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불교인문학살롱] 8. 〈화엄경〉 만난 인연

수필단체서 일하며 협회지 제작
표지 그림을 수안 스님께 부탁
수안 스님 인연…불교공부 권유
“화엄경 매일 읽으면 佛光 가피”

모든 건 연결돼 만물에 영향 줘
길상 에너지 파급하는 것이 도리

국고 제314호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화엄경〉의 7처9회(七處九會)의 설법내용을 그린 변상도다.
국고 제314호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화엄경〉의 7처9회(七處九會)의 설법내용을 그린 변상도다.

무수한 생명의 어울림 한마당인 세계를 음악적으로 설명하면 하나의 화음이다. 이를 다시 부처님 우주관에서 볼 땐 일체 생명계 일체 현상의 움직임들은 곧 ‘화엄(華嚴)’이다.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한 책이라면 곧 일체 생명이 생멸하는 대자연은 그대로가 불멸의 경전이랄까.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생명체인 인간으로 살면서 도외시할 수 없는 우리가 희구하는 복(福)은 기본적으로 환경의 풍요로움 속에 있다. 그러나 대(代)를 이어 오래 누릴 환경의 풍요를 조성하는 바탕인 더 중요한 덕성은 의식의 풍요로움 속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에서 일차적 정신교육 현장은 가정이고 2차적 학식 습득은 단계별로 프로그램된 제도권 교육에 있다. 이 단계를 계속 밟아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한계에 도달한다. 그 한계 너머 무한 세계를 찾다 보면 저절로 고전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일상성 속에 겪는 여러 갈래 고통을 넘어서는 공부는 한정 없는 수행이 뒤따르는, 즉 내겐 경전공부에 있다고 느껴졌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래 축적된 독서의 힘으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고 덕분에 나를 손짓하던 수필단체에 들어갔다.

어느 결에 그 단체협회지 주간을 맡았을 때 불교단체도 아닌데 왜 그때 표지화를 세계적 선화가로 알려진 수안 스님께 부탁드릴 생각을 했을까.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스님께선 내게서 남다른 기운을 느끼셨는지 ‘정수리 보자’, ‘손바닥 펴 봐’, ‘생년월일 말해 봐’하시며 내 신상에 나타난 운명을 읽으셨다.

표지 그림을 찾으러 다시 찾아뵈었을 때 차 마시는 동자 그림을 표구한 선물과 백화점 상품권, 연꽃 그림 등등을 주시면서 “〈화엄경〉을 매일 기도하듯 조금씩 읽어봐요. 그러면 불광(佛光)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을 거야”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내 몸 안에 가득 차오른 다음 날 부산에서 제일 큰 영광도서에 갔다. 백용성 대선사 번역본이 2000년도에 재발행된 정가 10만 원의 한 권이 대사전 방식으로 모습을 나타내 나를 손짓하고 있었다. 기꺼이 곧장 모셔 와 펼쳐보니 법손 도문선사께서 이 나라 불교계의 중추적 인물 백용성 대선사 발자취를 뒤편에 실었는데 그것을 읽어보니 ‘아! 이분은 보현보살의 화신(化身)이시면서 비로자나불의 현현(顯現)’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국광복과 불교중흥을 위해 30여 종이 불서저술과 20여 종의 역경을 해내시는 가운데 웅장한 80권 화엄을 대본으로 한 〈화엄경〉을 번역하신 위업을 이루셨다. 해인사 대장경판 보수, 각종 선회(禪會) 개설, 봉익동 대각사 건립, 대사동에 임제종 중앙선종 교당 건립 그리고 독립자금 조달 목적으로 산속에 과수원 경작, 또 3여 년 동안 북청에 있는 금광까지 경영하셨으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3·1 독립운동을 주도하시다 옥고를 치루신 일 등등. 초인적인 힘으로 초능력을 발휘하시며 장엄한 발자취를 남기신 백용성 대선사. 민족정기를 일깨우고자 고군분투하신 삶 앞에 저절로 두 손 모아 합장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절판된 〈화엄경〉을 법손 도문 대사 대원력의 힘으로 3여 년 동안 불교문학을 전공하신 사재동 교수의 도움을 받아 중복된 내용을 제외하고 일부 현대문장으로 옮겼고, 불교서적을 전문적으로 발간하는 김정길 사장님의 협조로 이 방대한 대작불사를 원만회향하게 되었음을 밝히셨다.

