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아야 세상이 돌아간다
참나를 찾아가는 인생여정
인생 하산길이 더욱 중요해
성찰과 정진으로 돌아보는
새로운 삶의 목표 세워가야
한라산을 처음 올라갈 때는 정상에 있는 백록담이라는 신비로운 못을 상상하면서 고통을 견디며 올라간다. 오름길이 거칠고 힘들어도 백록담에 대한 기대가 고통을 감소시킨다. 뿐만 아니라 발밑과 눈앞만 보고 가니까 통증으로 주의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길을 두 번 세 번 올라가게 되면 정상까지 얼마가 남았는지를 헤아리게 된다. 더 자주 남은 거리를 생각하게 되고 추진력도 떨어진다. 그러나 정상에 이르면 도달했다는 성취감을 느끼며 모든 피로가 풀리고 천천히 사방을 바라보며 기분을 만끽한다. 그리고 내려갈 것을 생각한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다르다. 우선 몸이 가볍다. 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지만 도착지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갈 때와 다르다. 내려가는 동안 지친 체력으로 인해 몸이 휘청거려도 쉬어가면 되니까 걱정도 줄어든다.
나는 제주에서 명상센터를 설립하여 15년간 운영해 왔다. 시작할 때는 평생 같은 일을 계속할 것 같은 의욕이더니 내려놓고자 하니 빨리 떠나고 싶다. 처음 3-4년은 오로지 의욕만으로 일했다. 앞만 보고 달렸다. 멈출 것 같지 않았다. 힘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음 7~8년은 무엇인가 더 잘 하고자 노력했다. 어떻게 하면 센터를 더 잘 운영할 것인지 앞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보고 가면 그 곳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 후 5년, 지금까지 벅차게 일했다. 숨이 차고 힘들었다. 내 나이가 77세니 옛날 같으면 살만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 인생에서 할 일을 마무리하며 서서히 정리하고 물러날 때를 보고 있다. 그 시기가 온 것 같다.
지금 명상센터는 한라산 갈 때와 유사한 과정을 겪고 있다. 명상센터를 설립하면서 세상을 위해 일을 한다는 희망에 매우 가슴 떨렸던 기억이 있다. 마치 한라산을 처음 오를 때 산세의 험한 상태는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정상의 백록담에 대한 신비로움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듯이 명상센터도 처음 시작할 때는 셋방살이도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힘들지만 웃으면서 즐겁게 받아들였다. 차츰 앞을 보게 되고 활동반경이 넓어지자 상담과 명상활동을 위해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여 시내로 옮겼다. 그리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그동안 미흡했던 부분이 자꾸 나타났다. 점차 설립할 때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시내에서 좀 벗어나지만 승용차로 30분을 넘지 않은 이곳에 명상센터의 터전을 잡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와 세상이 함께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의식 수준에서 결정되기보다 더 큰 세계가 나에게 영향을 미쳐서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명상센터도 내 의식보다 더 큰 세계의 영향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명상공간을 찾기 위해 부동산 중개인과 같이 제주시 주변을 4개월 정도 다녔다. 공간도 가격도 적절한 곳이 없어서 아직은 명상공간을 만날 인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의 명림로 길을 가다가 명도암 식당 앞에서 멈추었다. 그냥 그곳에 차를 세웠다. 내리니 오른쪽으로 자그만 농로가 언덕 위로 보이길레 그리로 걸어갔다. 언덕에 오르자 앞이 탁 트이면서 맞은편에는 안세미 오름이 우뚝 솟아있고 양 옆은 기다란 타원형의 공간이 있으며 삼나무와 대나무가 양끝을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보는 순간 ‘아, 이곳이 바로 명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로구나!’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곳에 나의 명상센터가 들어설 줄은 전혀 몰랐다. 그런 느낌으로 천천히 아래로 걸어가다니 길 옆 밭에서 한 아주머니가 검질(김을 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좋은 데서 일하시네요. 혹 이 근처에 땅을 팔려고 내 놓은 곳이 있나요?” 좀 엉뚱한 질문이지만 이 말이 저절로 나왔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이런 말이 나왔을까. 아주머니도 나를 쳐다보며 엉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표정으로 “없수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나도 “그러시겠죠.”라고 대답하고 가던 길을 가려니까 뒤에서 그 아주머니가 “아저씨, 며칠 전 저쪽 풀밭에 몇 사람 다녀 갔수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 말이 내 가슴을 탁 쳤다. 소위 ‘필’이 꽂이는 것 같았다. 곧 바로 부동산 중개인에게 연락하여 그 땅 주인을 찾고 매매여부를 알아보게 하였다. 곧 연락이 왔다. 땅을 팔려고 내놓았다는 것이다.
나는 놀라움으로 땅의 가격은 고하간에 그 땅을 사기로 마음먹고 바로 계약을 했다. 4개월을 그렇게 다녔건만 보이지 않던 공간을 이렇게 만나다니. 놀라웠다. 내 노력 뒤에 또 다른 영성의 세계가 함께 하고 있음을 경험한 것이다. 명상센터를 운영하면서 나는 이런 일들을 가끔씩 경험했다.
