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고통서 해방”…붓다·맑스가 그린 정토 세상
삶의 고통서 해방, 불교·맑시즘 지향점
자본주의 고도화 노동자 ‘소외’로 이어져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인간 소외’서 해방
맑스 주장, 現자본주의 사회 직시에 필요
불교와 맑스 상호 분석, 중생苦 해결 도움
“맑스주의와 불교는 동일한 과업을 서로 다른 수준에서 각각 수행하고 있다.”
이 인용문은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가 그의 역작 <슬픈열대>에서 했던 말이다. 한 때 맑스의 서적이 국가의 금서였고, 공산주의 국가와 적대적 관계를 경험한 한국인들에게 이 말은 매우 낯설게 들릴 수 있다. 혁명과 투쟁을 이야기하는 맑스주의가 어떻게 비폭력을 이야기하는 불교와 동일한 과업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맑스주의가 공산주의의 이론적 토대이기는 하지만, 맑스주의와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 러시아, 중국의 공산주의와는 차이가 있음은 주의해야한다.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 화엄이나 선의 가르침과 완전히 똑같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맑스주의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내려놓고 하나의 철학으로 맑스주의를 바라보면 의외로 불교와 만나 함께할 수 있는 지점들이 보인다.
자유와 해방을 위한 철학
맑스주의와 불교의 공통점은 둘 다 인간의 실존적 삶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인간을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이 태어나면서 겪게 되는 늙고, 병들고, 죽음 등의 실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그러면, 맑스주의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는가?
맑스가 살던 산업혁명의 시기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에서는 생산력이 증대하였고, 다른 산업에서는 대량생산으로 인해 사회 전체적으로 물질적으로 다양하고 풍요로웠다. 하지만,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이전보다 힘들고 고달팠다. 분명 중세시대의 농노시절보다는 자유로워졌는데, 노동자가 노동하면 할수록, 그들의 삶은 더 나빠졌다. 맑스는 이러한 노동자들의 불행한 상황을 ‘소외’라고 불렀으며, 이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모색하였다.
‘소외’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배제나 따돌림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철학에서 의미하는 소외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투영하여 만든 생산물과 분리되어, 그 생산물로부터 억압당하고 통제받는 것을 말한다. 소외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고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맑스의 소외 개념에 큰 영향을 미친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로부터 멀어진 소외의 원인을 신에게서 찾았다. 즉, 인간이 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인간의 이상적 본질들인 지혜, 사랑, 박애 같은 것을 신에게 부여하면서, 신은 위대한 존재로, 인간 스스로는 부족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인간은 신의 지배를 받으며, 자신의 본질로부터는 소외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반면, 맑스는 인간소외의 문제를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잘 알려진 바대로 그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제도는 경제적 토대에 의해서 형성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본질을 지혜나 자비 같은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노동으로 보았다. 그에게 노동이란 인간을 인간답고 자유롭게 살게 한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고, 신을 계발하고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생산물들 또한 원래는 인간의 본질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만든 것이므로, 내 소유물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함에도, 자본주의 구조에서 나의 생산물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노동자가 이처럼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린 이유는 그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자본가의 생산수단을 썼기 때문이다. 이로써 생산물이 자본가의 소유물이 되었고, 여기에서 소외의 문제가 발생한다.
노동자가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상황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로 이어진다. 이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시간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자본가의 통제를 받는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로써 노동자는 더 이상 자유로운 생산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인간 본질로부터도 소외된다. 생산물, 노동, 인간본질로부터의 소외는 인간이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보게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고,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상황에 이르게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개개인은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억압받고, 통제되는 비극적 고통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맑스는 이 소외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한다.
이처럼 불교와 맑스는 인간이 처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해방이 시대나 사회경제체제의 제약을 초월하여 인간의 실존적 굴레를 벗어나는 해방이라면, 맑스가 이야기하는 해방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라는 조건 지어진 상황에서의 해방이라는 차이가 있다.
