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천의 달 토끼가 인간 세상의 바다로 내려왔다. 제주의 동쪽 해안을 따라 걷다 보면 별방진에 이른다. 그 진성 앞에는 작은 포구가 있고, 그 바다에 토끼섬이 떠 있다. 그 섬에 문주란이 핀다.
이 토끼섬은 문주란 자생지인 천연기념물로 7~9월에 흰 꽃이 산형화서로 핀 모습이 토끼를 닮았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이 꽃은 제주도를 비롯해 남쪽으로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어느 태고의 조류를 따라 흐르다 북방한계점에 이르러 터를 잡았다. 꽃만이 아니라 새들은 바람을 타고 사람은 물을 건너와 제주에 터를 잡았다.
이처럼 제주는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연결하는 동아시아 해상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제주의 옛 이름은 탐라, 탁라, 탐모라 등이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서 동국방음(方音)에 ‘도(島)’를 ‘섬’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라 하며, 탐·섭·담이 세 가지 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했다.
즉, 탐라는 ‘섬나라’이다. 탐라는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주호국은 마한 서쪽 바다 큰 섬의 세력이라고 했다. 한반도 부속 도서 중에 가장 큰 제주도가 고대 주호국의 세력이라고 추정된다. 탐라가 본격적으로 사서에 등장한 것은 〈삼국지〉 ‘위지’‘동이전’, 〈일본본기〉와 〈일본서기〉, 수나라 〈북사〉, 당나라 〈당회요〉와 〈구당서〉 등인데, 3~7세기에 경제·정치·문화에 걸쳐 주변국과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와는 언제부터 교류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문주왕 2년(476)에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해 은솔로 삼았다’고 한다. 2년 후 왕이 된 동성왕 ‘조’에 “8월에 왕이 탐라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자 친히 정벌하려고 무진주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기에 그만뒀다. 이 탐라는 탐모라다”하였는데, 이때 왕자의 관직을 받는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조’(662년)에는 “탐라국 주인인 좌평 도동음률이 항복했다. 때문에 좌평을 관호로 삼았다. 신라에 항복해서 속국이 됐다.” 이후에도 탐라는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교류했다. 한편, 〈구당서〉 ‘유인궤 열전’에 보면, 백제 멸망 후 ‘백제·왜 연합군 잔병들이 항복할 때 탐라인도 같이 데리고 항복했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탐라군도 백제부흥군과 함께 왜군과 연합해 나당동맹군에 맞서 백강 전투에서 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신라가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울 때의 아홉 나라에도 탐라가 들어있다. 신라에서는 탐라를 속국으로 삼은 이후에도 왜, 중화, 말갈, 예맥 등과 함께 ‘구한’의 하나로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나당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679년에 신라가 다시 탐라를 경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탐라국 왕세기〉에 신문왕 때(684) 탐라는 고지창을 신라에 보내 설총의 이두문자를 도입했다고 한다. 또 김헌창의 난 때(822)는 신라 귀족들 일부가 탐라로 피신하기도 했다.
이렇듯 탐라는 동아시아의 격동기에 강대국들 사이에서 활로를 모색하며 활발한 외교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한반도 삼국은 물론 모든 동아시아 국가는 불교를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탐라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현 스님의 제주 산방일기] 탐라는 ‘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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