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글로벌 경제통상 학부
샤프란 혁명 당시 한국인 스님 도움으로 입국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눈과 바람 그리고 비가 있듯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최재희의 인물로 본 미얀마>를 처음 기획했을 때는 미얀마의 민주정부 2기 출범을 앞둔 상태였다. 미얀마 현지로 돌아가 미얀마 사회를 구성하는 스님과 정부 관계자, 정치인, 경제인, 학생 등 다양한 계층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조망하여 미얀마 현재 사회의 불교적 가치관이 담긴 ‘인적 인드라망의 그물’을 그리고 싶었지만 쿠데타로 인해 첫 기획의도를 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돌을 탓할 순 없었다. 다시 일어나서 한국에 거주하는 미얀마 차세대 리더들과 인터뷰를 하며 미얀마 사람들의 문화, 가치관, 습관 속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불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연재의 마지막을 어떤 인물로 채울까?’ 하는 고민 끝에 동국대학교 글로벌 경제통상 학부 조교수로 재직 중인 딴툿우 교수가 생각났다. 현대불교신문의 첫 연재는 ‘최재희의 비긴어게인 미얀마’였다. 이 연재를 시작할 때 ‘동국대학교 불교학부때 받은 장학금의 회향’이라는 포부를 적었었다. 처음과 시작을 불교라는 큰 틀 안에서 미얀마 그리고 동국대라는 키워드로 회향하게 돼서 인터뷰를 준비하는 내내 알 수 없는 설렘과 아쉬움에 휩싸였다. 그는 올해 1월 8일 토요일 자신의 결혼식을 앞두고도 질문 하나에 정성 가득한 답변을 해주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논리 정연한 답변을 통해 미얀마 사람들의 일상생활, 가치관 문화 속에 불교가 어떤 상징을 가고 있는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은 그와 함께 진행한 일문일답이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의 본명은 Thunt Htut Oo이며 미얀마어 바름으로 딴툿우라고 합니다. 한자의 뜻은 없지만, 굳이 뜻을 풀자면 ‘딴’는 깨끗하다, ‘툿’은 으뜸이며 ‘우’는 앞장서다 혹은 리드한다는 입니다. 직업은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의 글로벌 경제통상 학부에서 조교수로 있으며 무역영어와 글로벌/무역 마케팅, 전자무역, Global Business English, 수출과 창업 등의 과목들을 영어와 한국어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요 연구 분야는 글로벌 마케팅, 수출경쟁력, 무역보험, 외국인직접투자, 경제성장 등이며 미얀마를 중심으로 한 아세안 지역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름은 우정수입니다. 이 이름에서 깨끗하다는 의미를 따서 깨끗하며 맑은 물이라는 뜻으로 지인 스님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한국은 2007년 연말에 넘어왔습니다. 2007년은 미얀마에서 샤프란 혁명이 일어난 해였지요.
교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 적은 임금을 받아 힘들어 했지만 교육의 길을 꿋꿋이 지켰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위암으로 돌아가셨지만, 어렸을 때부터 군에 대한 혐오감을 가졌고, 아들인 저를 미얀마를 떠나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수학과 영어를 잘 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매일 같이 저와 누나를 앉혀 영어와 수학 특히 영어를 가르치셨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2004년쯤 한 한국인 스님과 인연이 되었고, 그 스님께서 저를 한국에 데려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가 해외에 나가 일을 하고 가족의 생계를 도와주는 것을 원했습니다. 저 또한, 발전이 없는 나라를 떠나 희망의 땅을 찾고 싶었고, 가난하던 가족생계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2007년 스님의 도움으로 한국에 넘어오게 되면서 한국생활을 시작했으며 올해가 14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Q. 한국에서 미얀마의 관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신가요?
