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승하의 ‘어머니의 은혜’
어머니의 은혜-승한 스님께/ 이승하
이 세상의 수많은 여인이여
자식 낳고 얼마 안 되어 죽은 수많은 어머니여
자식 낳으면서 서 말 석 되의 피를 흘린 내 어머니여
여덟 섬 너 말의 젖을 먹여 나를 키운 유모여
그대들의 은혜로 이 세상이 지탱된다
아기를 배어 수호해준 은혜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받은 은혜
자식은 낳고서 근심을 잊은 은혜
젖을 먹여 기른 은혜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서 먹인 은혜
마른자리는 자식에게 돌리고 자신은 진자리에 눕는 은혜
온몸을 깨끗이 씻겨준 은혜
자식이 먼 길 떠나면 걱정해준 은혜
자식을 위해 나쁜 일도 마다않은 은혜
끝없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준 은혜
여인들이여 아이를 낳아보았다고?
그래서 그대는 늙으면 뼈가 텅 비는 것이다
허리가 구십 도로 꺾이는 것이다
여인들이여 아이를 키워보았다고?
남자의 뼈는 희고 고운데
너희의 뼈는 검고 가볍구나
그대들의 믿음으로 이 도량이 유지될 것이다
-이승하 시집, 〈불의 설법〉 서정시학, 2014
민망하게도, 이 시는 이승하 시인이 필자에게 준 헌시다. 이 시를 곱씹어 읽으며 필자는 이승하 시인이 왜 필자에게 이 시를 헌시로 주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속세를 떠난 필자에게 ‘부모님의 은혜는 절대 잊지 말라’고, 그리고 그 은혜를 높고 넓고 깊게 여겨서 ‘중[승(僧)]으로 여법하게 잘 살라’고 이 시를 헌시로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눈물이 났다. 온 가족 앞에서 필자가 출가한다고 했을 때 긴 침묵 끝에 아버지께서 딱 한 마디 하신 것이 생각난다. “알았다. 잘 해봐라. 중 생활도 잘만 하면 괜찮다” 어머니와 여동생들과 제수씨들은 눈물을 뚝뚝 떨쳤다. 지금은 흙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두 분에 대한 그리움은 언제나 사무친다. 특히 올 연 초에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심정은 사무침을 넘어 아직도 그 품에 안겨 젖을 빨던 기억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각설하고, 이 시는 불교의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그대로 가져온 시다. 부모님의 〈십대은(十大恩)〉이라고도 한다.
첫째,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이다. 어머니가 품에 품고 지켜주신 은혜다. 둘째,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이다. 해산날에 즈음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다. 셋째,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이다.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다. 넷째, 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이다.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뱉어 먹이는 은혜다. 다섯째, 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이다.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서 누인 은혜다. 여섯째,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이다. 젖을 먹여서 기른 은혜다. 일곱째, 세탁부정은(洗濁不淨恩)이다. 손발이 닳도록 씻어주신 은혜다. 여덟째,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이다. 자식이 먼 길 떠날 때 걱정하시는 은혜다. 아홉째,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이다. 자식을 위해 나쁜 일까지 짓는 은혜다. 열 번째, 구경인민은(究意憐愍恩)이다. 자식을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주시는 은혜다.
양주동 박사는 이 〈부모은중경〉을 바탕으로 우리가 어릴 적 많이 불렀던 〈어머니의 마음〉(작곡 이흥렬)을 지었다. 지금도 부르면 저절로 눈물이 나는 노래. 〈은중경(恩重經)〉,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불설부모은중경(佛說父母恩重經)〉, 〈불설보부모은중경(佛說報父母恩重經)〉이라고도 부르는 이 경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왕사성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삼만팔천인의 대비구와 보살들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대중을 거느리고 남방으로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뼈를 보시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배를 올리셨다. 이에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삼계의 큰 스승이요 사생(死生)의 자비로운 어버이시기에, 수많은 사람이 공경하고 귀의하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름 모를 뼈 무더기에 친히 절을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나의 으뜸가는 제자 중 한 사람이요, 출가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아직 아는 것이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의 조상이거나 여러 대에 걸친 부모의 뼈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예배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남자가 세상에 살아있을 때는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에 남자인 줄 알며, 여인은 붉은 주사와 연지를 곱게 바르고 좋은 향으로 치장하고 다니므로 여자인 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의 백골은 남녀가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제자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라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 절에 가서 법문도 듣고 경도 외우고 삼보께 예배하고 염불도 하였을 것이므로, 그 뼈는 희고 무거우니라. 그러나 여자는 세상에 있을 때 정과 본능을 좇아 자녀를 낳고 기르나니, 한번 아기를 낳을 때 서너 되나 되는 엉긴 피를 흘리고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모유를 먹이기 때문에 뼈가 검고 가볍느니라.”
이 말을 듣고 아난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껴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여야 어머니의 큰 은덕에 보답할 수 있겠나이까?”
곧 어버이날이다. 어버이 은혜를 생각하며 이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도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