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승한 스님의 불교시 감상] 30. ‘善知’ 알고 ‘지범개차’ 해야

30. 박규리의 ‘산문일적’

산문일적(山門一適)/ 박규리

산어귀에 홀로 사는 할매가 한살배기 천복이를 양자 삼아 데려왔을 때, 산중턱 작은 절 스님이 하, 고놈 참 자알 생겼다 내 아들 하자 내 아들 하자며, 아침 저녁 산책길마다 쓰다듬어도 주고 안아도 준 지 엊그제 같은데
매미도 삼복에 지쳐 목이 쉰 여름 한낮
느닷없이 천복이가 전화를 걸어서 스님 큰일났응께 후딱 좀 와보소 하길래, 하릴없는 스님 한걸음에 산문 밖으로 달려가니 할매가 아니! 스님이 웬일이라우! 하는 게 아닌가 천복이가 큰일났다는디 무슨 일이오? 물으니, 할매는 그 큰 응덩이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부지깽이부터 찾아선, 이눔이 옥수수 한솥단지 삶았길래 좀 갖다드리라 했더니, 지는 자빠져 누워 또 건방지게 스님께 전화질했다우? 하면서 벌써 도망간 천복이 쪽을 어림잡으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는데, 됐어라우 고만 됐어라우……스님 옥수수 한덩이 맛나게 먹고, 인적도 없는 이 토담집 쪽새가 전기선은 안 쪼았나 장마비에 개울 옆 지붕은 무사한가 두런두런 돌아보다 어느덧 해 저무는 숲길을 옥수수 한소쿠리 들고 되짚어 오는데
밤나무 숲 마악 지났을 때였나, 후두둑 비명을 지르며 산꿩이 날아오르는 찰나 주먹만한 돌멩이가 스님의 맨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친 것은,
아. 부. 지. 어쩔껴? 나도 벌써 열 살이란 말여!
철없는 스님 놀라 돌아보니, 아직 주먹만한 짱돌을 한손에 움켜쥔 채 파르르 떠는 천복이 두 눈에 하, 말똥 같은 눈물이 석양보다 붉게 떨어져……

- 박규리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 2004

일적(一適). 물 한 방울. 여기서는 눈물 한 방울로 읽어도 되겠다. 그것도 절의 출입문인 산문(山門) 안에서 떨구는 눈물 한 방울. 왜 그런지, 짠하기도 하고 알싸하기도 하다. 천복이의 말똥 같은 ‘일적’이 왜 ‘석양보다 붉게 떨어’졌을까. 스님은 천복이의 진짜 아버지였을까, 아님 천복이가 어릴 때부터 ‘하, 고놈 참 자알 생겼다 내 아들 하자 내 아들 하자며, 아침 저녁 산책길마다 쓰다듬어도 주고 안아도’ 줘서 진짜 아버지처럼 여겨서 그랬을까. ‘아. 부. 지. 어쩔껴? 나도 벌써 열 살이란 말여!’. ‘짱돌’을 쥐고 ‘석양보다 붉’은 ‘말똥 같은 눈물’[일적(一適)]을 떨구는 천복이의 모습이 코끝을 찡하게 한다.

‘밤나무 숲’ 길을 지나다 느닷없이 맨머리에 짱돌을 맞은 스님의 놀람도 폭소 대신 서글픔을 자아낸다. 그 짱돌은 천복이의 스님에 대한 그리운 부정(父情)이다. ‘철없는 스님’은 과연 그 짱돌이 천복이의 부정인 줄 알까 모를까.