A. 2007년에 한국에 왔을 때, 많은 한국인들이 미얀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향후 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의 문화, 경제와 정치 등을 알리는 블로그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족생계 그리고 일과 석.박사 공부까지 병행해야 했기 때문에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에 크게 참여하지 못한 것을 사실입니다. 다만, 경제 공부를 하면서 군이 정치와 경제를 개입했기 때문에 미얀마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또한 2008년 헌법의 어두운 이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021년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군에 대한 혐오감과 미얀마의 앞날이 매우 걱정스러웠습니다. (https://blog.naver.com/tho2004)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킨 2021년 2월부터 한국인들에게 미얀마의 정치와 군의 쿠데타를 알리고 군의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를 호소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 대구 MBC의 특집 대담 출연과 더불어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강연과 불교연구회 등에서 특별 강연을 통해 미얀마 상황을 알리고 지인 미얀마분이 하시는 YAM (Youth Action for Myanmar) 행동하는 미얀마청년 연대를 한국인에게 홍보하고 미얀마 국민들을 위한 지원금을 모일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사실은 초창기에는 각 계층에 있는 많은 미얀마인들이 여러 시민단체들을 결성해서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과 군의 범죄 행위를 알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전 세계를 알리는 것이 중요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군의 폭격과 대학살로 인해 피신하고 있는 이재민, 유가족들 그리고 국민방위군 (PDF)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이 더 절실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루트를 통해 지속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미얀마 시인들이 쓴 혁명의 시들을 번역하는 일을 도와주고 있으며 조만간 번역된 혁명의 시들이 한국어 버전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Q. 미얀마 문화에서 불교와의 관련성이 있다면 설명해주세요.
A. 미얀마에서의 불교는 문화와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얀마 문화 자체에 불교가 녹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불교는 미얀마 아이들의 가치관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미칩니다. 미얀마의 불자라면 어렸을 때 한번쯤은 신쀼를 통해 체험 출가를 해보셨을 것이다. 저 또한, 어린 적 엄마의 고향 마을에 있는 주지 스님의 사원에서 첫 체험 출가를 했습니다. 체험 출가이지만, 한국의 템플스테이와 많이 달랐습니다.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실제 스님의 삶을 사는 것이며 불법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 생활을 배우게 되고 부모로부터 일시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한국에 오기전에도 수행 센터에 들어가 집중 수행한 경험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 때 수행을 통해 얻어진 마음의 편안함은 아직도 잊지 못한 기억이 되었고,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매우 익숙해졌습니다. 그 후 집중력이 강화되고 화를 다스리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성격상의 차이도 있을 수 있지만, 수행을 하게 되면서 성격이 온화해지고 긍정적으로 변하면서 많이 밝아졌습니다.
지금도 체험 출가까지는 아니지만, 미얀마 가면 한번쯤 수행센터에 들어가 수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불교를 접한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명상센터에서 수행을 하면서 불교와의 공동생활을 평생 이어가는 것입니다.
둘째, 불교는 가정형편에 안 좋은 아이들에게 교육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탈출구입니다. 많은 절이나 사원들은 아이들에게 불교 교육을 제공하거나 양곤의 한 사원에서는 무료로 영어, 중국어와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사원은 형편이 안 좋은 가정의 아이들에게는 중요한 교육의 기관이 됩니다. 또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유명한 절이나 사원에서는 주지스님의 수행 비서로서 일을 하거나 인맥을 통해 좋은 일자리를 연계하는 등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기능까지 합니다. 군 독재 체제에서 사회안전망이 없었던 미얀마에서는 불교와 불교의 시설은 일부의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대신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곤 출신인 저 마저도 한국어를 사원에서 무료로 배웠을 정도로 사원이 사회에 미치는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많은 사원들이 다양한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는 배경에는 대규모 기부금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미얀마인들을 사원과 절에다가 일년 내내 기부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일년 동안 6월과 9월 제외하고 매월 공휴일이 있을 정도로 명절과 축제 그리고 종교 공휴일들이 많습니다. 공휴일이면 축제를 즐기거나 친구들과 노는 경우도 있지만, 절이나 사원에서 잔치를 열고 기부를 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신쀼도 그 많은 행사 중 하나입니다. 개개인이 기부하는 경우도 많지만, 가족단위와 회사의 기념일을 계기로 거액의 기부금이 전달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많습니다.
