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22일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오영훈 제주도지사와 왕루신(王쨀新) 주제주중국총영사는 제주와 중국 간에 천년고찰의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1200여 년 전 ‘해상왕 장보고의 발자취를 다시 잇는다’라는 의향서를 체결했다. 해상무역을 통해 한중일과 동아시아를 연결했던 장보고처럼 한·중 관계 진전과 제주지역 경제 활성화 및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물적·인적·문화·역사 교류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기로 약속했다. 이 자리에 도지사를 비롯해 중국 법화원 스옌쉐 스님, 법화사 도성 스님, 관음사 정안 스님 등이 함께 참석했다.
법화사는 제주 산남을 대표하는 사찰로, 통일신라시대 장보고에 의해서 창건된 절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사찰의 앞 해안에는 당시 동아시아 해양의 중심지였던 대포포구가 있다. 이 대포포구를 통한 삼국 교류의 중심 역할을 법화사가 담당했을 것이라고 본다. 장보고는 해상 근거지로 지금의 완도 일대인 청해진(828~851)을 중심으로 한·중·일 교류의 주도권을 잡고 활동하였는데, 이 무렵 중국 산둥성 적산촌에 신라방(新羅坊)과 탐라에 법화원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법화사 관계자 스님들과 학자들은 이 시기에 제주에 불교가 전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탐라 법화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현존 기록은 발굴조사 과정에서 나온 명문기와이다. ‘至元六年己巳始重創十六年己卯畢’ 원나라 세조 지원 6년(1269)에 중창을 시작해 지원 16년(1279)에 마쳤다.
이 발굴 현장에서는 청자와 청동등잔, 백자, 분청사기 등과 함께 개원통보(開元通寶)도 발굴되었다. 이 화폐는 당나라의 대표적인 청동화로, 당나라의 창업을 기념해 무덕(武德) 4년(621) 처음으로 주조 발행되었다. 이 동전은 그 후 역대 왕조의 표준형이 돼 무종 5년(845) 회창에서 주조한 예가 있으며, 오대 삼국시대의 남당(937~975)에서도 발행했다. 고려에서는 목종 때(998~1009) 같은 이름의 주화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탐라의 법화사는 그 창건이 원지배기 이전인 것은 확실하다.
이후 법화사는 탐라국이 고려의 현으로 편입되고 조선의 직접 지배에 들어서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태종실록>(1406년)에서 명은 사신을 파견해 탐라의 법화사에 욕심을 드러낸다. 명의 성조 영락제는 칙서에서 “짐이 선황과 황비의 은덕을 거듭 생각하여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제전을 봉행하고자 하여 특별히 사례감태감 황엄 등을 보내어 그대 나라 탐라에 가서 동불상 몇 좌를 구하게 하니 잘 도와 성사시켜 짐의 뜻에 부응토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와 함께 ‘탐라 법화사에 있는 미타삼존은 원의 양공(良工)이 만든 것이다. 우리가 곧바로 가서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그 의도가 명이 탐라를 살피고자 하는 데 있음을 간파한 조선의 조정에서는 전남 해남을 통해 나주까지 동삼존불을 옮겨 인계했다. 그때부터 삼존불이 떠나간 곳이라고 해서 강정포구 서쪽을 ‘세불포구’라고 불렀다.
또 <태종실록>을 보면, 조선의 조정은 법화사의 노비 280구를 30구만 남기도록 하였다. 억불정책으로 법화사는 중반 이후 비보사찰의 지위마저 빼앗기고 사세가 급격히 기울어 18세기에 이르러 폐사됐다. 역사의 풍랑을 헤쳐 온 법화사가 다시 복원된 지 100년, 동북아의 중심 역할을 되찾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