중생은 업(業)에 의해 태어나고 보살은 서원(誓願)에 의해 태어난다고 했다. 셀 수 없어 ‘천백억 화신(化身)’으로 표현된 제불보살 화신들이 생명사회 평화를 도모하고자 끊임없이 제 몫의 일을 하고 계시는 감인토(堪忍土) 사바(娑婆)는 언제나 층층의 다양함으로 화엄을 이루고 있다. ‘선재’라는 상징적 인물이 53선지식을 찾아가는 구법(求法) 여행을 통해 존재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을 그린 현묘한 화엄의 바다… 오래 수행하다 보면 만덕(萬德)이 쌓여 덕과(德果)가 무르익으면 저절로 뭇 생명을 이롭게 하게 되는 보현행의 길 화음(和音), 화엄(華嚴)….

대승불교 경전 최고봉인 〈화엄경〉은 부처님 성도 후 제일 먼저 설법하셨으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부처님도 구법(求法) 여행을 하셨는데 최고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 당신을 가르칠 스승 없음을 아셨을 때 보리수 아래서 6년 고행을 닦으셨다. 공부가 무르익어 존재의 이유에 대해 어떤 의문도 남음이 없는 상태에 결국 도달하여 성도를 이루신 것이다. 선재의 53선지식을 찾아가는 과정도 이러한 이유인 것.

가히 함부로 설명할 수 없는 화엄사상은 정토사상 영향을 받아 생명의 실상을 통찰하게 하면서 서원(誓願)의 갑옷을 입게 만든다. 많은 문제 안에 살기에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벗어나야 함은 한 생각이 쉴 때라야 존재의 평정이 가능해서다.

전생에도 불교경전을 이윽히 들여다보고 살아왔던가. 아무리 경전을 오래 들여다봐도 지루하거나 싫증나지 않는다. 어느덧 내 정신세포 하나하나 사이에 불광(佛光)의 에너지가 드나들었음인가. 내 삶 발자취에 스며든 보살 마음 한가닥 한가닥이 새삼 운명의 작용임을 느낀다.

덜 닦여 아둔한, 곧 지혜부족으로 피할 수 없던 내 삶 몇 마당 고난의 페이지에 남겨진 생활의 피멍자국은 그러나 이유 모를 바람으로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나를 확장시키며 더 깊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자양분이 됐다. 고단위 섭리의 씨줄과 날줄로 지은 내 수필 속엔 생명 사회 평화를 일구는 문인으로서의 존재 이유가 등불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

자력(自力)이 다할 때 가피지력인 타력(他力)이 나타난다고 한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주체는 마음이기에 마음이 창조주라고 한다.

이미 깨달았지만 중생제도를 위해 중생 상태에 머무는 보살은 어떻든 중생계 정화(淨化)를 끊임없이 돕는다. 그래서 보살십지품 이구지(離垢地)에선 보살지계가 논의돼 있는데 “윤택한 말과 부드러운 말과… 여러 사람이 사랑하고 즐거울 말과… 몸과 마음에서 즐거움이 솟아나는 말을 항상 낼지니라”란 먼저 입으로 짓는 죄를 경계하려 생활 용어 향상을 비롯하여 보살도를 실현할 언어생활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았다.

그러면서 보현행품에서 보현보살 마하살의 마지막 말씀이 엄청난 에너지원으로 대두한다. “불자야 우리 모두가 이름이 보현이니…” 보현행이 보살의 행원行願이기에 결국 보현행을 수행해 가는 과정이 우리들의 구법 여행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

부처님 품 안에 들어왔다면 일체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체 생명을 꽃피울 무목적성 보현행을 마땅히 추구해야 한다. 이를테면 예경제불(禮敬諸佛)이 되는 ‘고맙다’란 말, 칭찬여래가 되는 ‘잘했어’란 말, 그 어느 순간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며 업장(業障) 참회가 되는 ‘미안하다’는 말들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요익중생의 길이 보현행의 길이지 않은가.

진리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의미인 대방광(大方廣), 부처님이 만행(萬行)의 꽃을 피워 장엄함을 의미하는 불화엄(佛華嚴), 여기에선 부사의(不思意)한 생명의 본질이 곧 보현(普賢)이다.

