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박 준의 ‘연화석재’
연화석재/ 박 준
저녁이면 벽제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석재상에서 일하는
외국인 석공들은 오후 늦게 일어나
울음을 길게 내놓는 행렬들을 구경하다
밤이면
와불(臥佛)의 발을 만든다
아무도 기다려본 적이 없거나
아무도 기다리게 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한 돌의 발
나란히 놓인 것은
열반이고
어슷하게 놓인 것은
잠깐 잠이 들었다는 뜻이다
얼마 후면
돌의 발 앞에서
손을 모으는 사람도
먼저 죽은 이의 이름을 적는 사람도
촛불을 켜고 갱엿을 붙여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도 부처님처럼
오래 살아갈 것이다
-박 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그(박 준)의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처럼, 그의 이 시(연화석재)를 읽는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러나, 나는, 달라졌다. 그러고 싶었다. 우선, 벽제의 밤이 달라졌다. 그동안 나는 벽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검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를 읽고 밤의 벽제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이른 아침부터 주검들이 쉴 새 없이 죽지만[화장(火葬)], 저녁이 되면 주검들이 죽음을 딱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이른 아침이면 주검들은 또다시 일제히 죽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녁이면 벽제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벽제의 비애를, 벽제의 낮과 밤을 단 두 줄의 시행(詩行)으로 이렇게 잘 묘사한 시가 또 있을까. 단 두 줄의 시행으로 벽제의 시공(時空)을 이토록 정밀하게 서술한 시가 또 있을까.
그런데, “석재상에서 일하는/ 외국인 석공들은” 왜 “오후 늦게 일어”날까. “오후 늦게 일어”나 “울음을 길게 내놓는 행렬들을 구경하다” “밤이면/ 와불(臥佛)의 발을 만”들까. 왜 그래야만 할까.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또,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만 될 것 같다. ‘누워 있는 부처님’[와불(臥佛)]의 발바닥은 너무도 깨끗해서, 낮이면 죽어야 할 주검들이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될 것 같아서, 밤에만 은밀히 연꽃을 피게 하는 것이다. 연화(蓮花)를 연화(蓮華)하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기다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화장을 하는 동안) “아무도 기다리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박 준 시인의 천재적 인식은 5, 6연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나란히 놓인 것은/ 열반이고// 어슷하게 놓인 것은/ 잠깐 잠이 들었다는 뜻이다”가 그것이다. 그런데, “나란히 놓인 것은” 왜 “열반이고”, “어슷하게(한쪽으로 조금 비뚤어지게) 놓인 것은 잠깐 잠이 들었다는 뜻”일까. 여기서 생각나는 부처님의 열반상. 이미 열반에 든 석가모니 부처님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자신의 입멸 모습을 보지 못해 더욱 슬퍼하는 가섭에게 법통(法統)을 전하기 위해 관 밖으로 연화문이 찍힌 두 발바닥을 불쑥 내밀었다. 이름하여 ‘곽시쌍부’(槨示雙趺).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를 통해 우리 중생들의 고단한 인생살이(길 찾기)를 암시하신 것이다. 실제로 우리 중생들도 ‘길 찾기를 끝내면’(죽으면) 두 발을 가지런히 모은다. 인생살이의 고단한 길 찾기를 끝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잠깐 잠자는 사람들은 두 발바닥을 아무리 가지런히 모으고 자려해도 이내 비뚤어지고 만다. 아무리 바르게 잘 잔다고 해도, 삶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돌의 발”에 불과한 “발 앞에서” 우리가 “(두) 손을 모으는” 것도, “먼저 죽은 이의 이름을 적는” 것도, “촛불을 켜고 갱엿을 붙여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돌도 부처처럼/ 오래 살아갈 것이”라는 것. 부처님의 발바닥이 새겨진 돌[연화석(蓮花石)]은 이제 더 이상 돌이 아니다. 속(俗)이 아니다. 성(聖)이다. 우리는 흔히, ‘길 위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을 ‘도인’(道人)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종교와 종파를 떠나, 우리는 모두 도인이다. ‘길 위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이다. 인생살이 자체가 고단한 길 위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평생을 길 위에서 사시다 길 위에서 죽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서른셋의 짧은 나이지만, 평생을 길 위에서 사람들과 함께 길을 만들고 길을 걷다가 자신의 죽음(십자가)을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고단하게 올라가 고단하게 죽었다. 때문에 박 준 시인의 ‘연화석재’는 이제 불교와 부처님과 불자들만의 ‘연화석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보편적 ‘연화석재’로 부피를 넓혔다. 이것이 바로 (다른 종교와는 다른) 불교의 ‘보편성’이다. 연화석재라는 석재공장[생(生)]과 벽제[죽음(死)]라는 두 객관적 상관물을 불교적 사유를 통해 보편적 일상으로 끌어올린 박 준 시인의 시적 해석과 분석에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벽제의 밤만큼 적멸한 밤, 박 준의 ‘연화석재’ 만큼 필자의 마음도 고요하고 정갈해진다. 이제 벽제는 주검이 시공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걸어야 할, 그리고 찾아야 할 생의 시공이다. “깨끗한 돌의 발”로 “열반”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 시를 읽고, 모두 잠에서 깨어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