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제주산방일기]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는 없다

제주시는 한라산 백록담에서 태고의 정기가 흘러내린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 서쪽 줄기는 탐라계곡을 따라 용연과 한두기로 내려오고, 다른 동쪽 줄기는 관음사를 품고 있는 아미봉 줄기를 따라 산천단을 거쳐 산지천으로 흘러 제주항에 이른다. 칠성의 기운을 받은 곳에 옛 탐라인들은 성을 짓고 살았는데, 지금까지도 그 지명은 남아 성안의 칠성통을 두고 동문통과 서문통으로 나뉜다. 그곳에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석불상 제주민속자료 1, 2호인 동·서자복(미륵)이 제주성의 수난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원진은 〈탐라지(1653)〉에서 ‘만수사는 일명 동자복사라 하며 건입포 동쪽 해안 위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만수사에서 바라보이는 서편에는 해륜사가 있다. 두 사찰은 모두 고려시대에 창건됐다.

그 후 조선의 배불정책으로 쇠퇴를 거듭하다가 1702년 목사 이형상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는 〈남환박물〉에서 “주성 동쪽에 만수사가 있고 서쪽에 해륜사가 있어서 각각 불상은 있으나 상시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마을 자체에서 한 사람을 정하여 돌보게 하고, 또 네 명절 때면 서로 모여서 예불할 따름이다. 나는 말하기를 점차 오래 둘 수 없으니 곧 두 사찰을 헐어서 공해로 옮겨 세우라 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도 두 불상은 현재까지 수호불로 남아있다. 사찰과 함께 불상을 훼철하였던 다른 사례에 비춰보면, 배불의 의지가 아무리 강한 목사에게도 이 두 불상을 향한 도민들의 마음을 외면하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수호의 의미는 도민의 안녕을 비는 입춘굿의 시작을 알리는 고불제로 지속되고 있다. 도민들은 그 사찰 주변의 언덕을 ‘절동산’이라 부른다. 

이와 함께 기록되지 않아 잊혀가는 이야기가 몇몇 노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동한두기물은 예전에는 돌로 싼 원형 산물 터를 갖고 있었다. 이 산물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다는 의미의 갈마수, 혹은 스님들이 마시던 물이라고 하여 ‘중물’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버랭이깍’으로도 불렸다. 그 중물은 선반물 동북쪽에 위치하는데, ‘콩큰물’이라고도 한다. 절에서 이 물에 콩을 담가 불려서 두부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길렀기 때문에 콩을 큰(담근)물이라 한다.” 

두부는 주로 사찰음식으로 발전됐는데, 이색의 〈목은집〉 ‘대사구두부래향’이라는 시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미뤄 고려 말에 원나라로부터 전래됐을 것이다. 이후 조선 시대에 두부는 사찰에서 관청에 공급하게 하거나, 왕릉 옆에 능침사찰을 짓고 조포사라 하여 제물로 바치게 하였다. 

이로 미루어 해륜사 앞 콩큰물에서 만들어진 두부는 사찰에서만 쓰였던 것이 아니라 제주 관아와 선비들에도 공급됐을 것이다. 콩큰물 두부 제조 기술이 전승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에도 ‘서문’의 이름을 내세운 두부는 제주지역에서 유명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제주성 동쪽 조천관 터 근처의 ‘절간물’이라 불리는 용천수의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사찰 관음사로 가는 길이라 하여 개남길(관음길)이라 불리는 올레길을 따라 걷다가 조천초등학교 뒤 대섬의 초입에 이르면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도 두부를 만들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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