양곤의 곳곳에 유명 절이나 사원에 들어가면 사무실의 큰 칠판에 보면 행사 일정과 기부자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그 정도로 기부는 미얀마 국민들에게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자선지원재단 (Charity Aid Foundation)에서 모르는 사람에 대한 도움, 기부금, 자원봉사 시간 등 3 가지의 측정 항목으로 세계기부지수 (World Giving Index)는 도출하여 발표하고 있는데 미얀마는 2015년 기준 1위에 기록한 바도 있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미얀마는 모르는 사람에 대한 도움은 미국, 뉴질랜드, 캐나다, 영국 등 선진국 보다 낮지만, 기부금과 봉사활동 시간에 대한 측정항목에서 92점과 50점 각각 받으며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정도로 미얀마 사회에서는 기부라는 것이 특별히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이 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 기부에 대한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것은 윤회에 대한 강한 믿음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얀마의 불교는 윤회에 대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이번 생에서 열심히 해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생을 위한 좋은 업보를 쌓아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미얀마인들이 많습니다. 즉 윤회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이 좋은 업보를 쌓는 수단으로 출가, 수행, 기부와 부모에 대한 부양을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 어린 나이에 출가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 출가하게 된 동기에는 좋은 업보를 쌓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인지 다른 의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2016년 기준 Michihiro Wada 학자에 따르면, 미얀마의 승려 인구가518,592명이며 사원은 64,047에 달합니다. 참고로 태국의 경우, 승려인구는 352,031명이며 사원은 40,544 개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출가는 일부 미얀마인들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으로 인식이 되고 있습니다. 출가를 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수행을 하거나 부모를 부양하거나 기부를 하는 것이 좋은 업보를 쌓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기부는 우리에게 일상 생활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기부에도 여러 방식의 기부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동안 승려들은 승려와 사원에게 행하는 기부를 가장 높은 수준의 선행이라고 강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유는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는 사원으로서 신도를 유치하고 사원을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 유일한 수단은 기부금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원들은 다양한 기능을 어필하여 신도를 끌어 모여 기부금을 조성합니다. 사원에 어떤 승려가 계시느냐에 따라 신도의 유형도 꽤 달라집니다. 불교 교계의 대표 강백 스님이나 법랍순서가 높은 승려들이 계신 사원은 명상센터나 불교 교육에 특화되며 그렇지 못한 사원은 언어 교육 등의 사교육을 제공해서 신도들을 확보하게 됩니다. 어떤 사원은 운명론을 믿는 미얀마인들에게 예언을 하거나 점쟁이의 역할을 하면서 신도를 확보합니다.
이와 같이 미얀마 사원들은 그 규모가 큰 만큼 많은 기부금을 조성해야 하기 때문에 승려와 사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순응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떻든 이러한 사원들의 역할로 미얀마인들에게 기부를 하는 문화가 일상화되었던 것을 사실입니다. 이번 봄혁명에서 군사 테러리스트를 저항하고 있는 국민방위군 (PDF)을 비롯해 미얀마 국민통합정부 (NUG) 그리고 군사의 폭격과 범죄 행위로 피신하고 있는 이재민과 유가족들에 대한 지원금이 지속적으로 충당되고 있는 데 이는 미얀마 국민들의 기부에 대한 보편성에 기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점들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승려들의 위엄이 대단했고, 신도가 많은 사원은 대규모의 기부금이 모아지는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바간왕조 때도 1집 1탑이라고 불린 정도로 탑을 세우는 것이 왕실과 가문의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는 행위로 여겨졌을 정도입니다. 부자들은 사원에다가 많은 기부금을 쏟아 붓습니다. 그 결과, 60년 넘은 군사 독재로 사회 곳곳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기부는 주로 절이나 사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많은 사원에서 그 어려운 가정의 자식들과 사람들을 보살펴 주며 불교의 교육과 더불어 사교육까지 제공하면서 인재 육성에 기여를 하고 있고 사원을 통해 많은 자원들을 사회 곳곳에 재분배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필요한 자원들을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에게 효율적으로 배분된 것은 아닙니다. 이는 사원은 종교시설일 뿐 경제성장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거나 사회인프라를 구축하는 경제정책 기관도 아니며 심지어 사회안전망을 지키는 기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령 그 일부 기능을 한다고 하들 그 방식이 체계적이지 못하고 효율적이지 못하며 통제와 관리의 대상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얀마의 불교는 바간 왕조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왕들, 지도자들과 독재자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특정 역할을 하면서 변해왔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 왕들이 많은 돈을 들여 탑과 사원 그리고 파고다들을 세우지 않았으면 현재 황금의 탑 미얀마라는 브랜딩을 갖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지 못했을 것이다". 