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안도현의 ‘공양’
공양/ 안도현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창비, 2008-
아, 그렇구나. 세상만물이 공물(供物) 아닌 것이 없구나.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칡꽃 향기’,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소낙비의 오랏줄’, ‘매미울음’. 우주에게, 신령에게, 부처님에게, 대자연에게, 어르신에게, 공양 못 올릴 것이 없구나. ‘근’, ‘평’, ‘치’, ‘발’, ‘되’. 계량화하니 더 실감나구나. 구체적이어서 더 오붓하구나.
부처님 시대 최고의 의사, 부처님의 주치의 지바카는 말했다지. “세상에 약(藥)으로 쓸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세상 모든 것이 약이고 약재”라고.
그러고 보니, 그동안 우리는 ‘공기 만이천 근’을 너무나 소홀히 여겼구나. ‘물 스물한 평’, ‘바람 스물네 치 반’, ‘햇살 오천 발’, ‘구름 서른닷 되’를 너무 하찮게 여기고 살았구나. 자연이, 세상만물이 우리에게 올리는 공물을, 공양을 너무 함부로 소비하고 살았구나. 감사를 잊고 살았구나.
필자가 중[僧]이 되려고 처음 산문(山門)에 들던 날, 밥 먹기 전에 밥상머리에서 두 손을 모두고 사형(師兄)이 읊조리던 말이 다시금, 새삼, 깊게, 떠오르는구나.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음식으로 주림을 달래고 몸과 마음을 바로 하여/ 사회대중을 위하여 봉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안도현 시인은 왜 이 대자연의 공물들을 근, 평, 치, 발, 되로 계량화해 놓았을까. 가시화해 놓았을까.
어리석은 우리들이, 무명(無明)의 우리들이 ‘산(山)벌의 날갯짓소리’가 공물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봐, ‘칡꽃 향기’는 공양물이 아니라고 우길까 봐,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우매함을 깨우쳐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우문우답(愚問愚答) 하나 더. 안도현 시인이 세상에 바치는 이 공물들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물질일까, 마음일까. 아니면, 이 둘 다일까. 문득, 생각나는 어느 선사의 ‘할’ 한 방. “물질 있는 곳에 마음 있고, 마음 있는 곳에 물질 있다.”
맞다. 물질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1+1’이지만 ‘2’가 아니라 ‘1’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 한 가지. 단 한 푼이라도 물질에 기울면 그 마음은 ‘49.999’가 아니라 ‘0’이 되어버린다. 마음 역시 마찬가지. 한 푼이라도 물질을 가벼이 여기면 그 마음은 ‘100’이 아니라 ‘0’(공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은 부처님의 중도(中道)를 그렇게 구체적으로 계량화(가시화)해 놓은 것이다.
이 시 속에 감춰진 비밀 하나 더. 윤회의 인드라망이다. 식물이 다시 ‘태어나기(윤회)’ 위해서는 반드시 벌이 필요하고, 벌을 끌어들일(유혹할) 꽃향기가 필요하고, 꽃향기를 매달고 있을 (백도라지) 꽃줄기가 필요하고, 비(물)가 필요하다. 안도현 시인은 그것(윤회의 과정과 순서)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이 시를 썼다. 안도현 시인의 천재적 계산(감각)과 불심(佛心)과 반야(혜안)가 저절로 느껴진다. 아 참, 안도현 시인은 그것을 바라보고 기록할 업경대( 業鏡臺)ㅡ매미 울음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이런 공양을 받은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안빈(安貧)속에서도 낙도(樂道)할까. 아니, 천하가 공물이고, 만물이 공양물이니 얼마나 풍성하고 편안할까. 이게 바로 부처님의 이고득락법(離苦得樂法) 아닐까.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 모두가 좋은 ‘자리이타 이타자리(自利利他 利他自利)’ 아닐까. 발고여락(拔苦與樂) 아닐까.
‘공양’과 ‘공물’의 진폭과 지평을 이렇게 밝고 자상하고, 깊고 융숭하게 넓혀 놓은 안도현 시인에게 참으로 감사드린다. 이젠 우리도 모두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융숭하고 풍성한 ‘밥상(공양)’을 올 릴 수 있게 됐다. 중도와 윤회의 삶과 과정도 알게 되었다.
‘팔만사천 근의 법문’보다, 단 한 편의 시가 우리 육근(六根)을 더 빨리 정화시켜주고 밝게 해주는 것을 알았다.
사족 한 마디 더. 필자와 안도현 시인은 80년대 같은 대학 캠퍼스에서 동고동락했다. 같이 막걸리도 많이 마시고 노래도 목청껏 부르고 울분도 같이 토했다. 안도현 시인의 번뜩이는 천재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렇게 ‘공양’을 ‘공양’ 올려준 안도현 시인에게 필자도 ‘공양’을 올려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