하라. 사랑하고 명상하라. 명상과 사랑, 이것은 삶의 양극(兩極)이다. 이것은 궁극적 양극이다. 명상은 홀로 있음의 기술을 의미하고 사랑은 함께 있음의 기술을 의미한다. 완전한 인간이란 양쪽 모두를 알며 가능한 한 쉽게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명상과 사랑의 과정은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과 같다. 사실 우리가 숨을 들이실 때의 작용과 내쉴 때의 작용은 정반대이다. 그러나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하나의 완전한 호흡을 이룬다. 우리는 사랑 속에서 들이쉬고, 명상 속에서 내쉰다. 이처럼 사랑과 명상이 함께 할 때 우리의 호흡은 완전하고 온전하여 전체가 된다.
우리는 호흡을 하되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 하면서 호흡에 의존한다. 찬찬히 호흡을 해보자.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그러다가 들이쉬거나 내쉬는 것을 잠깐 멈춰보자. 그 순간 생명이 멈추는 위기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만큼 호흡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들이쉬고 내쉬면서 들이쉴 때 “사랑”이라고 말하고, 내 쉴 때 “명상”이라고 말해보자. 사랑은 생명의 에너지요, 명상은 쉼의 에너지다. 호흡을 통해 우리는 사랑과 명상을 보다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