맞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수많은 세월을 흘려 여러 왕들 그리고 독재자가 불교에다가 돈을 쏟아 붓든 투자를 하든 그 성과는 부정부패와 불공평한 사회시스템을 통해 일부 승려와 독재다의 소수집단에게 다시 되돌아갈 뿐 전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넷째, 불교가 부모와 자식 간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 원칙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불, 법, 승 3보에 귀의하고 부모와 스승을 공경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배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사회에서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을 전달하는 승려들에 귀의해야 한다는 것을 암목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특히, 미얀마 사회에서는 부모의 은혜는 아무리 갚아도 갚아지지 않을 정도로 위대하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되면서 미얀마 청년들에게는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자기의 삶의 목표 중 하나로 인식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대한민국에 EPS (근로허가제도)를 통해 취업한 젊은 미얀마 청년들은 부모님을 부양하고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서 한국에서 일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어떤 경우 부모님과 형제자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적들의 생계까지 책임을 지고 있는 미얀마 청년들이 많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저도 부모님을 부양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도리라고 배웠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호강시켜주는 것이 꿈이었을 정도입니다. 2007년 한국에 일하러 나온 것도 그러한 영향들이 컸습니다. 다만, 한편으로 보면, 사회보장 안전망인 노후 생활 관련 연금제도나 보험 제도가 발달되지 못한 미얀마에서 부모들의 노후 생활은 자식들의 손에 달려 있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다섯째, 불교는 스승과 제자 간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며 그대로 교육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불자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불교의 불법과 만트라 등을 독송하는 것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한 이유인지 미얀마 교육 방식도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생각하는 교육, 통찰력을 키우는 교육,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이 아닌 기존의 지식을 있는 그대로 독송하여 얼마나 잘 암기하느냐가 미얀마 교육의 성과로 여겨왔습니다.
여섯째, 이번 혁명을 통해 미얀마의 불교는 전환점을 맞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 이유는 군이 불교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데 있어서 불교계의 일부 스님들이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 스님들 중 일부는 평소 많은 미얀마인들의 존경을 받은 승려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불교의 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자기 멋대로 가르치고 해석하고 군의 편에 서서 자기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양심이 썩은 일부 스님들의 행보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기부의 방식도 점차 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Q. 미얀마의 아웅산수찌 국가고문, 우윈민 대통령을 비롯하여 미얀마를 대표하는 정치인들도 불자여서 매일 명상과 경전독송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매일 하시는 불교적 수행이 있다면 설명해주세요.
A. 미얀마는 불자의 집안이면 작은 법당 혹은 기도를 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어린 적 시절에는 경전 독송을 했었고, 주로 사원이나 명상센터에서 생활할 때 경전 독송을 합니다. 다만, 한국에 오게 되면서 명상만 주로 하게 됩니다. 사는 아파트에 법당은 없지만, 부처님을 모시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며 여유가 있을 때마다 15분에서 30분정도는 여러 자세로 명상을 합니다. 명상의 기본이 호흡 명상을 주로 하는데 코끝에 집중하여 숨이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산란해지거나 주의가 딴 데로 가는 것을 자각하면서 다시 코끝으로 그 주의를 가지고 오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집중력이 강화되고 현재의 순간순간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생깁니다.
Q.미얀마에서 존경하는 대통령, 혹은 고대의 왕들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미얀마의 지도자로서 아웅산 장군을 가장 존경합니다. 모든 지도자들을 통틀어서 국민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국민을 가장 많이 생각해주는 지도자였습니다. 미얀마는 오래 기간 동안 영국의 식민지로 통치를 받았고, 그 후 일본의 식민지까지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런 과정에서 소수민족들과 충돌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대에서 인도인과 중국인들의 대거 유입으로 미얀마는 정치적으로 복잡하며 얽힌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웅산 장군은 목숨을 받치고 독립을 쟁취할 수 있도록 발버둥친 유일한 지도자였습니다.
영국 식민지로부터 구제해주겠다는 일본장군의 회유에 넘어가 영국군을 몰아쳤지만, 이후 일본군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목격하고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 영국군과 연락을 접촉하여 다시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크나큰 기여를 한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1947년 삥롱 회담을 실현시켰고, 암살로 인해 연방제도의 실현이 무산되었으나 아웅산 장군이 얼마나 미얀마 국민들을 생각하고 독립을 원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독립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유일한 지도자였습니다. 또한, 유일하게 불교를 정치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하고 온 국민이 충성하고 존경하는 군대를 만들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웅산 장군이 암살 당한 뒤 7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불교는 정치에 깊이 개입이 되어 있으며 군의 지도자는 온국민들을 상대로 대학살을 저지르고 군의 정치 개입을 헌법화 시키는 등 악질적인 군대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아웅산 장군도 소수민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들이 나옵니다만 이는 아웅산 장군이 암살을 당하면서 무산된 것에 기인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단지 아웅산 장군이 소수민족들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고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Q. 한국에 살면서 사찰에 가 본 적이 있으신가요? 한국 사찰을 방문했을 때 인상 깊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A. 한국 사찰에서 머문 적도 있으며 템플스테이를 체험한 적도 있습니다. 한국 사찰은 여러 면에서 미얀마 사원과 다릅니다.
