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이애리의 ‘낙산사 홍련암’
낙산사 홍련암/ 이애리
한계령 단풍같이 고운 사람과
낙산사 홍련암 대숲 소리 들으러 간다
정암해변 조약돌이 동그마니 따라오며
홍련암 바람소리를 듣느라 여념이 없다
대숲의 바람을 그대 가슴으로 전해 들으니
살랑 사랑 바닷바람 사랑 살랑 산들바람
절에서 준비한 팥시루떡을 서로 입에 넣어주며
한계령 단풍 속으로 숨어들었다
- 이애리 시집, 〈동해 소금길〉 시로 여는 세상, 2019
이애리 시인에게 “한계령 단풍같이 고운 사람”은 누굴까. 누구이기에 함께 “낙산사 홍련암 대숲 소리를 (함께) 들으러” 갈까. (그이는 참, 복도 많겠다.) 그래, 낙산사 홍련암으로 가는 길엔 대숲이 무성했지. 무성한 대숲길이었지. 하지만, 그 대숲엔 무서운 비밀도 숨어 있었지. 최신식 총과 수류탄과 대검을 찬 무장 군인들이 대숲 깊숙이 은밀히 세워진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거든. 그냥 대숲길의 무성함만 보고 그 대숲 바람 소리와 만파(萬波)에만 취해 가면, 그 아픈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지나가지. 그 대숲 속 초소에 서서 밤낮으로 동해안을 경계하는 군인들의 심정은 어떨까. 그들의 마음에도 만파의 파도소리가 기쁘게 들려올까. 아침 수평선으로 떠오르는 일출이 멋과 낭만으로 느껴질까.
그런데 이애리 시인은 시침을 뚝 떼고 “정암해변 조약돌이 동그마니 따라오며” “홍련암 바람 소리를 듣느라 여념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대숲의 바람을 그대 가슴으로 전해 듣는다”고 한다. “정암해변 조약돌”이 “그대”임은 분명해졌다. 이 시를 쓰기 이전에, 아니 홍련암에 가기 이전에 시인은 틀림없이 “정암해변”에서 (알 수 없는) 그대와 ‘무슨 일’이 있었다. 그럼, 정암해변은 어디 있을까.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정암리 정암해수욕장 주변이리라.(정암해수욕장일 수도 있고.) 시인은 거기서 누군가와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조약돌밭을 걸으며 누군가와 어떤 약속도 하고 앞날을 얘기하고 문학을 얘기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 “그대 가슴으로” 지금 시인은 홍련암 가는 길에 있는 무성한 “대숲의 바람을 전해”듣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행이 멋들어진다. “살랑 사랑 바닷바람”이고 “사랑 살랑 산들바람”이다. 여기서 뒤바뀌어 반복되는 “살랑 사랑”과 “사랑 살랑”이 문제다. 사랑은 그야말로 남녀 간의 사랑이다. 문제는 ‘살랑’이다. 살랑의 사전적 정의는 ‘조금 사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모양’이다. 물론, ‘사랑’에 ‘ㄹ’자 받침 하나 덧붙이면 ‘살랑’이 되고, ‘살랑’에서 ‘ㄹ’자 받침 하나 빼면 ‘사랑’이다. 시인은 발음이 비슷한 살랑과 사랑을 뒤바꿔 두 번 반복하면서 언어미학의 맛과 멋을 살렸다. 또한 ‘바닷바람’은 ‘살랑 사랑’ 불고 ‘산들바람’은 ‘사랑 살랑’으로 분다고 묘사했다. 시인에게 홍련암 가는 길의 바닷바람은 (시원하고 가볍게 부는 바람) 산들바람이고 사랑바람이다. 그리고 (감히 단언컨대) 세상과 시인 자신을 스스로 애무하고, 세상과 시인 자신이 스스럼없이 사랑을 나누는 중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살랑’과 ‘사랑’은 동격이다. 같이 살아서 움직이는 파토스적 에로(erotic)다. 그것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강릉과 동해바다와 강원도에 대한 향토적 에로이기도 하다. 시인은 지금 ‘동해 소금길’(이 시집 제목이기도 함)과 열렬히 연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역신(疫神)을 쫓아내기 위해 동지팥죽을 먹는 것처럼, “절에서 준비한 ‘팥시루떡’을 서로 입에 넣어주며” 영원히 변함없고 병들지 않는 사랑을 약속한다. 그리고 “한계령 단풍”이 되어 “한계령 단풍 속으로 숨어”든다. ‘한계령 단풍 속’은 시인과 그 애인의 안식처이자 사랑의 보금자리인 것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한계령 단풍같이 고운 사람”의 ‘사람’과 “정암해변 조약돌이 동그마니 따라오며”의 ‘정암해변 조약돌’과 “대숲의 바람을 그대 가슴으로 전해 들으니”의 ‘그대’와 “절에서 준비한 팥시루떡을 서로 입에 넣어주며”의 ‘서로’를 파랑새(관세음보살)로 환치해 읽으면 어떨까. 파랑새(관세음보살)는 홍련암의 창건 설화에 나오는 새이기 때문이다. 설화에 의하면 홍련함은 의상 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 해변 굴 안에 관세음보살이 머무신다는 말을 듣고 이곳을 참배했는데, 그때 파랑새 한 마리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하자 바다 위에 홍련이 피오 올라 그곳에 암자를 짓고 홍련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설화에는 의상 대사가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홍련암을 지었다고도 한다.
어떻든 시인의 그 ‘곱’고, ‘동그맣’고, ‘살랑 사랑’스러운 사람은 파랑새이고 관세음보살이고 애인이고 시인 자신이다. 그리하여 “한계령 단풍 속으로” 숨어들어 역신을 쫓아내고, 거기서 한 세상 잘 보내려고 한다.
홍련(紅蓮)은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을 상징한다. 그러나 필자의 천재적 불온성은 그 관세음보살(파랑새) 대신에 조선시대 가산(嘉山) 최고의 기생이었던 ‘홍련(紅蓮)’을 먼저 떠올린 것이다. 평양의 계월향(桂月香), 진주의 논개(論介)와 함께 조선 삼대 의기(義妓)로 유명했던 가산 기생 홍련. 그때 그녀는 자신의 기명(妓名)이 관세음보살님(파랑새)을 상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의기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홍련 탓인지, 이 홍련 탓인지, 대숲길을 따라 난간 길을 따라 홍련암으로 가는 길이 낙원 길 같기도 하고, 가야금 소리와 창 소리 흥건한 요정 길 같기도 하다.
일출 직전, 그때 오렌지 빛으로 서서히 물드는 여명의 바다는 아름답다 못해 참으로 고혹적이다. 차라리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 고혹은 홍련암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는지도 모른다. 새벽 홍련암에 드니 침묵의 기도소리가 낭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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