이 시는 이야기 시다. 서정적이고 희극적이면서도 잔잔한 웃음과 함께 눈물이 핑 도는 시다. 한 살 때 할머니에게 안겨 산어귀 토담집으로 온 천복이(필자는 이 천복이의 이름을 天福이라고 규정했다)가 커서 벌써 열 살이 되었다. 열 살을 먹는 동안 천복이는 자연스레 스님이 자신의 진짜 아버지라고 생각했을 테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사는 부정에 대한 사무침 때문에 삶은 옥수수를 핑계로 ‘큰일났응께 후딱 좀 와보’라고 한 뒤 밤나무 숲에 숨어 있다가, 누르고 눌러 왔던 부정을 짱돌에 담아 아버지의 맨머리를 향해 (나를 책임지라고) 사정없이 던져버린 것이다. 이 대목에서 눈물 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랴.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근데, 천복이의 진짜 어머니는 누구고 진짜 아버지는 누굴까. 진짜 아버지는 스님으로도 읽히고, 스님으로 안 읽히기고 한다. 그러나 (오독이어도 좋다) 필자는 스님이 천복이의 진짜 아버지이길 바라며 이 시를 읽었다. 그래야 이 시가 더 인간적인 시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럼 진짜 어머니는 누구일까. (이 또한 오독이어도 좋다) 스님을 너무도 사랑하던 어떤 젊은 처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파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스님을 너무도 사랑하던 그 처자는 스님과 하룻밤을 보낸 뒤 아기를 낳아놓고 스님을 위해 어디론가 조용히 사라져버렸다.(필자는 그 젊은 처자 역시 승려가 되었으리라 여긴다.) ‘철없는’ 스님은 그 아들을 진짜 아들이 아닌 척하고 보고 싶을 때마다 맨날 찾아가서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하, 고놈 참 자알 생겼다 내 아들 하자 내 아들 하자’고 한다. 이쯤 되면 부정자정(父情子情)일 밖에.

어딘가 설화에 바탕을 둔 듯한 이 시는 박규리 시인의 재치와 유머와 끈질기게 밀고 나가는 시적 저력을 보여준다. 특히 2연에서 보여주는 박 시인의 재치와 유머는 능청을 넘어 으멍스럽기까지 하다. ‘할매는 그 큰 응덩이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부지깽이부터 찾아선, 이눔이 옥수수 한 솥단지 삶았길래 좀 갖다드리라 했더니, 지는 자빠져 누워 또 건방지게 스님께 전화질했다우? 하면서 벌써 도망간 천복이 쪽을 어림잡으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는데, 됐어라우 고만 됐어라우’. 웃음이 터져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철없는’ 스님이 ‘철없는’ 스님이 아니라 ‘철 있는’ 스님이고, 진짜 스님이고, 진짜 천복이 아버지임을 암시하는 대목은 바로 그 뒷부분이다. ‘스님 옥수수 한 덩이 맛나게 먹고, 인적도 없는 이 토담집 쪽새가 전기선은 안 쪼았나 장마비에 개울 옆 지붕은 무사한가 두런두런 돌아보다 어느덧 해 저무는 숲길을 옥수수 한소쿠리 들고 되짚어 오는데’. 토담집 이쪽저쪽을 둘러보는 스님의 모습을 영사기로 보는 것 같다. 천복이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면 할매와 천복이가 사는 낡은 토담집을 이리 자상히 살필 수가 없다. 또한 깊은 수행과 정진이 없는 승려가 아니면 이런 자비와 보살행을 할 수 없다.

〈초발심자경문〉에 ‘지범개차(持犯開遮)’라는 말이 있다. 맨 처음 구절에 나오는 대목이다. 계를 범하는 것과 여는 때를 잘 알아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 스님이 요석궁에 든 것은 ‘개차’(開遮)다. 계를 열어야 할 때였던 것을 원효 스님은 잘 알았던 것이다. 요석공주가 아들 설총을 낳자 원효 스님은 다시 산문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지범’(持犯)이다. 다시 계를 지켜야 할 때를 원효 스님은 잘 안 것이다. 그러나 이 ‘지범개차’를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지범개차’ 앞에 있는 두 글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 ‘선지’(善知)다. ‘선지지범개차’(善知持犯開遮)다.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선지(善知)] 이를 ‘지키고, 범하고, 열고, 막을 줄을 잘 알아야 한다’[지범개차(持犯開遮)].

‘밤나무 숲’에서 ‘주먹만한 짱돌을 한손에 움켜쥔 채 파르르 떠는 천복이 두 눈에’ ‘석양보다 붉게 떨어’지는 천복이의 ‘말똥 같은 눈물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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