첫째, 불상의 모습이 많이 다르고 불상의 양 또한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벽화들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신도와 재가신자들의 출입이 많지 않고 조용합니다. 미얀마 사원을 늘 사람들로 붐빕니다. 셋째, 한국 사찰에서는 주로 기도하는 공간만 마련되어 있을 뿐 명상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과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넷째, 한국의 사찰들을 국민들의 생활 공간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미얀마의 사원들은 국민들의 생활 공간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데 이유는 공양을 받으러 나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인상이 깊었던 것은 첫째, 스님들과 신도들 간의 돈독하며 친밀한 관계입니다. 사찰에 방문하면 스님께서 차를 내어 대접을 해주고 덕담을 해 주시니 무척 마음이 편안하고 면담만으로도 스트레스를 풀린 기억이 있습니다. 둘째, 국민들의 생활 공간과 멀리 떨어져 있고 특히 산과 어울리는 사찰의 경우, 등산을 하거나 계곡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경로가 있어 매우 좋았습니다. 셋째, 템플스테이의 경우, 편안한 마음으로 사찰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미얀마의 경우, 대부분의 사원들의 시설이 매우 열악할 뿐만 아니라 요구되는 것이 많아 편안한 마음으로 사원에서 머물 수가 없습니다.
Q. 불교가 삶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시나요?
A. 저의 인생에는 불교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첫째, 불자가 아니었으며 아버지께서 한국의 스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한국의 스님에게 미얀마어를 가르쳐 드렸고, 상좌부불교의 책을 읽고 번역하실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저 또한 한국에 온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불교의 인연이 시작되었지만, 한국 생활 13년 동안 불교와의 인연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불교의 대학교인 동국대학교에서 학사-석사-박사까지 불교 장학금을 받고 마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국대학교에서 저를 조교수를 채용하여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이어준 불교의 인연으로 제의 2의 고향인 한국에서 정착할 수 있었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Q. 부처님의 어떤 말씀과 경전을 가장 좋아하나요?
A. “현재에 집중해라” “과거는 이미 지났고, 미래를 오지 않았다”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첫째,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은 현재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즉 그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제에 집중 못하니 좋은 결과물도 나오지 않겠지요. 둘째, 과거에 대한 후회나 지나친 즐거움은 현재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즉 잘못한 일에 대한 후회나 과거의 성과에 따른 즐거움에 취해 현재를 집중 못한다면 현재는 미래에 어느 시점에서 후회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Q. 미얀마 불교와 관련하여 한국 국민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A.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문제를 바라볼 줄 아는 다양한 시각과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필요해 보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수단들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제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유투브에서 ‘마음’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미얀마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영상이 다양한 스님의 강연이나 법문을 다루는 영상들이 나오지만, 한국의 경우, 스님의 강연과 법문 보다 다양한 전문가들의 영상이 많습니다. 물론 다양한 전문가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마음 다스리는 법도 배울 수 있는 것이 매우 유익하지만, 마음의 공부를 하시는 불교의 스님들의 적극적인 진출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려운 법문이나 강연이 아닌 쉬운 법문과 짧은 말씀으로 종교와 상관없이 마음의 힐링을 할 수 있도록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 다음에 호흡의 명상을 기본으로 배우시는 것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잠시나마 명상을 통해 마음을 비는 연습하다 보면 삶의 문제를 다스리는 내공이 생길 것입니다. 매순간에 자기의 마음의 현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입니다. 종교를 떠나 불교의 명상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스님들의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똑같이, 유투브에서 명상을 검색하여 보면, 일반인들의 요가나 명상 기법들이 다양하게 소개되지만, 스님들이나 사원이 주도적으로 계획하는 콘텐츠가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Q. 현재 미얀마 민주화 운동 속에서 스님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신가요?