변화하는 자아와 탐욕
둘 다 해방과 자유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불교와 맑스주의가 진단한 삶의 고통의 원인은 유사한 듯 다르다. 1차적으로 인간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탐욕과 이기주의이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에서 괴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불교는 삶의 고통의 원인을 인간자신과 세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찾으며, 맑스주의는 인간을 둘러싼 외적 조건인 사회구조에서 찾는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겪는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애착으로 보았다. 원래 존재에는 불변의 자아라는 것이 없으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은 불변의 자아가 있고, 영원할 것이라 믿기에 변화 속에 흘려보내야할 것들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서 유지시키고 있다. 다른 철학들과 다르게 불교는 이 문제를 바로 지적하며 인간이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쪼개어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다섯 가지 요소는 물질적 부분(색)과 감수작용(수), 인지작용(상), 의지작용(행), 분별하고 기억하는 작용(식)으로, 이 요소들이 순간순간의 결합하며 ‘나’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요소들의 결합을 변하지 않는 ‘나’로 보는 것이 왜 삶을 힘들게 할까? 흘러가야할 상처와 감정들을 나의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붙들고 되새김질하게 한다. 나를 안락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이것저것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며, 소유하지 못할 경우 좌절감을 심어준다. 나아가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죽음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외면하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 켠에 가지고 있게 된다. 그렇게 삶의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계속 쳇바퀴 돌고 있게 된다.
불교와 다르게, 맑스주의는 인간 삶의 고통의 원인을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아닌 외부의 경제구조에서 찾았다. 인간은 스스로 이해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는 힘인 생산력에 종속되어 살고 있다. 생산력이란 생산수단과 생산수단을 작동시키는 이의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돌절구로 농작물을 가공할 때, 돌절구와 돌절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능력을 합하여 생산력이라고 부른다. 생산력에 따라 생산관계가 만들어지고, 이에 따라 사회구조가 형성된다. 생산력이 달라지면, 생산관계가 변화하고 사회구조 또한 변화하게 된다.
근대 이전에는 생산력이 높지 않았고, 생산력에서 인간의 노동의 기여도가 컸기에 소외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였고, 잉여생산물에 대한 권한이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자본가(유산계급)에게 주어지면서 노동자들(무산계급)은 자신의 생산물과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예를 들어, 수작업을 통해 1시간에 한 벌의 옷을 만들던 것을, 공장의 기계를 통해 1시간에 3벌의 옷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노동자가 소외상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자가 세벌의 옷을 만들지, 한 벌만 만들고 쉴지에 대한 선택권이 노동자에게 주어지고, 추가로 만들어진 두벌의 옷에 대한 소유권의 일부가 노동자에게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구조에서는 노동자에게는 노동시간의 선택이 주어지지 않으며, 만들어진 두벌의 옷에 대한 소유권도 전적으로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한 자본가에게만 있게 된다. 이러한 자본주의 구조에서 자본가는 좀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여 수익을 올릴 것에만 치중하게 된다. 수익을 올리기 위해 노동자의 노동력을 더 착취하게 되고, 노동자는 더 소외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근대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간이 자연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여러 영역에서 자신의 계획대로 세상을 만들게 되었지만, 자본주의의 구조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탐욕스러운 존재가 되어 자본가든, 노동자든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여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된 상태가 되었다.
인간해방을 위하여
인간 존재의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 다르기 때문에 불교와 맑스주의는 그 해결방식도 다르다.
불교는 괴로움의 원인을 자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애착으로 보았기에 개인의 인식의 변화를 강조한다. 붓다는 팔정도를 제시하여,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바른 직업을 가지고, 바르게 집중하며, 쉬지 않고 열심히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맑스주의는 외부의 사회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았고, 외부의 사회구조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고 보았기에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가장 큰 문제는 사적소유와 사적생산수단으로 인해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적소유를 제한하고, 생산수단을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회구조로 변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의 혁명, 또는 개혁이다.
현재 상황을 보면 맑스의 방식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구조의 변화만으로 인간 욕망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방법들이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그의 분석은 여전히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직시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맑스주의에 비해 불교의 해방은 보편적이기는 하나 시의성이 조금 부족하다. 그렇기에 맑스주의와 불교의 분석과 제안을 서로 보완한다면, 오히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혜경 교수는
이화여대 사학과와 연세대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버지니아 주립대학 방문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가상현실 시대에 불교는 어떻게 응답해야할까’, ‘철학상담방법론으로서의 선불교 수사학’ 등이 있으며, 저서로 〈근대불교인물열전(공저)>, 〈철학 중독을 이야기하다 (공저)> 등이 있다. 현재 연세대 철학연구소 전문연구원, 경희대 강의교수, 희망철학연구소 연구교수로 활동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