이렇게 명상공간을 만나고 센터건물을 지어 명상활동을 한 지 어언 10여 년이 되었다. 이제 명상센터 이사장을 그만 둘 때가 되었다. 어떻게 떠나야 함께 가면서 헤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후임자를 찾기 시작했다. 센터를 사랑할 수 있는 자, 상담과 명상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자, 연간 필요한 재정을 꾸릴 수 있는 자를 찾는 일이다. 이러한 이사장의 자격조건은 내가 가진 조건이다 보니 그런 조건을 가진 자는 지난 5년 동안 찾았지만 없었다. 설립을 하면서 이사장 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자리를 내려놓는 일은 더 어려웠다. 매일 명상수행을 하면서 그런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의식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감정적으로 고요하고자 하나 그러지 못하니 수행을 하면서도 의식이 뚜렷하지 못했다. 명상센터 이사장직을 내려놓는 것은 물러서기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명료하게 처리되질 않는다. 나 개인에게 영적능력이 있어서 이사장직에 초연할 것 같은데도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나 중심적인 성향을 벗어나기엔 영적 성장이 미흡함을 보여주었다. 내 능력들은 삶을 향상시켜주는 욕망이나 일반적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지만 이사장직을 그만두는 데는 또 다른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
한라산에 올라갈 때는 발밑과 눈앞만 보았는데, 내려갈 때는 저 멀리 다른 봉우리와 깊은 계곡과 낭떠러지가 새롭게 눈앞에 나타난다. 이미 그 길을 지나왔건만 어찌 이제야 나타난단 말인가. 올라갈 때는 정상에 도달해야 한다는 일념에 앞만 보였지만 내려갈 때는 이미 정상에 도달하였으니 더 이상의 성취대상이 사라진 것인가. 똑같은 하나의 대상인데 어찌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정상이 분명 끝은 아닐 텐데 올라가면 내려가야 한다는 산의 속성이 보여준 한계인가? 그러고 보니 성취 후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다음의 목표가 없다. 그렇다면 정상에 도달한 뒤의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 자신의 명상능력과는 상관없이 내가 선택한 목표를 향해 구체적인 일정을 밟는 것이 도움을 주기는 하나 명상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명상을 위해 앉았을 때 명상시간 동안 각성된 주의를 가지고 시작하나 수행하는 과정이 정교하지 못했다. 하산하면 되는데 뭐가 부족하여 이렇게 주저하는가? 목표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려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았다. ‘이사장직을 그만두고 살아가야할 주요한 목표는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하나같이 수행을 해온 과제의 1번, ‘참 나를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확고하지 않았다. 빅토르 프랭클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안다면 당신의 목표에 가장 도움이 될 수 있으니 회피하지 마라.”라고. 그리고 “명상수행이 생각이나 감정, 욕구에 대한 자각, 끊임없는 활동 등으로 방해받는다면 그것을 극복하라.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라도 영적인 의무로서 명상하라”라고 단호히 말한다. 뜻을 굳혔으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하나 같이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슈나(깨달은 의식)는 프랭클과는 다른 측면에서 말한다. “자연의 영향력이 생겨날 때 그것을 경멸하지 않고 또 그것이 사라질 때 갈망하지도 않는다. 무심한 경지에 있는 그는 자연의 속성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는 쾌락과 아픔을 하나로 여긴다. 그는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를 동일하게 여기고 친구와 적을 동등하게 대하며, 모든 이기적인 성향을 버린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을 자연의 속성의 영향력을 초월한 자라고 부를 수 있다.”라고. 지금도 기억하지만 난 이미 자연과 하나가 되었던 경험을 갖고 있다. 지리산 백장암 동사섭 수련시(1990년) 화장실 동사섭의 경험이 생생하다. 30여 년 전의 일이지만 화장실의 칸막이나 벽이 없어 바지를 내리면 아랫도리가 다 보인다. 볼일을 보려고 하는 순간 스님이 들어오셔서 당황하고 있는데, “우리 화장실 동사섭이나 할까요?”라고 하시지 않는가. 그렇게 우리는 바지를 내리고 서로 옆에 앉아 볼일을 보면서 얘기를 나누었던 일이 바로 자연의 속성을 함께 하되 이를 초월한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의 속성을 넘어선 자’가 바로 ‘참 나’라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나를 내려놓아야 센터도 세상도 잘 돌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왔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이제 나의 길이 뚜렷해진다. 올라갈 때는 백록담에 도달하는 게 목표였다면 내려갈 때는 출발지가 목표다. 마찬가지로 일을 시작할 때는 ‘세상’과 함께하는 상담과 명상이요. 일을 멈출 때는 ‘참 나’를 찾는 일이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산에 올라갈 때는 목표가 있지만 내려올 때는 없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올라갈 때는 순간을 놓치지 않지만 내려올 때는 순간을 놓쳤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답은 확실하다. 내가 명상센터 이사장을 내려놓는 일이 왜 이리 힘들었는지 확연해진다. 바로 내려놓은 뒤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내려놓은 뒤의 목표는 ‘참 나를 만나는 일’이다.
이제 현실의 ‘나’를 만나러 가자. 이제 나는 ‘이사장직’을 내려놓는다.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다. 이제 남은 일은 쉬면서 ‘참 나’를 만나는 일이다. 내가 집착하는 일은 후임 이사장이 누가 될 것인가? 타 기관에 기부가 가능할 것인가? 나는 이사장직을 그만 둔 뒤 ‘참 나’를 만나기 위해 정진할 것인가? 결국 이 세 질문이 나를 가로 막고 있다. 올라가는 길은 멀고 험해도 이미 도달했고, 내려가는 길은 눈앞에 있는데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아주 가까이 있는데도 마치 낭떠러지 절벽을 바라보는 듯하다. 아슬아슬하다. 바라보면 한순간인 듯 가까운데 쉽게 건너기 어렵다. 나의 목표는 ‘참 나’를 만나는 것이지만 명상센터라는 단체가 만나는 것은 집단의 이익이 달려있다. 훌쩍 건너 뛸 수가 없다. 백척간두의 경계를 넘어야 새로운 내 인생이 나타난다. 하는 척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한줄요약
인생 등산길에서는 정상을 바라보고 매진하지만, 인생 후반 하산길에서는 스스로와 주변을 살피며 살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