A. 불교는 가계와 개개인의 소비를 통해 자원을 배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미얀마 국민들의 생계가 피폐해지고 어려워진다면, 그 국민의 기부에 의존하는 대부분의 사원들을 어려워집니다. 물론 군과 재벌기업들과 유착관계를 형성한 절과 사원은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예로 석유값과 생필품의 가격이 폭등하면서 서민들의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발생한 2007년 샤프란 혁명을 들 수 있습니다. 다만, 2021년 봄혁명에는 2007년 만큼 스님들의 참여와 주도성이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개인적인 관찰이지만, 2010년 이후 미얀마 경제성장이 서서히 증가하였고, 2015년 이후부터 국민소득의 성장률이 연간 6%대를 기록하고 질적인 일자리들이 창출되면서 가계의 재정여건이 한층 개선되었고 이로 인해 절과 사원들도 많은 기부금을 확보되었을 것이고 재정성이 튼튼해 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문민정부의 통치와 함께 민주주의 사회의 기반이 요구되면서 불교 교육에 대한 승려들의 역량에도 변화가 요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대부분의 스님들은 환영했지만, 친군부 세력의 일부 스님들은 그런 상황이 그리 탐탁하지 않았을 것이고 불교계의 분권화를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소식통에 의하면, 군과 유착관계에 있는 불교계의 일부 강백 스님들에 의해 단일화가 강행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런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2021년 봄혁명을 오히려 군의 정당을 대놓고 응원하는 승려 집단도 생겨났을 정도 봄혁명에서 승려들의 참여와 주도성이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다만, 미얀마 국민들을 불교계의 진실을 파악하고,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이 생긴 것이 불교 개혁에 크나큰 발전이 아닌가 싶습니다.
Q. 한국에서 적응 하기 힘들었을 때 불교가 주는 가장 큰 힘은 무엇이었나요?
A. “모든 것이 소멸되고 또 다시 탄생되는 데 이를 반복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는 사건과 문제를 의식하는 태도와 이에 따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들어도 순간이고 즐거운것도 순간인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추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힘들다는 것도 즐겁다는 것도 어떤 대상에 대한 마음의 태도일 뿐입니다. 태도는 바꿀 수 있습니다. 순간 순간의 태도를 바꿀 힘과 내공만 기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태도를 바꾸면 순간 순간에 좋은 생각으로 좋은 업보를 쌓고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아픈 것도 죽을 것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힘들 때 그렇게 생각합니다.
Q. 동국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학생들과 동료들과의 관계에 있어 부처님 법 중 어떤 것을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까?
A. “이기려는 마음 보다 고개를 조금 더 숙이고 지면서 살자”는 것이 저의 모토입니다. 이기려는 마음은 ‘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부처님의 말씀 중 공 그 자체에는 수‧상‧행‧식도 없다는 것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해 무언가를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차피 죽고 말 것입니다.
다만, 그 과보만 남아 있을 뿐 또 다른 형태로 우리는 태어나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순간 순간의 마음 가짐에 의식하여 최선 다하여 정직하고 올바른 마음과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육자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집단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는 사람과 사람 대로 대하고 따뜻하게 품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교수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A. 미얀마와 한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특히, 경제협력을 통해 서로 윙윙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번 봄 혁명에 필요한 금전적인 지원과 정책적인 지원을 통해 미얀마의 민주화가 하루 빨리 정착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보다 한국에서의 미얀마 커뮤니티가 커지면서 미얀마와 한국의 우호적인 관계가 이번 봄혁명을 통해 한층 더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한국과 미얀마의 통로가 되어 양 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기여를 하고 싶다는 그의 꿈을 들으니 나의 꿈과 겹쳐 보였다. 이번 인터뷰 또한 양국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작은 발걸음의 초석이다. 어려운 고국의 상황 속에서 미얀마의 미래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민주화라는 한 목표를 위해 타국에서도 열심히 활동하는 그의 활동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부처님의 나라, 천불천탑의 신비를 가진 미얀마에 부처님의 자비와 가피가 조속히 찾아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이번 칼럼을 마친다. 2년동안 미얀마와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한국의 <현대불교신문> 독자여러분들께 전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훗날 다른 인연으로 독자 여러분과 다시 만나길 바라며 , 째쥬띤바대(감사합니다)!