일승불교 철학이 지배했던 신라시대는 화엄경이 신라불교의 핵심이 되어선지 의식수준이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화엄경을 들여다봐야 부처님 은혜를 알 수 있다고 한다.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기에 마음을 보살 마음으로 사용하는 선용기심(善用基心) 즉 보현행은 이래서 우주 보편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참 되돌아가서 보살문명품 한 구절인 “마음이 업을 알지 못하며 받음이 보報를 알지 못하며… 인(因)이 연(緣)을 알지 못하며 연(緣)이 인(因)을 알지 못하며…” 그러기에 우리들의 수행은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업과를 이루는 허물을 만들지 않으려면 끊임없는 자아탁마, 마음수행뿐이기에 정행품에선 문수사리보살이 지수보살께 “만일 보살이 그 마음을 잘 쓰면 모든 면에 곧 모두 뛰어나고 묘한 공덕 얻으리라”고 지혜롭게 잘 사는 삶의 대가가 평이하게 명시되어 있다. 또 비로자나품으로 돌아가 보면 “행(行)이 용렬한 자는 이 방편을 알지 못할지니 큰 정진의 힘을 얻은 뒤에야 능히 세계 바다를 깨끗이 하리니”란 구절에선 모든 경전이 제시하는 자기 정화(淨化), 청정심 회복이 보살도에 오르는 꾸준한 학습과정임을 거듭 주지시키고 있다.

운명을 만드는 마음자리는 헤아릴 길 없고 이치의 세계가 너무 오묘해 화엄경은 일어남과 소멸하는 것은 불가사의하다 했다. 그러면서 존재의 완성도를 높이는 공부는 보현행에 있다고 이 화엄경은 일러주고 있다. 우리는 어차피 다양한 문제 속에서 다양한 계층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전생의 서원으로 관음, 보현 역할을 하며 운명적인 업무를 이행하는 보살이 사는 국토도 중생이 사는 삶의 현장이다.

가장 위없는 공부는 제도권 교육, 교과서에 있는 게 아니라 대자연 생명 사회 낱낱의 존재 이치 속에 있기에 일반 육안(肉眼)으론 해량할 수 없는 한계가 있어 외·내연으로 자신을 크게 확장하려면 안목부터 길러야 한다. 그 안목이 곧 그 삶이어서다.

마음가짐이 행위를 유발하기에 기도 시간엔 언제나 〈화엄경〉 앞에 합장하고 입법계품에서 나를 압도한 글귀 “네가 무량세계가 없는 복덕 바다에 보현행을 닦으면 모든 큰 원(願)을 성취하리라”는 덕운 비구가 선재에게 일러주신 이 말씀 한 구절을 경건하게 읊조린다. 어떻든 나는 화엄경의 여러 내용 중 내 삶을 자극하는 글귀들을 읊으면서 거듭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 속에 있다. 복(福) 중에 큰 복은 자기를 이끌어 올리는 큰 스승을 만나는 일, 이를테면 길상 인연 만나는 일인데 내 삶 굴곡진 곳에 묵연히 깃든 인욕행이 플러스 에너지를 불러들여 여러 길상 인연을 연결해 주었다.

어디서나 정신이 건강한 사람으로 살아야 만물을 이롭게 해 줄 수 있다. 흔히 관상학적으로 눈빛이 맑아야, 그 얼굴이 밝아야 그 삶에 질적(質的) 발전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 인생은 우리 개인 몫만이 아니다. 미세하게 만물과 연결되어 있어 만물에게 영향을 끼친다. 넓게는 내가 머무는 사회, 나라, 지구촌 우주 법계 일체 생명에게 영향을 끼친다. 어렵게 사람 몸 받고 태어났는데 최대한으로 수행하여 최상승의 값어치를 다하고자 그냥 하염없이 길상 에너지를 길어 올려 파급시키는 것이 내 존재의 일상적인 도리다. 이것이 내가 재가불자로서 아니 그 이전 누구의 자손, 누구의 부모로 살아가는 무조건의 예의다. 굳이 문자로 표현하면 수행지수가 높아질수록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고 본다.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그러기에 내 생활 도구에게도 일상적으로 건강함에 대한 감사함을 낮은 목소리로 표현한다. 이것은 나와 함께 존재하는 일체물상에 대한 기본적 보현행이다. 쉬울 리 없지만 늘 생명의 어머니 대지와 같은 마음으로 산다면 오롯이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

황다연 시조시인은

1975년 〈시조문학〉 천료 이후 사정에 의해 문학 활동 중단, 1988년부터 다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으로 〈그의 나이테〉, 〈천년 사랑의 바다에서〉와 세 권의 산문집 등이 있으며, 한국시조시인협회, 한국 여류시조시인협회, 한국해양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1991년부터 故 이기영 박사가 설립한 한국불교연구원 부산 구도회에서 경전공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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