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꽃길을 따라 시다림을 다녀오니, 절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차담이 시작되자, 누군가 ‘시래’하고 작은 떡 조각을 등 너머로 던지자 몇이 따라 합니다. 그 유래와 의미를 물으니, 모르지만 옛 어른들을 따라서 하는 것이라 합니다. 이는 제주의 목축 농경시대에 옥황상제로부터 오곡 씨를 지상에 가져온 농경신 자청비를 기리는 것입니다.
자청비는 제주에 전승되는 서사무가 ‘세경본풀이’의 주인공입니다. 세경본풀이는 큰 굿에서 연행되는 무가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승되는 ‘농경기원신화’로 그 내력을 풀어내는 이야기입니다.
옛날 김진국 대감과 조진국 부인이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동관음절 부처님께 공을 들여 자식을 점지받았는데, 스스로 청해 태어났다고 해서‘ 자청비’라고 했다. 같은 날 하녀도 아이를 낳았는데 ‘정수남’이라 했다.
자청비는 자라면서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빨래하러 연못에 갔다가 우연히 옥황상제의 아들 문도령을 보게 되었다. 첫눈에 반한 자청비와 문도령은 함께 글공부하며 사랑을 나누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했다.
문도령은 다시 돌아오겠다며 복숭아씨를 남기고 하늘로 떠났다. 자청비는 긴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다가 문도령을 찾아 나섰는데, 함께 떠난 정수남이 겁탈하려고 하여 죽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죽인 이유를 말했지만, 오히려 나무라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자청비는 서천 꽃밭에서 생명꽃을 꺾어 와 죽은 정수남을 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청비의 재주가 무섭다며 다시 내쫓았다.
집에서 쫓겨난 자청비는 비구니가 되어 떠돌다가 청태산 마고할미의 수양딸이 되었다. 할미의 도움으로 문도령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청비의 장난으로 오해를 한 문도령은 하늘로 돌아가 버렸다. 자청비가 직접 문도령을 만나기 위해 하늘 문곡성을 찾아 나섰다. 자청비는 하늘나라로 올라가 문도령을 만났고, 옥황상제의 시험을 통과하여 결혼 승낙도 받아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난리가 나서 반란군이 문도령을 죽였다. 자청비는 서천 꽃밭에서 멸망꽃과 생명꽃을 얻어 와서 반란군을 무찌르고, 문도령도 살려냈다. 큰 공을 세운 자청비에게 옥황상제가 하늘나라 영토를 주겠다고 했으나, 자청비는 이를 거절하며 “하늘의 오곡 종자 씨앗을 인간 세상에 전하고 싶습니다”고 했다. 씨앗을 받아 내려와 보니 하나가 부족하여 다시 올라가 얻어왔는데 메밀 씨앗이다. 그래서 한 달 늦게 메밀 씨앗을 뿌렸는데도 수확은 다른 작물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문도령은 지상으로 내려와 상세경, 자청비는 중세경이 되어 농사를 보살폈고, 정수남은 하세경이 되어 말과 소 같은 동물을 돌보게 되었다.
자청비가 죽은 사람을 살리고 하늘의 난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서천꽃밭에 핀 ‘환생’, ‘멸망’, ‘생명’의 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천꽃밭은 살아있는 사람은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는 서방정토의 아미타불의 화현으로 관음·세지보살께서 사바세계로 오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청비는 생명의 씨앗을 갖고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화현하여 고난의 삶으로 오는 보살이 아닐까요? 이 이야기는 삶 끝에 죽음을 맞고 죽음 너머로 새 생명이 피어나는 삶의 실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